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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없다!! 없다!! 없다!! (1)예수의 가르침을 찾아서- 겨자씨6(창조신은 어떻게 탄생했는가?)
한성영  |  h6808@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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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년 03월 21일 (일) 12:21:11
최종편집 : 2010년 03월 21일 (일) 16:09:08 [조회수 : 7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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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관찰과 검증을 통한 객관적인 지식을 추구한다는 과학자들 중에도 이 세상을 만들고 작동케하는 제일 원인자로서 신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스캇펙같은 사람들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리처드 도킨스같은 과학자는 신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맞는 말이긴 하지만 도킨스는 이에 대해 정밀하고 명쾌한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대는 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이 말하듯이 천지를 창조한 절대자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이 세상을 설계했거나 존재케하는 궁극적인 원인자라고 생각하는가? 그대는 아마 “누군가가 만들지 않고는 이렇게 훌륭하게 돌아가는 세상이나 인간이 어떻게 우연히 생겨났겠는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대에게 이렇게 질문해보자 “이 세상을 창조한 신은 누가 창조했는가?”

크리스챤 그대들이 흔하게 말하듯이 성경에 나와 있는데로 “I am Who I am."인가? ‘신은 존재 그 자체이지 누가 만들지 않았다.’ 이말인가? 그렇다면 자연과 그대는 왜 존재 그 자체이면 안되는가? 신을 존재 그 자체라고 설명하듯이 자연과 그대 자신도 어떤 원인성 없는 존재 자체라고 설명하면 왜 안되느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인간과 자연을 신이 설계하거나 만들었다는 가정과 해석을 할 수 있다면, 신또한 누군가가 설계하고 만들었다는 가정과 해석을 똑같이 할 수 있다. 이 대목에서 그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러면 둘 다 가능성이 있으니 신이 인간이 만든 개념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잘못’이라고 말이다. ‘아직 확실하게 밝혀지지않았으니 신이 이 세상을 만들었다고 믿는 것도 정당하다고’ 말이다.

좋다. 그대가 신이 이 세상을 만들었다고 믿던, 믿지않던 그것은 그대의 자유이다. 그러나 그 믿음을 제발 남에게 억지로 강요하고 그 믿음을 가지고 남을 협박하며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지는 마라. 그리고 선교라는 이름으로 세를 확장하려는 종교업자들의 농간에 놀아나지 말았으면 한다. 제발 부탁이다. 자 그리고 우리 한번 이 신의 창조에 대해서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보자.

크리스챤 그대는 그대가 믿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든 것이 틀림없다고 확신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만들다’라는 말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자. ‘만들다’하면 아마 그대는 ‘일련의 행위프로세스’를 상상할 것이다. 누군가 또는 어떤 실체가 있는 대상이 일정한 동작과 과정을 거쳐 일정한 형태가 있는 ‘다른 대상’을 가시적으로 출현시키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대여, 우리 잘 생각해보자. 그래 그대는 아주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지금부터 나의 설명을 신중하게 듣기 바란다.

그대가 만일 그대 집 앞에 있는 큰 오동나무를 잘라서 잘 다듬은 다음 그것으로 보기 좋은 책상을 만들었다 치자. 그런데 환경운동가인 그대 친구가 찾아와서 오동나무가 잘려져 책상이 되어 있는 것을 보고 그대에게 “이런 나쁜 친구, 오동나무를 살해했군!!”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오동나무로 책상을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대 친구는 오동나무를 살해했다고 생각하고 있단 말이다. 그러면 책상이 만들어진 것인가? 아니면 오동나무가 살해당한 것인가? 그대의 친구에게는 그대가 만들었다는 책상은 오동나무의 시체로 여겨졌다.

