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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음을 품으라미리 보는 교회력 설교/종려주일(20100328)
박성규  |  theos53@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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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년 03월 25일 (목) 08:09:07
최종편집 : 2010년 03월 25일 (목) 12:11:49 [조회수 : 2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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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 수난주간(20100328)
성서일과/ 시 31:9-16; 사 50:4-9; 빌 2:5-11; 마 26:14-27:66
본문/ 빌립보 2: 5-11
이 마음을 품으라

          (빌 2:5-11)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성경에는 특별한 제목이 붙여진 장이 몇 개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 13장을 사랑장이라 하고, 히브리서 11장을 믿음장이라 하는 것이 그 예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특별한 것 중에 하나인데 겸비의 장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하나 되어야 합니다.

바울의 권면은 언제나 성도들이 당면하고 있는 실제 문제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사랑장이라는 이름이 붙은 고린도 전서 13장은 그것만 떼어놓고 보더라도 세상에서는 그 짝을 구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귀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그것을 쓸 때에는,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서로 자기가 가진 은사를 자랑하며, 다툼으로 교회가 시끄럽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가장 좋은 은사는 사랑이라는 것을 가르침으로, 그 다툼을 그치게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사랑이 빠진 은사는 은사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말씀도 그런 배경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땅에 임하신 분이 예수라고 합니다.
그 분의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의 바로 앞인 1-4절에 나타납니다.
          (빌 2:1-4) [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2]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기뻐 칭찬하는 교회였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 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사정과 비슷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하나 되기 위하여 예수의 마음을 품을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사랑을 처방했는데, 빌립보 교회에는 예수의 마음을 처방한 것입니다.

왜 예수의 마음입니까?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이기 때문입니다.
머리가 둘이 아니듯, 예수 아닌 다른 사람이 기준이 되면 하나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쓴 편지에 여러 차례 자기를 본받으라고 말했습니다.
빌립보 교회를 향해서도 그렇게 말합니다.
          (빌 3: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바울이 자기를 본받으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머리여서가 아닙니다.
그 자신이 예수를 본받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고전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본받아야 할 분은 오직 예수님입니다.
          [2]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예수를 본받는 것이 우리 모두가 하나 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바울이 본으로 삼은 예수의 마음을 우리도 본받아,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지키는 자들 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마음이 우선입니다.

바울이 말했습니다.
          (롬 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많은 사람들이 이 순서를 잊어버리고 삽니다.
먼저 그의 부활이 뜻하는 영광스러운 모습을 본받으려 합니다.
아닙니다.
그의 죽으심이 뜻하는 고난을 본받는 것이 먼저입니다.
먼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되지 않고서는 영광에 참여할 길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고난의 시작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심입니다.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그 고난의 정점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입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리고 그 고난의 결국이 하늘과 땅에 충만한 영광입니다.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오늘 바울은 고난당하기 위해 사람이 되신 예수의 마음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본받을 것은 주님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던 일이 아닙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렸던 일도 아닙니다.
풍랑이 이는 바다를 걸으신 일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신 놀라운 일들을 본받으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흉내를 냅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지 않고는 설사 산을 옮긴다 할지라도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닮지 않고, 그의 흉내를 낸다면 그것은 차라리 악한 일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옛날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마술사 시몬입니다.
그는 주님의 제자들이 놀라운 기적을 행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도 마술로 사람들을 놀라게 해 온 터라 제자들이 행하는 기적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그는 세례를 받고 빌립의 뒤를 따라 다니다가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안수하여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이로구나.
시몬이 쾌재를 부르며 제자들에게 돈을 주며 말했습니다.
내게도 그런 권능이 있게 해 주십시오.
그러자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행 8:20-22) [20]...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21]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22]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23]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

