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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밍의 역사·문화 보물찾기오지마을 순례, ‘화려하고 웅장함’이 사로잡네!
류기석  |  yoogiseo@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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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년 04월 07일 (수) 10:01:34
최종편집 : 2010년 04월 08일 (목) 00:22:46 [조회수 : 4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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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봄바람이 코끝을 스치는 계절이 돌아왔다. 때마침 오지마을 순례 길에서 만난 사랑스러운 봄의 도시 쿤밍은 동쪽으로는 광족 자치구, 서쪽으로는 서장 티베트자치구와 미얀마, 북쪽으로는 스촨 성, 남쪽으로는 라오스와 베트남 등과 맞닿아 있어 일찍이 ‘동남아로 향하는 실크로드’라고 불렸다.

지난해 말 중국에서 실시한 "사람이 살기 좋은 도시 톱10"에 ‘쿤밍은 1년 내내 따뜻하면서 부드러운 기후 등이 인간이 거주하기에 좋은 환경조건’으로 꼽혔다. 이곳에는 이미 우리나라에서 직항의 노선이 운영되고 있으며, 중국 내륙의 샹그릴라 혹은 티벳으로 가는 길목이기도 하다. 때문에 긴 여정으로 이곳을 찾아 쿤밍이 속한 윈난(雲南)성의 고풍스런 유적을 둘러보고는 티벳으로 가거나 중국과 국경이 접한 태국과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 등의 인도차이나 반도로 가는 여행의 길목이 되기도 한다.

쿤밍은 서산, 남람, 진지 세 방향으로 나뉘는데 이들에 둘러싸인 산수 좋은 고원의 도시다. 무미건조한 중국의 도시에서 화려하고 산뜻한 봄꽃은 그 종류와 색깔에 상관없이 마음이 글린다. 이런 쿤밍의 특성 때문인지 이곳에서는 화훼와 원예 관련 세계적인 전시회가 열려 여행자의 마음을 한껏 설레게 한다.

쿤밍 최대의 화려하고 웅장한 고찰, 위엔통쓰(圓通寺)

향긋한 봄내음이 느껴지는 오후, 쿤밍 최대의 화려하고 웅장한 고찰, 위엔통쓰(圓通寺)를 찾았다.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 사찰인 위엔통쓰(圓通寺)는 쿤밍시내 동물원과 가까운 원통가 중간부분에 위치하고 있었다. 원통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사찰로 당나라 때인 8세기 말에서 9세기 초에 처음 세워졌으며, 부타뤄쓰(補陀羅寺)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으나1255년 몽골의 침입으로 소실되었다가 1301년 원(元)나라 때 중건된 후 위안퉁쓰[圓通寺]로 불렸다. 1686년 강희제에 의해 증축되어 현재의 모습과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 원통선사(圓通禪寺)라는 현판이 붙은 원통사 정문

 

원통선사(圓通禪寺)라는 현판이 붙은 절의 정문은 호젓한 곳이 아닌 복잡한 시내 대로변에 있었다. 규모는 가늠하기가 어려웠지만 약간의 비탈길을 내려가면 한참 수리중인 원통승경(圓通勝景)이라는 일주문의 장엄함과 마주한다. 이어 연못이 나오는데 좌우대칭으로 선방(禪房)들이 줄지어 서있고, 중심 건물인 원통보전과 천왕전, 팔각정 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현재 중국은 온전한 석가의 가르침을 따라 불교신앙을 장려하는 것이 아닌 불교를 박물관화 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티벳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라마도 최근 이와 같은 문제를 지적했다. 그런 점에서 중국 속에 있는 도교사원이나 불교사원, 이슬람사원, 공자사당, 맹자사당 등의 다양한 용도의 건축물과 유적, 유물은 유심히 관찰해볼 필요가 있다. 명대 이후 형식적으로 관리하다가 문화혁명 이후 본격적으로 성역화 시키고 체계적으로 관리해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 청(淸)나라 초기에 지어졌다는 팔각정과 원통산 숲 풍경