같은 동작과 과정에 대해서 그대와 그대 친구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감이 잡히는가? ‘만드다’라는 행위는 ‘만든다’라는 언어가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존재하지않던 것이다.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면서 일정한 행위패턴에 대해 ‘만든다’라는 언어범주를 부여한 것 뿐이다. 그리고 그 언어 범주를 영리하고 탄력있게 사용해 나간 것이다. ‘바람이 파도를 만들고 있군.’ 또는 ‘구름이 엄마 얼굴을 만들었어요’ 하는 것처럼 말이다. 바람은 파도를 만들었는가? 아니면 구름은 정말로 엄마얼굴을 만들 수 있는가? 이것은 인간이 일정한 범주의 행위프로세스를 언어로 규정한 것을 자연에게 확대 적용하여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만든다’라는 언어가 없다면 어떤 행위프로세스도 만드는 행위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인간들은 미련하게도 이 일정한 행위프로세스를 규정하기 위한 인위적인 ‘만든다’라는 언어를 자연과 인간 자신에게도 적용시켰다. 일정한 행위프로세스를 ‘만든다’라고 정의 해놓고 자신들이 어떤 대상들을 만들 수 있으니 자연과 인간 자신도 누군가가 만들었다고 투사시킨 것이다. 바보스럽게도 말이다. 그리고 나서 그 만든 자를 ‘신’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그대여 잘 생각해보라 그대가 ‘만든다’라는 규정을 하지 않으면 그대의 어떤 행위도 ‘만든다’가 되지 않으며 신도 그 어떤 것을 만들 수 없으며 신조차도 존재할 수 없게 된다. 그대가 일정한 범주의 정의를 만들어 내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만들어 지지 않는 것이다. 그대가 그 모든 것을 만들어 낸 것이다. 아니 ‘만든다’라는 언어를 인간이 사용하게 되면서 모든 것이 만들어 지는 대상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알겠는가?

생각해보라. 인간은 성대와 발성 조음기관, 호흡등으로 이루어진 소리에 의해 추상적인 상징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 상징은 단지 인간이 소통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물론 동물들도 그들만의 소통의 언어가 있다. 코끼리는 인간들이 들을 수 없는 초음파로 대화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추상적인 상징들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약속일 뿐이다. 이런 행위를 ‘만든다’ 또는 ‘창조한다’라고 정의하자는 약속일 뿐이지 약속에 의한 정의가 없다면 만드는 것도 창조도 없다. 또한 약속에 의한 정의가 바뀌면 ‘만든다’, ‘창조한다’의 의미도 바뀌게 되어 있다. 이것은 바로 언어가 시대와 지역과 사회와 상황에 따라 의미가 확장되기도 하고, 바뀌기도하고 사멸하기도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만든다’, ‘창조한다’라는 추상적 표현은 딱히 정해진 의미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이 ‘만든다’, ‘창조한다’라는 상징적 표현양식을 스스로 만들어 놓고 이 표현양식에 세상을 끼어 맞추려다보니 자신이 어떤 대상을 만들 수 있으므로 인간 자신과 자연을 누군가가 만들었다고 추론한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말이다. 그리고 그 창조자로서 ‘신’이라는 추상적 상징을 만들어 냈다.

그런데 이 신은 아주 강력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신을 통해 인간은 스스로의 결속력을 다질 수도 있고 사회를 규율할 수도 있고 극단적으로 고통스러운 순간이나 상황도 극복해 갈 수 있었고 자신들이 저지른 사악한 행위들에 면죄부를 줄 수도 있었고 대중을 움직이는 선동술이 될 수도 있었다.

인간은 뇌가 발달한 후에 전두엽등에서 판단, 예측, 비교등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뇌가 특정한 사건이나 상황을 위험한 것으로 간주하면 인간은 공포나 불안을 느끼게 된다. 그것이 아주 극단적으로 심해지면 인간은 뇌의 해석을 통해 절망에 빠지기도하고 희망을 잃고 자살도 하게된다. ‘전지 전능한 신’은 인간의 이러한 공포나 불안을 효과적으로 제어해주는 심리적 방어기제가 된다. ‘전지전능한 신’에 대한 신념이 인간의 뇌가 느끼는 공포나 불안을 제거하거나 억제해주는 좋은 플라세보역할을 하는 것이다.

