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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첫 증인 마리아미리 보는 교회력 설교/부활주일(20100404)
박성규  |  theos53@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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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년 04월 01일 (목) 20:25:24
최종편집 : 2010년 04월 01일 (목) 21:09:02 [조회수 : 34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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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주일(20100404)
성서일과/ 시 118:1-2, 14-24; 행 10:34-43; 고전 15:19-26; 요 20:1-18(눅 24:1-12)
본문/ 요한복음 20:1-18
부활의 첫 증인 마리아

          (요 20:1-18, 개정) 『[1]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2]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3]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4]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5] 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6]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9]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10] 이에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13]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예수님 곁의 여자들

예수님 곁에는 여자들이 많았습니다.
묘한 것은 마리아라는 이름의 여자가 많았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마리아였습니다.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어 주님의 장사를 준비한 여자도 마리아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끝까지 남았던 것도 마리아라는 이름의 여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 부활의 현장을 확인한 것도 마리아였습니다.

마리아라는 이름의 여자가 많았기에 때로는 어떤 마리아인지 성경조차 분명치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 요한이 전하는 이야기에는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여자가 막달라 마리아 하나지만 다른 성경에는 다른 마리아도 등장을 합니다.
          (마 28:1)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 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자가 요한복음에는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로 나오지만, 누가복음에는 또 다른 여자로 나오는데, 그녀가 곧 막달라 마리아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눅 7:37-38) [37]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막달라 마리아라는 이름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도 큽니다.
다른 마리아들이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처럼 사람의 이름에 연결시켜 나타납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의 막달라는 그의 고향입니다.

삼종지도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여자는 평생 세 사람을 따라야 하는데 어려서는 아버지, 젊어서는 남편, 늙어서는 아들을 따른다는 것이 삼종지도입니다.
옛날에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라고 남자에 따라서 그 운명이 달라지는 것이 여자라는 의식이 강했습니다.
뒤웅박이라는 것이 박을 쪼개지 않고 꼭지만 따서 입구를 좁게 만든 바가집니다.
뒤웅박 팔자라는 것은 좁은 뒤웅박 속에 갇힌 것처럼 자기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그런 신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여자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라는 이름이 대부분 남자의 이름에 딸려 나타나는 것도 그런 의식의 발로입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는 다릅니다.
성경이 남자를 소개할 때는 대체로 그의 출신지를 함께 표기합니다.
예수님이 나사렛 예수라고 불리고, 유다가 가룟 유다라고 불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날랐던 시몬을 구레네 시몬이라고 하는 것 등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그런 경우인데, 막달라는 지명입니다.

이것을 좋게 해석하면 막달라 마리아는 남자에 종속되지 않은, 남자와 대등한 힘을 가진 여자였으리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여자의 이름이 남자의 이름처럼 소개되는 경우는 그 여자가 어느 집안인지를 밝히는 것이 수치스러울 때입니다.
창녀나 죄인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런 여자는 집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누구의 딸이라거나 누구의 누이라는 말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남편이 없을 가능성이 많고, 있어도 누구의 아내라는 사실을 밝힐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성경이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 분명히 말하는 것은 단 한 가지입니다.
전에 일곱 귀신이 들렸던 여자라는 것입니다.
          (막 16:9) (예수께서 안식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일곱 귀신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군대귀신이 강한 귀신을 뜻한다면 일곱 귀신은 어지러운 귀신일 것입니다.
수가성의 우물가에서 예수를 만난 여자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다는 것을 연상케 하지 않습니까?

교회에서는 오랫동안 막달라 마리아가 그런 여자였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간음하다 붙잡혀 돌에 맞아 죽을 번한 그 여자가 막달라 마리아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녀에게 지펴있던 것이 일곱 귀신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마 그것이 맞을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세상의 누구에게도 참된 사랑을 받지 못한 여자였음이 틀림없습니다.
많은 남자가 있었지만 마을을 어지럽히는 귀신이었을 뿐, 누구도 참으로 의지할 수 없었던 여자였던 것입니다.

그런 그녀에게 예수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두 말할 여지가 없습니다.
향유를 발에 붓고 머리털로 그 발을 닦은 것만으로도 예수님이 그녀에게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그의 사랑이고, 그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누구의 딸, 누구의 아내, 누구의 어머니가 아니라 오직 예수께 속한, 예수의 사람 마리아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다 막달라 마리아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 앞에서는 여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의 남편이 되어 예수를 부리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제자들처럼 흩어지는 자가 될 것입니다.
예수를 신랑으로 삼는 사람, 예수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예수께 속한 자, 예수와 함께 있는 자가 되어, 부활의 현장에도 함께 하는 자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예수를 오직 한 남자로 여기는 여자의 삶은 어떤 것일까요?

첫째, 섬기는 삶입니다.