 

이에 대해 이병화 역사연구가는 “쿤밍은 남송의 강역(疆域)으로 확신하면서 원통사 천왕전의 위치와 화려하면서 웅장한 건축양식으로 보아 정궁(正宮)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1200년의 역사를 지닌 원통사는 원대 재건된 전력이 있고, 명과 청대에 몇 번에 걸쳐 개보수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핵심적인 왕궁터와 본채 등 건축물들의 위치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왕궁의 고품격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원통보전 뒤편에는 커다란 암반과 작은 연못이 자리했고, 중앙에는 태국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동불전이 있어 들러보았다. 원통전의 규모는 많이 축소된 듯 했다. 이 일대의 원통동물원을 포함한 취호공원, 대덕사보탑 등을 포함, 윈난성 정부청사가 자리한 주변이 내성의 핵심으로 추측된다.

 

   
▲ 원통사내 팔각정과 연못을 중심으로 서있는 선방(禪房)풍경

 

원통보전 앞 연못 위에 지어진 청대 건축물이라는 팔각정안의 천수관음상과 옥불상이 볼만하다고 하는데 그냥 지나쳤다. 팔각정을 지나 돌다리를 건너면 대웅전인 원통보전이다. 대웅전으로 다가 갈수록 높아지는 일반적인 건물에 비해 원통사는 안으로 들어갈수록 지대가 낮아진다는 것이 특징이다.

푸르른 산으로 둘러싸인 원통사는 비취색의 연못과 화려한 색상의 고건축물이 어울려 아름다운 모습을 자랑한다. 원통보전에는 청나라 광서제에 만들어진 3개의 부처상이 대전에 있고 중앙에는 10미터 높이의 두 개의 원주가 있는데 화려한 색상의 용이 꽈리를 틀고 올라가는 형상으로 서로 마주본다.

잠시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불교사원에 하필이면 용이 중앙에 거대하게 자리 잡고 있을까. 용은 일반적으로 제왕(帝王)을 의미하여 임금과 관련되는 모든 것들에 '용(龍)'이란 글자가 들어간다.

 

   
▲ 원통사 대웅보전의 웅장하고 화려함

 

원통사는 매년 음력 초하루와 보름이면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관람시간은 30~40분이면 충분하지만 잠시 자신을 비우기 위한 시간으로 인근의 취호공원과 대덕사보탑, 원통사동물원 등을 반드시 들러보기를 권한다.

취호(翠湖)공원은 윈난성 쿤밍 마지막 날 잠시 머물렀던 곳인데 라봉산(螺峰山) 아래의 운남대학 정문 맞은편 비록 면적은 그다지 크지 않지 만, 늘어진 버드나무와 푸른 호수물이 주요 특색을 이루기 때문에 1900年 초기에 취호가 정식명칭이 된 곳이다. 원래는 하나의 만(灣)이었는데, 점차 수위가 내려가면서 나중에 푸른 호수가 되었다고 한다.

취호는 크게 5곳의 풍경구로 나뉜다. 호심도는 호심정과 관어루 등 청대 건축물이 주를 이루고, 동남쪽은 수월헌과 김어도, 동북쪽은 죽림도와 구룡지, 남쪽은 호로도 와 구곡교, 서쪽은 해심정이 있다.

쿤밍의 온화한 오후 햇살이 바람에 살랑거리는 버드나무와 물, 조각배 그리고 여행을 도와준 슈슈(중국인 가이드)와 함께 어우러졌던 풍경이 잔잔하게 기억된다.

윈난성박물관에서 만난  ‘뉴후통안’의 따스함과 청동기문화 

그다음 찾았던 곳이 동풍서로(東風西路)에 위치한 윈난성박물관이다. 박물관은 1951년 8월에 지상 7층 건물로 40미터 높이의 3층 보탑 스타일로 지어져 특이했다.