공포나 불안이라는 것도 인간이 개체자신을 보호하기위해 만든 심리기제이다. 개체의 존재를 위험하게 하는 상황에서 개체에 자극을 주어 그것을 회피하게 하는 역할이 공포나 불안이다. 불안이나 공포가 심해져 오히려 개체의 존재를 위협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자 인간이 그 대안으로 만든 기제가 절대의존감정인 ‘전능한 신’이다. 그리고 사막지역의 열악한 환경에 살던 유대인들에게는 이러한 ‘절대적 유일신’에 대한 강력한 믿음은 집단을 통제하고 시련과 난관을 극복하게 해주며 위험에 맞서 용감하게 대처도록 하는 효과적인 심리적 장치로서 작용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에 양면성이 있듯이 ‘절대적 신념’은 근본주의적이며 파쇼적이 되기도 하여 전쟁을 일으키고 타인을 공격하고 학대하는 명분을 주기도 한다. ‘신의 명령’이라고 하면 인간 자신들은 그 모든 죄책감과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마치 어떤 나쁜 행위에 대해 책임져야할 대상이 많아지면 심리적인 부담감이 훨씬 줄어드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면 이 신에 대한 믿음은 인간문화속에서 사라질것인가? 인간이 개체로 살아가면서 불안을 느끼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해소시켜줄 대안을 찾지 못하는 한 신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심리적 방어기제는 충분한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사이비먹사들이 숱한 비리를 저질러도 온갖 특혜를 누리며 장수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을 믿고 따르는 신자들에게 이 ‘전능한 하나님’은 충분한 실용적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다수의 인간들이 깨어나 깨달은 인간이 보편적이 될 때까지 ‘신’이라는 작업가설은 인간에게 필수불가결한 심리 방어씨스템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효과적인 심리방어씨스템은 그 강력함 때문에 오히려 영악한 자들이 잘못이용하면 인간을 억압하고 착취하며 이용하는 수단으로서 쉽게 변질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곳 한국에서 그 폐해를 심각하게 겪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경제규모가 세계 15위권을 드나들고 선진국가들의 클럽이라는 OECD가입국가인 한국에서 이런 플라쎄보적인 기독교신앙이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맹위를 떨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불운한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

퇴락을 가속하고 있던 조선말기 탐관오리들과 세도가들이 자신들만의 카르텔을 형성해서 흥청망청 나라를 말아먹으며 세계사의 조류를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권력의 중심부에 위치하며 국가의 정책과 흥망성쇠에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는 자들이 개혁과 개방을 부르짖는 외침에 눈과 귀를 막고 “이대로!!, 이대로!!”를 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서구의 제국주의가 전개되는 모델을 제대로 학습했던 일본은 조선을 집어 삼켰고 이 틈을 비집고 서구에서는 그 명운이 기울던 근본주의 기독교가 들어와 연착륙을 하게 되었다.

기독교학자들 중에는 기독교가 들어와서 한반도에 서구의 민주주의, 합리주의 등 근대적 모델이 이식될 수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가 한반도에 많은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하는데 말도 않되는 소리이다. 서구는 이미 근대화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근본주의 기독교세력이 아니라 다른 서구세력이 들어왔더라도 문화교차현상 때문에 근대적 서구문화는 한반도에 이식되었을 것이다. 다만 근본주의 기독교가 한반도의 특수하고 혼란한 상황속에서 그 위치를 선점할 수 있었던 것이며 오히려 근본주의기독교가 아니었다면 서구가 진통을 겪으며 벗어났던 미신적 오류들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폐해는 오늘날까지 심각할 정도로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제 그 명운도 다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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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mail-x (112.164.230.132)
2010-03-29 01:47:08
박창진 목사가 배워야 할 몇 가지.
.

박창진 목사에게 내 충고 하나 하는데...

도끼가 인터넷 상에 글을 쓰기 위해서-수준 높은 글 안 쓴다. 아니 못 쓴다-기울인 노력을 말해주리다.

1. 국어사전을 옆에 둔다.
2. <우리말 나들이> <국어가 밥 먹여준다> <한국어가 있다> 등의 우리말에 대한 올바른 쓰임새를 가르쳐 주는 책들을 공부한다.
3. <한글 맞춤법 교본> 같은 책을 수시로 참고한다.
4. <논리야 놀자> <논리 이야기> 등의 몇 가지 논리학 서적을 탐독한다.
5. 수학의 영역에 속하는 논리학을 공부한다.

이렇게 공부하고 책을 읽어도 때로 틀리게 쓰는 경우도 있고 맞춤법이나 띄워 쓰기를 잘못 할 때도 있소.

정치 경제 역사 문화 문학 등의 다른 학문은 제외하고 신학과 철학 관련해서 읽은 서적이 아마 300~400권 될 거요. 책값만 해도 엄청나지.

최근에는 김영사에서 출판되는 지식인 마을 시리즈를 읽고 있소. 인터넷 검색 해 보시오.
신학 관련해서는 최근에는 거의 책을 읽지 않았고, 다만 뉴스엔조이 등에서 추천하는 책들만 사서 읽고 있소. 전에 비해서는 거의 안 읽는다고 봐야지. 예전에는 보수신학이든 자유신학이든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읽었지만 2년 전 부터는 거의 ‘한국기독교연구소’에서 나온 책들만 읽고 있소.