주님은 잡히시기 전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본을 보이심으로 너희도 그렇게 하며 살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여자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갈릴리에서부터 제자들과 함께 주를 따라온 여자들이었습니다.
그 시간, 그 여자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어려운 질문일 것 같아도 대답은 뻔합니다.
여자들은 그 시간, 주님과 제자들의 식탁에서 그리고 부엌에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여자들의 일, 허드레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섬기는 일이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섬긴다는 말이 믾이 등장합니다.
누가복음 12장까지는 여인들이 예수님을 섬기는 일에 이 말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눅 12:37과 17:8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섬김의 도를 가르치면서 그 말을 쓰셨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수종든다라고 되어 있는데 섬긴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이 본을 보이신 그 일을 가리켜 섬김이라고 하셨습니다.
여자들의 섬김은 예수님의 삶이었고, 제자들에게 본을 보이신 섬김의 삶이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섬기는 삶을 배워야 하는 자들이었지만 여자들은 이미 섬기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성경이 말합니다.
          (막 15:40-41) [40]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었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 [41] 이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따르며 섬기던 자들이요 또 이 외에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들도 많이 있었더라

여자들은 예수를 좇았습니다.
남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께 매달리는 아이들처럼 귀찮은 존재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디까지라도 예수를 좇았습니다.
골고다까지....

그리고 섬겼습니다.
제자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누가 높으냐를 두고 다투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자들은 섬기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필요한 것을 공급함으로 섬겼습니다.
식사를 준비하는 것도 그들의 몫이었습니다.
심지어 그 시체에 바를 향품을 준비한 것도 그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섬기는 자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예수님이 본을 보이시며 가르치신 마지막 교훈입니다.
주님이 섬기는 자의 결국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눅 22: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땅에서 섬기는 자가 되어 마지막 날에 주의 상에 함께 앉고, 영광의 보좌에 앉는 자들 다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둘째, 말씀을 사모하여 듣고, 깨달아, 말씀대로 사는 삶이었습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서 세 번이나 당신이 예루살렘에서 겪어야 할 일에 대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못 알아들어서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애써서 부인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말이 그 사정을 잘 전해주고 있습니다.
          (마 16: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항변을 했다고 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어떤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니죠?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자기들의 생각에 걸러서 듣는 자들이었습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고 싶어 하는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결국 모르는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다시 제자들의 그 무지함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9]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그런데 여자들은 어땠습니까?
누가복음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눅 24:7-9) [7]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모든 다른 이에게 알리니

주님의 죽음이라는 너무나 큰 슬픔 그리고 주님의 시체가 사라졌다는 근심과 두려움이 잠시 그들을 덮어, 잊고 있었던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부활하신 사실을 제자들에게 전했던 것입니다.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를 생각해 보십시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끝에 누워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단 한 마디라도 놓칠세라 그녀의 귀는 예수님의 음성에 집중되어 있었고, 그녀의 눈은 오직 예수님의 입술에 머물러 있는 광경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그 모습을 보고 무어라 하셨습니까?
          (눅 10:42) ...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르다라고 못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오라비 나사로가 죽어 예수님이 오셨을 때의 일입니다.
주님이 슬퍼하는 마르다에게 나사로가 다시 살리라고 말씀하시자 마르다가 대답했습니다.
          (요 11: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그러자 주님이 다시 물으셨습니다.
          (요 11:25-26)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마르다는 말씀 그대로 믿었고, 나사로는 다시 살아났습니다.

제자들은 주와 대면하여 주의 말씀을 듣는 자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할 때에는 따로 제자들에게 말씀을 풀어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자들은 어땠을까요?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에서처럼 여자들이 주님 곁에서 말씀을 듣는 것은 주제 넘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대체로 그 시간에 다른 일 곧 섬기는 일을 했습니다.

여자들은 고즈넉이 앉아 오로지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계제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듣기 어려운 중에 들었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했었던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언제, 어떻게 들었는지 알 수 없었어도, 어렵게 들은 말씀을 심비에 새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겨, 사모하는 자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새기는 자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그의 말씀을 기억하고,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자들 다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셋째, 고난의 자리까지 함께 가는 삶이었습니다.

지난 한 주간은 고난 주간이었습니다.
교회는 그 한 주간 동안 예수님이 겪었고, 말씀하신 모든 것들을 각별히 여겨 기념해 왔습니다.
그런데 고난주간에 생긴 일들을 상기해볼 때 한 가지 이상한 일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밑의 여인들을 제외하면 어디서도 여자들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것도 그 이전의 일입니다.
굳이 들추어낸다면 두 렙돈을 헌금하는 여인을 주님이 칭찬하신 일 정도가 고난 주간에 여자가 등장하는 경우일 것입니다.

그러나 상황이 갑자기 변합니다.
주님이 잡히시면서 모든 이야기는 갑자기 여자들을 중심으로 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십자가 곁에 있던 사람들은 여자들이었습니다.
          (요 19: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시신을 수습하는 것을 보고, 그 무덤을 확인한 것도 여자들이었습니다.
          (막 15:47)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 둔 곳을 보더라

안식일이 지나면 예수님의 시신을 향유로 닦아 제대로 장사를 치루기 위함이었습니다.
제일 먼저 무덤을 찾아가서 주님의 부활을 알게 된 것도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수제자 베드로도, 주님이 가장 사랑하셨던 요한도 막달라 마리아가 전하는 소식을 듣고 난 후에야 주님이 무덤을 찾았습니다.