 

   
▲ 위쪽 윈난성박물관내 벽화, 아래(좌) 윈난성박물관, 아래(우) 1층 전시실 입구

 

1층은 특별전을 하는 곳으로 관람할 수가 없었고, 2층부터 3층까지가 전시홀로서 운영되고 있었다. 총 4200평방미터의 공간에 윈난의 다채로운 역사문물, 민족문물, 공예, 미술품 등 5만여 종의 전시품들이 전시되고 있다고 하는데 들어가 보니 실망이 크다. 한 마디로 "그 많던 윈난성의 유물들은 지금 어디로 갔을까?"  

2층은 윈난에서 발견된 유물들로 주로 철기문물과 청동기문물이 대부분이다. 왼쪽의 전시실에는 남조국(南诏国)과 대리국(大理国)시기의 출토된 불교 예술품을 위주로 원명청대까지 불교문물을 전시해 놓았다.

 

   
▲ 가운데 '뉴후통안'은 청동기 유물 중에서도 가장 진귀한 보물

 

그중 눈에 뛴 것은 ‘뉴후통안’이라는 전시물이다. 윈난 지역은 청동기문화를 꽃피웠던 지역으로도 유명하다. 뉴후통안은 청동기 유물 중에서도 가장 진귀한 보물로 손꼽힌다. 모양은 뒤에서 호랑이가 물고 있음에도 임신한 새끼소를 끝까지 지키려는 어미 소의 모성애가 생생하게 느껴지는 걸작이다. 그에 따른 전설이 있어 소개한다.

기원전 위난에는 쿤밍을 중심으로 한 세력과 대리를 중심으로 한 세력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중국인이 생각하는 가장 흉한 동물이 "차이랑후바오-늑대, 이리, 호랑이, 표범"이다.

쿤밍을 중심으로 한 선량한 소(牛) 같은 사람과 대리를 중심으로 한 호랑이 같은 흉한 사람과의 전쟁에서 쿤밍사람들이 자식을 보호하기 위해 흉직한 호랑이가 쳐들어오더라도 막아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한다.

 

   
▲ 중국 윈난성 쿤밍의 오래된 미래, 내성의 위치도

 

다른 전설에 따르면 1900년대 윈난에 프랑스가 베트남을 침공하고 윈난을 수탈하기 위해 철도를 놓았는데 이시기에 엄청나게 못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돈 없는 서민들은 오래된 무덤을 파헤쳐서 외국인에게 유물을 팔아넘기는 사례가 많았다고 한다.

어느 날 무덤을 파서 순금의 ‘뉴후통안’을 가지고 집에 왔는데, 그가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다음날 동생이 돈 많은 수집상에게 헐값에 팔아넘겼는데 그마저도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그 후 중간수집상은 비싼 가격으로 프랑스인에게 ‘뉴후통안’을 팔아넘기고는 프랑스로 가는 배에 실었다. 그런데 처음 구입했던 프랑스인도 비참한 모습으로 죽었다고 한다.

몇 달 후 프랑스에 도착한 배에는 전염병이 돌아 많은 선원이 죽고, 살아남은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프랑스에서도 그 유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이유 없이 죽자, 1953년 프랑스정부는 중국 정부에게 공식적으로 ‘뉴후통안’을 반환했다고 한다.

 

   
▲ 윈난성박물관은 청동기 유물의 보고

 

이후 진품은 북경 고궁박물관에 보관되고, 현재 윈난 박물관에는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다. 이 이야기를 알고 있는 윈난 사람들은 고대왕국의 무덤을 파헤쳤기 때문에 발생한 흉한 일이라고 한다.

3층은 두 개의 전시관으로 나뉘는데, 한 곳은 따리의 남조국 유물을 전시하며, 다른 한 곳은 옥과 금으로 만든 중국의 장신구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또한 윈난 소수민족의 생활관처럼 꾸며진 곳으로 제한적인 공개를 하고 있었다.