머리가 나빠서인지 이렇게 책을 읽어도 다른 사람이 쓴 글을 가끔 놓칠 때도 있고 이해를 금방 못 할 때도 있소.

도끼는 글을 쓰는 직업은 아니고 책을 읽어야 하는 직업이라, 글을 뭐 별로 그다지 수준 있는 글을 쓰지 못하오. 물론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고.

하지만 적어도 남의 글 보면 ‘아, 이 사람 참 대단한 사람이다’ 혹은 ‘이 자식 또라이네’ 라고 판단할 정도는 되오.

연암 박지원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학문이 깊은 선비에게는 당연하게 여겨질 일도 게으른 선비나 무지렁이 농부에게는 희한하고 해괴한 일로 여겨진다’ 쉽게 말해서 ‘무식한 놈은 이해 못 한다’ 이런 뜻이오.

간혹 글 읽다보면 ‘아, 참 내가 모르는 것이 많구나’ 라고 느끼게 되오. 그래서 사람은 알기 위해서라도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는 것 같소. 그런 점에서 보면 당신은 지적으로 너무 게으른 사람이오. 사실 이 표현은 아주 정중한 표현인데 쉽게 말하면 ‘너 진짜 무식한 색희다’란 뜻이오. 당신은 야훼 찬양하면서 기쁨을 느낄지 모르지만 학문의 참다운 기쁨을 모르는 사람이오.

글의 명확성을 볼 때 도올 선생이나 미선이 선생 같은 경우는 글을 보면 상당히 명확하오. 물론 그 글에 대한 반론이나 인정에 대한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일단 논거가 명확하고 논리가 정연하오.

그러므로 내가 무엇을 이해 못 하는지 어떤 것을 알고 싶어하는지 기준이 명확하게 생기게 되오. 하지만 당신의 글은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소. 인터넷 상에 대고 방언을 하는 것이라고 할까?

생각해보시오. 여기 댓글 다는 자 중에서 당신보다 지적으로 모자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소. 흔히 요즘 말로 ‘스펙’ 공개하면 당신은 명함도 못 내민다 이 말이오. 이런 사람들이 당신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지 않소? 박목사 당신보다 이성, 지성, 합리성, 과학적 사고, 논리 등 모든 면에서 우월한 사람들이 도무지 당신의 글을 이해하지 못 하고 있소. 그것도 한 둘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면 당신 스스로 ‘아, 내가 뭔가 전달력이 부족하구나’ 라든지 ‘내가 글 쓰는 형식이나 내용이 명확하지 않구나’ 라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 아니겠소? 하지만 당신은 도무지 당신의 문제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소.

당신은 이런 문제를 기도와 은혜로 극복하고자 하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그걸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오.

나 같으면 창피해서라도 이런 곳에서 글 못 쓰오.
그리고 글 쓰는 작업은 정말 쉬운 작업이 아니오. 온 신경과 마음을 다 쏟아도 다 표현하지 못할 때가 많소. 고승덕 변호사(개인적으로는 싫어하오. 개독이라서)도 처음에 글 쓸 때는 엄청 고생했다고 하오. A4지 한 장 분량으로 쓰는데 12시간이 넘게 걸렸다고 했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엄청 노력했다고 하오. 이런 천재들도 이토록 노력하는데 당신은 도대체 뭐가 잘나서 그토록 게으른 것이오?

나 같은 사람도 헬라어, 히브리어 강의 들으면서 기초를 공부했었소. 지금은 거의 까먹어서 잊어버렸지만.

미선이 선생이 당신과 토론하겠다고 해서-박 목사가 원하면- 내가 쓸데없는 짓이라고 말렸는데 그 이유가 아래 ‘목사’라는 닉을 쓰는 분의 지적처럼 툴(Tool)의 문제요.
당신은 토론이라는 영역에서 공히 함께 공유해야 할 공통적인 ‘툴’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방언으로 쏟아낼 뿐이오. 그러면서 그것을 논리라고 정말 생각하는 것 같소. 다른 이들이 볼 때는 아무런 가치 없는 그저 음향에 가까운 소리일 뿐인데...