요한복음만이 조금 다르게 전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사랑하시던 제자라 자처하던 요한이 십자가 밑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를 맡아 모시게 되었다고 합니다.
부활의 소식을 여자들에게 전해 듣고 제일 먼저 달려온 것도 요한입니다.

그러나 다른 세 복음서에는 요한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에만 요한이 등장하는 것은 요한이 복음서를 쓰면서 부끄러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이 가장 힘들 때, 그 곁에 제자들이 하나도 없었다는 게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들에게 전해들은 이야기에 자기를 슬쩍 끼워 넣었을 것입니다.
자기가 예수님께 가장 사랑을 받았고, 자기가 예수님을 가장 사랑한 사람이었다고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모든 사정을 종합해 볼 때, 주님이 잡히시던 날 이후부터 부활하시기까지 전해지는 모든 이야기는 여자들로부터 전해진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주님 잡히시기 전까지는 주님 곁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주님이 잡히시자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모습이 어땠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조차 몰랐던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새벽 미명에 여자 홀로 무덤을 찾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요.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은 주님의 나심에서 고난 그리고 죽음과 부활에 이르기까지 예수님 곁에는 여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가장 힘들었던 그 때, 그의 곁을 지켰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를 사랑하는 자가 어디든지 주를 따라 갈 수가 있습니다.
요한이 십자가 밑에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주의 사랑을 받고 그가 주를 사랑하는 자였다는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주를 사랑하는 자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래서 어디든지 주와 함께 가는 자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여자들이 어떻게 이런 삶을 살 수 있었을까요?

그 몸에 주의 은혜를 간직하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를 좇아 예루살렘으로 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차이가 무엇이겠습니까?

제자들은 주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주를 따라 다니며 그의 능력을 본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주린 자들을 먹이시는 현장에 있었습니다.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시는 능력을 보고 놀라워했습니다.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명하여 물러나게 하시는 것을 보고, 놀라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여자들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을 따른 여자들을 한꺼번에 소개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눅 8:2-3) [2]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3]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여자들은 예수님의 그 능력을 자기 몸에 받아들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병을 고치고, 귀신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예수님께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몸으로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의 능력을 바라보면서 그의 제자 됨을 자랑스러워하는 사람들이었다면, 여자들은 예수님의 은혜를 몸에 입고 그 은혜에 감격한 자들이었습니다.

교회가 전하는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였습니다.
그녀는 간음하는 현장에서 붙잡혀 예수님 앞에 내동댕이쳐졌습니다.
좋은 구경거리를 만났다 싶은 사람들이 몰려 와 그녀를 둘러쌌습니다.
마리아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가슴에 파묻고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습니다.
차라리 빨리 돌에 맞아 죽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시험하여 묻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 여자를 돌로 쳐 죽이라 하였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라고 말하겠소?
마리아를 향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예수님께 향했습니다.
예수님은 몸을 굽혀 무엇인가를 땅에 쓰시더니 말했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성경은 그 뒤의 이야기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 8:9-11) [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마리아는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얻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가 얻은 생명은 이전의 생명과는 다른 새로운 생명이었습니다.
죄인들은 그녀를 돌로 쳐 죽이려고 했으나, 죄 없으신 주님은 그의 죄를 묻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은혜는 그의 죄를 씻어 다시 살리신 은혜였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이 십자가에서 주시기 원했던 그 은혜를 그가 살아 계실 때에 받은 자였던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렸던 여자입니다.
많기는 했지만 모두가 헛된 것들, 허망한 것들에 의지하던 여자였다는 뜻입니다.
주님이 그녀를 해방시키셨습니다.
주님이 그녀의 의지할만한 유일한 남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일곱 귀신이 있던 그 자리에 오직 한 분 예수님이 거하게 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마리아가 아닙니까?
우리가 받은 은혜가 마리아가 받은 은혭니다.
죄 없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우리를 깨끗케 하신 은혭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 은혜를 잊지 못 하고 사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세상의 많은 헛된 것들에 의지하지 말고 오직 예수님 한 분을 모시고 사는 자들 다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은혜를 아는 자가 주를 섬길 수 있습니다.
은혜를 아는 자가 주의 말씀을 소중히 여길 수 있습니다.
은혜를 아는 자가 주를 사랑하여 어디든지 따랄 갈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부활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우리가 다 막달라 마리아, 예수의 사람이 되어 이와 같이 할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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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14.37.154.16)
2011-04-29 13:55:36
막달라 마리아가 창년라는 기록이 성경 어디에 있나요 여기 없다고 막달라 마리아를 이렇게 더러운 누명을 씌우면 되겠습니까 말을 바꾸어서 설교하신 분을 창남이라고 하면 되겠나요 안되겠지요 속히 수정하든지 아니면 삭제하든지 그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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