신비와 풍요로 가득한 '태화궁'과 '앵무춘심'(鹦鹉春深)

쿤밍에서 동북쪽으로 15KM 떨어져 있는 명봉산(鳴鳳山)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는 태화궁내에는 찐띠엔이라는 도교사원이 있다. 찐디엔은 윈난성의 특산물인 구리 약 200톤으로 만들어진 건축물로 비교적 보전이 잘 된 곳이다.

 

   
▲ 태화궁을 이루는 주요 건축물은 일천문(一天門)·이천문(二天門)·삼천문(三天門)...

 

이곳도 도교사원이지만 태화궁(太和宫)이라는 현판이 달린 대문과 성문이 왕궁이었다는 흔적을 내비치고 있다. 더욱이 씬띠에에 있었다는 금빛 용상(왕이 앉는 의자)이 부속건물에 전시되어 있어 이곳이 이궁이나 별궁이었다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다.

찐띠엔은 1602년 명(明)나라 만력제(萬曆帝) 때 윈난의 순무(巡撫) 진용빈(陳用賓)이 팔선(八仙)의 하나인 여동빈(呂洞賓)의 계시를 받고, 후베이성 우당산[武當山] 태화궁 진무전을 모방하여 자금성(紫禁城)과 금전(金殿)을 세웠다고 한다. 현재의 사원은 1671년에 재건되었으며, 구리기와가 특색이라 동와사(銅瓦寺)라고도 불렸다 한다. 햇볕을 받아 반짝이는 모습에서 붙여진 이름이 찐띠엔(금전)이다.

 

   
▲ 태화궁의 씬띠엔(금전), 금빛 용상(왕이 앉는 의자), 부속건물 등으로 보아 궁전.

 

또 다른 설이 있는데 1637년 윈난의 통치자 목씨(沐氏)가 오행설에 따라 찐띠엔의 금(金)이 자신의 성씨인 목(沐)과 상극이라 하여 태화궁을 명봉산에서 계족산으로 이전시켰다. 이후 1671년 청나라 강희제(康熙帝) 때 오삼계(吳三桂)가 진무대제(眞武大帝)에게 자신의 군대를 보호해줄 것을 기원하기 위하여 명봉산에 금전을 새로 축조하여 오늘날에 이른다고 한다.

태화궁을 이루는 주요 건축물은 일천문(一天門)·이천문(二天門)·삼천문(三天門)·자금성·금전·종루(鐘樓)·칠성동기(七星銅旗)등이다.

 

   
▲ 태화궁내 꽃들을 배치되어 아름다움을 더했다

 

매표소 입구에서 터벅터벅 걸어 태화궁 링링문(棂灵门)앞에 섰다. 문의 양쪽 기둥에는 이 지역의 아름다운 풍광을 찬양하는 글과 도가 사상을 새겨 놓은 대련이 있었다. 때마침 태화궁내에는 크고 작은 꽃들을 배치해놓아 고색 찬란한 건축양식과 더불어 무아의 정취를 물씬 풍겼다.

 

   
▲ 태화궁(太和宫) 현판이 달린 성문

오랜 역사와 전통 속에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태화궁 구석구석을 하나하나 카메라에 담기에 바빠 아쉬움이 많았다. 좀 더 본성과 하나 된 시간으로 가장 편안하고 완전한 상태로 찾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태화궁내 자금성을 둘러보았다.

중국에서 현존하는 동전(銅殿) 가운데 가장 크고 웅장하다는 찐띠엔이 중앙에 버티고 있어 이색적이다. 그리 크지도 않으면서 자금성의 중심을 이루는 전각으로 길이 7.8m의 정사각형이며, 높이는 6.7m이다. 겹처마 헐산식(歇山式) 구조로 전체가 구리로 주조된 건물이며, 무게가 약 250t에 달한다. 전당 내의 감실에는 진무대제의 신상이 있다.