당신이 가진 가장 큰 문제는 당신은 문서사역을 통해서 그저 전하려고만 하지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되오. 그리고 불행이도 여기는 당신보다 수준 낮은 사람은 아무도 없소. 쉽게 말해 당신이 주일이나 새벽에 강대상 올라가서 지 조때로 ‘씨부리는’ 것을 듣고 있는 그 대상과 수준이 다르다 이 말이오. 초등학생이 대학생들을 상대로 무엇인가를 가르치겠다 혹은 전하겠다고 라고 생각한 그 자체가 사실 ‘웃기는 발상이다’ 이 말이오.

내가 전에 글을 적은 적이 있는데 뉴조에서 적었나 모르겠네. 신을 믿지 않는 내가 가끔 신의 존재를 믿고 싶어질 때가 있소.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유가 바로 개독들 때문이오.
나는 개독들이 자연히 발생했다고 도무지 믿기가 어렵소. 어머니 자연에서 이러한 쓰레기들이 자연히 발생했다고 믿기가 힘드오. 야훼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런 암세포들이 생겨날 수 있었겠소?

박창진 목사를 비롯한 개독들의 행태를 보고 있으면 나의 무신론이 마구 흔들리고 ‘정말 개독들 주장처럼 야훼가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오. 개독의 존재를 ‘야훼의 작품이다’ 라고 생각하면 쉽게 이해되지만 ‘어머니 자연으로부터 나왔다’ 라고 믿기에는 너무 잔혹한 일이기 때문이오.


바리새인은 똑똑하나 위선적인 사람이었소만 당신은 무식하면서 어리석으니 차라리 바리새인이 더 나을 듯 싶소. 당신은 위선자는 아니라고 생각하오. 왜냐하면 당신은 위선을 할 만큼 머리가 좋지 못하기 때문이오.

박창진 목사.
당신은 아직 젊소.
배울 수 있는 시간과 여력이 충분하오.
선지식을 구하시오.
적어도 야훼와 예수의 가르침을 전하고 개독경의 가르침을 문서로 사역하려 한다면 뭘 제대로 알아야 할 것 아니오?

박창진 목사.
당신들의 두목 야훼는 너희 개독의 행실을 인해 야훼에게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가르쳤소.
그렇다면 당신이 무식한 것도 야훼의 영광을 훼손하는 것이오. 나는 야훼가 참으로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하오. 야훼는 항상 무식한자, 고집불통인 자, 폭력적인 자, 독선적인 자, 어리석은 자를 들어 쓰시기 때문이오.

그리고 개독들 틈만 나면 ‘C.S 루이스’ 예를 자주 드는데 루이스 책들 제대로 읽어봤소? 진짜 한심한 글이오. 내가 본 책 중에 그나마 가장 나은 책이 동화책이오. 나머지는 다 쓰레기지. 그런 책들을 가지고 제대로 읽어 본 적도 없으면서 마치 루이스가 지성적인 사람인양 표현하고 있지 않소?


박목사.
무식한 것은 나쁜 것을 넘어서 죄악이오.
당신은 그 죄 한가지로도 천국으로 갈 수 없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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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 (180.229.63.143)
2017-04-11 23:06:39
네 '띄워 쓰기'에서 거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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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84.101.163.247)
2010-03-28 10:36:55
창진님,
'저의 사고와 경험에서는 하나님은 실존이랍니다.'

창진님, 님이 댓글로 쓰신 말씀중에 이 문장이 뭘 말씀하시는지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바르게 말씀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존재 하십니다...라고 말씀하셔야지..
하나님은 실존이랍니다...라고 말씀하시면 옳은 표현이 아니지요...
실존이란 '사람이 스스로 자각하며 살아가는 것을 '실존한다' 라고 표현하며 실존이라는 단어는 인간에게만 붙이는 단어이지요...살아가는 자각의 존재는 인간이니까요..

'하나님은 존재한다'....라고 표현을 하시든지.... '하나님은 실제로 존재한다'...라고 말씀하시든지 말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하나님은 실제로 존재한다' 라는 말씀을 축약하여 '하나님은 실존이랍니다' 라고 표현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런식의 님의 표현들이 상대방과 소통을 어렵게 하는 것중에 하나가 되기도 하지요.
무슨 말씀을 하시려하는지를 이해해서 생각을 해야 하니까 말입니다.

또 믿에 님의 댓글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더군요.
'증명은 옳고 그름의 사실 관계가 명확하게 밝혀지는 것을 뜻합니다.'