그렇습니다.
마음에 품은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의 마음이 없이 예수의 흉내를 내는 것은 차라리 악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먼저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자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 한 후에야 그의 놀라운 권능,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첫째. 낮아지시는 마음입니다.
교만하면 안 된다는 것은 우리가 익히 아는 말입니다.
세상에서도 그렇게 말합니다.
겸손의 덕을 강조하는 말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본받아야 할 예수님의 낮아지심은 우리가 생각하는 겸손과는 그 종류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이 낮아지신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을 정확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어느 봄날 하루살이와 메뚜기가 만나 하루 종일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저녁이 되자 메뚜기가 하루살이에게 “오늘은 그만 놀고 내일 놀자”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루살이가 “내일이 뭐야?” 라고 물었습니다.
메뚜기가 아무리 설명을 해줘도 하루살이는 내일이 무언지 몰랐습니다.
메뚜기는 하루살이의 무지함이 한심스러웠습니다.
이튿날 메뚜기가 하루살이를 찾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밖에 살지를 못한 것입니다.
하루살이 대신 메뚜기가 찾은 친구는 개구리였습니다.
며칠을 재미있게 놀다가 개구리가 메뚜기에게 말했습니다.
“날씨가 추워지니 이제 그만 놀고, 내년 봄에 만나자”
그러자 메뚜기가 “내년 봄이 뭐야?” 라고 물었습니다.
“추운 겨울이 끝난 후 날이 따뜻해지는 때가 내년 봄이야”
메뚜기는 아무리 생각해도 개구리의 말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메뚜기는 머리를 갸웃거리며 생각했습니다.
“이상하네, 하루살이는 왜 내가 아는 내일을 모르고, 나는 왜 개구리가 아는 내년을 모르는 것일까?”

메뚜기는 하루살이에 대하여 교만할 수도 있고, 겸손할 수도 있습니다.
개구리를 만나기 전에는 교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개구리를 알고 난 후에는 하루살이에 대하여 겸손해야 합니다.
자기도 개구리에 대해 하루살이와 같은 꼴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말하는 겸손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인생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들의 자랑은 무언가 다른 것과 비교할 때에 곧 다툴 때에만 유효한 것입니다.
내가 잘난 것은 나보다 못난 사람과 견주어 볼 때입니다.
그러나 나보다 잘난 사람은 어딘가에 반드시 있게 마련입니다.
세상에서 겸손하라고 하는 것은 그런 때를 만나 낭패를 당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떻습니까?
그는 지극히 높으신 분입니다.
지극이라는 말은 끝의 끝이라는 말입니다.
더 이상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보다 높은 자는 어디에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과 더불어 누가 높으냐를 놓고 다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보다 높은 자를 생각하여 겸손하실 필요가 없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겸손해 지셨습니다.
하나님으로서는 겸손할 수 없기에 스스로 사람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낮아져 사람이 되심입니다.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낮아질 수 없으나 낮아지신 마음입니다.
겸손하실 필요가 없는데 겸손해지신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의 마음을 품은 자의 겸손이 이런 것입니다.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는 겸손이 아닙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으로 모두가 하나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둘째는, 같아지는 마음입니다.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기독교에는 두 가지 이단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에비오니즘(ebionism)이고 하나는 도세티즘(docetism)입니다.
둘 다 적당한 우리말이 없어 보통 원어를 그냥 씁니다.

에비오니즘의 에비온은 가난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가치를 가난하게 곧 낮게 보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위대한 예언자나 선생들 가운데 하나 정도로 보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믿지 않는 자들은 대체로 이런 관점에서 예수를 보고 기독교를 비판합니다.

도세티즘의 도세트는 허깨비 환영이라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보기에만 그렇지 실제로 사람이 된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저 사람처럼 보였을 뿐 언제까지나 하나님이셨다는 거죠.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도 실제로 달리신 것이 아니라 허깨비였다는 것입니다.
예수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이단입니다.
현대의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여기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처럼 보이실 뿐 진짜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우리와 같이 되셨습니다.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예수님은 사람의 몸에서 나셨습니다.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기도 하셨고, 슬퍼하기도 하셨습니다.
울기도 하셨고, 시장해 하기도 하셨습니다.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우리와 한결같이....
모든 점에서 우리와 다른 점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단 하나 다른 것은 그는 죄가 없으셨다는 것입니다.