찐띠엔 앞에 우뚝 서 있는 높이 9m의 칠성동기는 중국에서 유일한 것으로, 한가운데 누조(鏤彫) 기법의 북두칠성 도안과 '천하태평(天下太平)'의 4글자가 새겨져 있고, 깃대 가장자리에는 '풍조우순 국태민안(風調雨順國泰民安)'의 8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밖에 종루에는 높이 2.1m, 입구둘레 6.7m의 동종(銅鐘)이 있는데 종소리가 50㎞ 떨어진 곳에까지 미친다고 한다. 뇌신전(雷神殿)에는 진무대제가 사용했다는 칠성보검과 오삼계의 동검(銅劍)을 비롯하여 도가의 신상이 전시되어 있었다.

찐띠엔과 태화궁 자금성을 나와 오른편으로 부속건축물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산으로 올랐다. 중간에 연희를 베풀던 연희장과 정상부근의 커다란 종루건물이 인상적이어서 올라가 보았다. 시원스럽게 쿤밍을 향해 펼쳐진 초록의 의미들을 새삼 돌이켜보고 내려올 수 있었다.

 

 

   
▲ 명봉산 정상에서 열린 원예설치전시회, 쿤밍은 아시아의 네덜란드

 

명봉산으로 향하는 제법 커다란 길가에는 갖가지 꽃들과 설치작품들로 이색적인 풍경이 만들어져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었다. 무슨 원예전시회가 열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시회 준비로 손길이 바빠진 사람들에 의해 산중턱이 활기로 넘친다.

동백꽃이 줄줄이 피인 오솔길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는 하염없이 꽃길을 걸어 다시금 태화궁내로 들어왔다. 그때 커다란 식물과 꽃 그리고 고즈넉한 건축물들이 필자의 마음을 빼앗았다. 무릉도원이 따로 없었다. 크고 작은 연못들이 어우러지고 갖가지 돌 획들이 가지런히 자리한 원시림 안에서 오래된 미래를 찾기에 이르렀다.

 

   
▲ 화려하고 웅장한 종루를 숲 속에서 찾았다

 

태화궁을 내려오면서 박물관에서 본 유물들을 형상화한 설치작품들과 꽃들에서 언제나 봄 같은 날씨를 자랑하는 쿤밍(昆明)을 엿볼 수 있었다. “아시아의 네덜란드”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원예 사업이 발달했지만 오랜 기간 지속된 폐쇄적인 경제체제로 인해 단지 중국 내에서만 명성을 날리는 것이 안타까웠다.

쿤밍시내로 발길을 돌리면서 느낀 점은 쿤밍만의 옛스러운 골목길과 고풍스런 목조건물들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대신 빠른 속도로 거리들이 넓혀지고, 빌딩들이 높게 들어서는 이 문명에 대한 우려를 깊이 있게 하게 되었다. 이는 모두가 하나의 그물망으로 연결된 생명체들이기 때문이다.

 

   
▲ 태화궁의 정원, 오래된 건축물과 새로운 건물의 조화를 모색

 

이에 쿤밍은 더 이상 죽어있는 도시문명의 박물관을 많이 만드는 것이 아닌 역사가 살아있는 거리, 최대한 오래된 건축물들이 보존된 상태에서 새로운 건물과의 조화를 모색하는 여유를 찾았으면 하는 것이다.

박물관은 역사를 보여주거나 어떤 면에서는 역사를 만들어내기도 하는 훌륭한 곳이지만 역사적 사실만을 다룰 뿐 현재 상황에서의 ‘지식’이나 ‘문화’는 제외시킨다. 소풍 때나 잠깐 스쳐 지나가는 화려한 조형물들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과거의 찬란한 문화적 명품은 모조리 박물관으로 보내려는 정책보다는 현재 살아있는 자연환경과 갖가지 문화, 다양성을 내포하는 소수민족들에서 미래를 발견하는 영감을 얻게 되기를 바란다. 

 

중국 속, 우리역사·문화 보물찾기

중국 윈난성 쿤밍의 역사·문화를 찾아보던 중 김병호 남방문화연구회장의 기행문을 읽어본 적이 있다. 그는 “1,300년 지나 부활한 잃어버린 우리 문화”라는 이 글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쏟아냈다.

   
▲ 윈난성박물관의 청동기유물, 동으로 만든 관(BC 475~221)의 모습(아래 좌)

“윈난성에서 쏟아져 나오는 구석기·신석기·청동기·철기시대의 유물은 과거 찬란한 고대문화가 꽃폈다는 증거다.”라며 차근차근 이야기를 이어갔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약1,200여 년 전 중국 당(唐)나라 시절 윈난성에는 남소(南紹)왕국이 있었다.”고 하면서 “뜻밖에도 이 남소왕국은 궁벽한 곳에 있었으면서도 당나라와 비견되는 높은 문화와 강한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고구려가 망하면서 산남(지금의 사천성)·농우(청해·섬서·신장 위그르)·강회남(안휘성) 등지로 끌려간 20여만 명의 고구려 포로 중 일부가 중국인들의 학대에 못 이겨 계속 남하해 윈난성에 이른 것으로 추측했다.

그는 “바로 이들 고구려 유민이 이 지방에 살던 원주민들과 힘을 합해 고구려에서 가져온 높은 문화를 정착시켰을 가능성도 있다.”라고 했다.

고구려를 항상 두려워한 당 황실은 부강해지는 고구려 유민들에 대한 견제에 나섰고, 현종이 6만 명의 군사를 보내 토벌에 나섰다고 했는데 당군은 윈난성 대리(大理)에 있는 서이하 강변에서 패퇴해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고 한다.

이때 당군의 대장 이밀도 전군이 몰살당하는 것을 보고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고 하면서 당시 상황이 얼마나 처절했는지를 전했다. 1,200년이 지난 지금도 서이하 강 일대를 파면 당시의 유골들이 곳곳에서 나온다고 한다.

그는 기행을 통해 우리와 유사한 구체적 증거들을 수집했는데 문명의 발상지는 항상 강변에 있다는 확신으로 윈난성 서북쪽 끝자락에 있는 호도협(虎跳峽)으로 달려가 나시(納西)족 처녀들이 사용하는 지게를 발견한 것과 우리네 지게와 똑같은 구조도 확인했다.

지게는 옛날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대표적 문화유산 중 하나로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을 보면 ‘고구려 평원왕의 딸 평강공주가 온달이 느릅나무 껍질을 벗겨지고 오는 것을 보았다’는 내용이 있다고 한다.

또한 옥룡설산(玉龍雪山) 해발 2,700m 부근에서 뜻밖에 두어 채의 귀틀집을 발견했다고 한다. 귀틀집은 산에서 베어온 통나무를 정방형으로 짜 맞추어 벽을 만들고 나무껍질이나 풀로 지붕을 덮은 구조인데 우리나라에는 지리산·태백산맥·개마고원·낭림산맥·울릉도 등지의 산간지방에 남아 있는 가옥 형태라고 한다.

1,700년 전 기록된 ‘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의 변진(弁辰)을 보면 ‘그 나라(우리나라)는 집을 짓는데 나무를 얽어매 마치 감옥과 같이 만든다.’는 기록도 있다고 한다.

   
▲ 윈난성박물관은 청동기 유물의 보고

이와 더불어 려강(麗江)에서 농악놀이 비슷한 나시족의 춤사위을 발견하고는 나시족은 여러 가지로 우리와 닮은 점을 발견했다. 그들의 언어 중에 ‘나’를 ‘냐’라 부르고 ‘너’를 우리와 똑같이 ‘너’라고 부른다고 한다. 또한 나시족 마을의 시장에서 발견한 짚방석과 합죽선 그리고 대소쿠리다.

그리고 윈난성 서부 중심지 대리박물관에서 본 그림에서도 고구려 고분 벽화의 왕이나 귀족들이 입고 있는 도포와 모양이 크게 다르지 않은 점을 발견한 것이다. 머리 모양이 모두 상투를 틀고 있어 우리 조상들의 독특한 풍속임을 느꼈던 것이다.