다 같이 되셨는데, 죄는 없으셨다는 말씀은 깊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했는데 이를 연결하면, 죄 없이 죄인으로 죽었다는 말씀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가 우리와 같이 되신 정도가 우리를 대신하는 곳까지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실 수 있을 정도로 같이 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거룩이라는 말의 가장 뚜렷한 뜻은 구별된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것은 그가 사람과는 구별된다, 같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이시지만 사람과 구별됨을 원치 않으시고, 사람과 같이 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사람과는 다른 하나님이 사람과 같아지는 마음입니다.
사람들을 대신하여 죽으실 만큼 같아지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이 병자들과 같은 마음을 가져, 불쌍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실 때, 병을 고치는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이 식구를 잃은 자와 같은 마음이 되어, 슬퍼하셨을 때, 죽은 자가 살아나는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이 죄인의 모습으로 죽으셨을 때, 온 세상의 죄가 사해지는 은혜가 임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의 마음-가난한 자들, 병든 자들, 죄인들, 못난 자들과 나를 구별하려는 마음을 버리고, 그들과 나를 같이 여기는 마음을 품고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남의 일을 내 일처럼 여기는 마음, 죄인들을 대신하려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성도들 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끝으로, 복종하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본시 하나님이시니 예수님의 뜻이 곧 하나님의 뜻이려니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철저히 사람과 같이 되셨기에 그는 하나님과는 달랐습니다.
그가 아버지 뜻에 복종하는 일은 우리가 하나님 뜻에 복종하는 것과 꼭 같이 어렵고 힘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어긋난 길을 가고자 하는 유혹은 그의 안과 밖에 다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시기 전에 사단의 시험을 받았습니다.
사단의 시험을 한 마디로 말하면, 왜 굳이 어려운 길로 가고자 애쓰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쉽게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돌들로 떡이 되게 하라,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라, 내게 절하라 하는 것들이 모두 쉽고 평안한 길로 가라는 유혹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유혹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겼습니다.
‘기록되었으되, 말씀하였느니라’ 말마다 덧붙이신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잡히시기 전날 밤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실 때에는 그의 안에 도사리고 있던 유혹이 꿈틀거렸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잔, 고통의 잔을 마시지 않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 유혹 역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겠다는 마음으로 이겼습니다.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히 순종하신 것입니다.

순종은 믿음의 완성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이삭의 몸에 정말로 칼을 대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창 22:12)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순종은 사랑의 완성이기도 합니다.
갈릴리 해변을 찾으신 주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의 당신을 향한 사랑을 확인하시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요 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내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베드로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주님이 명령하시는 대로 가는 자가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순종은 겸손의 완성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몸은 높이 매달렸으나 그곳은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이었습니다.
매질을 당하고, 조롱을 받으며, 모욕을 받았습니다.
몸 속의 피와 물이 다 쏟아져 내리는 고통이 따랐습니다.
너무 큰 아픔 때문에 ‘아버지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외치기도 하셨으나, 숨을 거두실 때에는 그 아버지께 당신의 영혼을 맡기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종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땅과 후손의 복을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진정한 주님의 수제자가 되어 영광스러운 순교의 길을 갔습니다.
예수님이 복종하심으로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크고 위대한 경륜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연약한 인생이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복종하며 사는 일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에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했습니다.
오로지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리라 다짐하며,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서, 세상의 염려와 육체의 소욕을 꺾고, 하나님께 복종하는 자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이 높여 주십니다.

스스로 낮아지시고, 사람과 같이 되셔서, 아버지의 뜻대로 그들을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님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낮아지셨으나 높여 주셨습니다.
          [9]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복종하셨으나 복종케 하셨습니다.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같이 되셨으나 구별되게 하셨습니다.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11} ...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살아서, 그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거룩한 무리들 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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