상투에 대한 기록은 중국 한(漢)나라의 사마천이 지은 ‘사기’(史記) 조선전(朝鮮傳)을 보면 ‘만(滿)은 도망쳐 무리 1,000여 명을 모아 복상투를 하고 오랑캐의 옷을 입은 채 동쪽으로 달아나…’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만’은 고조선을 멸하고 ‘위만조선’을 세운 위만을 뜻한다고 한다.

‘사기’의 내용을 풀이하면 위만이 연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도망해 올 때 우리나라 사람의 머리 모양을 하고 우리 옷을 입었다는 것인데, 사실은 위만이 연나라 사람이 아니고 연나라에 가 있던 우리나라 사람이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한다.

더욱 흥미를 끌었던 것은 대리박물관 진열실 안의 유물들이 우리나라의 것과 모양이 유사한 석기·청동기시대의 것들이 많았다고 한다. 세문동경·쌍어문동경·봉황장식·청동숟가락 그리고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유물인 비파형동검과 비슷한 쌍배형동검과 반달형돌칼이 인상적 이였다고 했다.

반달형돌칼은 세계에서도 우리나라와 중국 동부 및 서북부 일부 지역, 일본 등 아주 제한된 지역에서만 출토된다고 한다. 청동기시대의 독특한 유물로 인도 북부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구멍이 뚫려 있는 돌칼이 출토되지만 반달형이 아니고 장방형의 것이어서 모양새가 조금 다르다했다.

특별히 반달형돌칼은 우리나라 고인돌에서 많이 출토되기 때문에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유물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다. 그는 “그런데 왜 이 반달형돌칼이 우리나라에서 1만 리나 떨어져 있는 멀고 먼 윈난성의 산 속에서 출토되었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이어 도착한 쿤밍(昆明)에서도 천금의 값어치가 있는 우리 민족문화 한 가지를 찾아냈다는 것이다. 그것은 ‘ㄱ’자 낫으로 도로가 옆에서 여인네들이 벼를 베고 있어 발견했다고 한다.

아시아에서 우리나라 것과 모양이 비슷하게 생긴 낫은 오직 일본·운남성·인도네시아의 발리와 수마트라 섬에서만 찾을 수 있다고 한다. 낫은 우리 민족이 사용한 역사가 오래 된 농기구로 고려시대 가요 ‘사모곡’에도 낫이 등장한다고 했다.

그런데 세계 어느 나라에 가도 낫은 있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것과 모양이 유사한 낫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서양의 낫은 날이 아주 크고 반달처럼 휜 갈고리 모양을 하고, 중국 낫은 날이 넓고 자루가 짧으며 동북지방의 낫은 날이 직선이며 자루를 날 끝에 끼우도록 되어 있다고 한다. 베트남의 낫은 반대쪽에 조그만 가지가 달려 있어 그쪽으로 벼나 풀을 베고, 태국과 동남아의 낫은 가늘고 위로 휘었으며 날에는 톱니가 달렸다고 한다.

더욱이 윈난의 오지 초웅(楚雄)에서 만난 이족 사람들의 행색은 낫보다 더욱 충격적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고구려 고분 속 무사처럼 모두 앞머리에 새의 깃을 길게 꽂고 있어 놀랐다고 했다.

세계에는 새의 깃털을 머리에 꽂는 풍속을 지닌 민족이 많다. 아메리카 인디언, 중국의 일부 소수 민족, 또 아프리카의 토인들이 그런 풍속을 지녔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은 짧은 새의 깃털을 머리 뒤에 꽂거나 깃털 모자를 만들어 썼던 것에 반해 긴 새의 깃을 앞머리에 꽂았던 사람들은 고구려 사람들뿐이었다고 했다.

그는 끝으로 잃어버린 우리의 민족사를 보완하기 위해 중국 윈난성에 살고 있는 여러 민족들의 문화에 대한 학계의 전문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지적하면서 시간이 더 흘러 그들이 현대화되어 버리기 전에 그들에게 화석화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우리의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 보완하는 것이 절실하다는 소망을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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