이 말을 생각해 보십시다.
증명은 증명이고 ...옳고 그름의 문제는 가치의 문제 입니다. 무슨말씀인지 이해하시는지
증명은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것 (누구에게 이해되는 문제)이고
옳고 그름의 문제는 각자가 생각하는 가치의 문제로 조금씩 다를수 있고 심지어는 옳다 그르다라는 생각은 각자 전혀 반대 일 수도 있는 각자 또는 집단,,또는 시대와 문화 등등에 따라 다른관점으로 옳다 그르다 라고 할수 있는 것이지요..

결국 신앙과 신학의 문제에 있어서도
신학적으로 우리가 서로 논쟁하며 토론하는 것인데
신학적 논쟁이 가능할수 있는 것은 신앙이 아닌 공통 분모의 신학적언어,개념 (합의된,, 통용된 개념의 바탕위에서 논쟁을 하고 방향을 도출하는 문제이지요) 이 믿바탕이 되야 그 다음에 그 단어들로 토론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창진님께서 정말로 인격모독적인 욕을 들으시는 이유는
창진님의 신앙적 고집이나 자신의 신앙의 언어로 신학적 토론에 끼어들어
자신의 신앙을 강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학적 사유의 언어로 소통하지 못하는 이유인데
심하게 말씀드리면 신학적 사유언어의 공통적인 소통의 개념을 파악하지 않고 계시기 때문에 대화가 되지 않는다고 저는 생각이 됩니다.

책을 좀 더 읽으시고,,, 최소한 대화자가 읽은 책정도는 읽고 대화를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책읽는 것 자체가 악에 빠지는 것으로 생각하시진 않으시겠지요?
마치 현대신학 ,자유신학이 악이다 라는 식으로 말씀하시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마치 양복입는 것은 악이다... 자동차 타는 것은 악이다...라는 말과 비슷한 말이기 때문이지요...

물론 양복입는 것이나.자동차 타는것이 악이냐 아니냐 라는 토론이 필요할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이스마엘 액스님과 독자3님, 형희님 등등의 님에 대한 규정을 깊이 새겨보아야 할것 입니다.

그래서 인문학 책을 읽으시어 개념정리를 하실필요가 있다고 전에 말씀드린 것입니다.
또 신앙에 사유의 개념에 대해 잘 말씀하고 계시는 '정진홍' 종교학 교수님의 책을 권해 드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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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mail-x (112.164.230.132)
2010-03-28 01:39:46
박창진 목사에 대해 평가가 몇 가지 있는데...
.

내가 볼 때는 박창진 목사는 그저 저능아일 뿐이다.
혹시 박창진 목사 개인 한 사람에 대한 모욕이나 평가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런 것은 아니다.
박창진 목사는 전형적인 개독이므로 대표적으로 지칭을 한 것이다.

박창진 목사는 전형적인 개독이다.
이 정의에는 몇 가지 뜻이 들어있다.

1. 저능아
2. 자폐아
3. 난독증
4. 사이코패스


이 네 가지 성향은 개독이라면 반드시 갖추고 있는 악덕으로, 그 어떤 개독도 이러한
성향에서 벗어나 있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내가 아무리 살펴봐도 박창진 목사는 저러한 성향을 다 가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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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희 (116.126.30.173)
2010-03-27 20:34:28
박창진님은 논쟁과 다툼 댓글을 쓰는 것으로
자기 만족을 느끼는 사람이라고 보여 집니다..

말도 안되는 궤변을 늘어 놓는 것에 대해 누군가가 열심히 댓글을 달아주고 반론을 하는 것을 쾌락적 느낌으로 받아 들이기에 아무데나 아무하고나 시비를 걸고 넘어지는 것으로 보여 집니다.

이런 사람이 교회목사라는 것이야 말로 하느님을 망령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제가 지금 또 박창진님에게 자기 만족 할 수 있는 일이 벌어지게 만들어 준것 같군요,

무의미한 논쟁을 하지 말라고 한 성경의 가르침은 진정 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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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3 (122.44.97.59)
2010-03-27 17:43:08
난 박창진씨랑 댓글 섞는 사람들이 더 대단해보인다
전형적인 개독먹사인데...논리도 없이 그저 자기얘기만...

성의있는 댓글들 꾸준히 달아주시는 분들 보면 참 인내심이 대단하신 분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쭉 봐온 바에 의하면, 박창진씨는 예수님이 다시 오셔도 설득할 수 없는 종류의 사람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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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진 (183.103.29.11)
2010-03-27 14:04:40
여전히 못벗어나네요.
수메르 문화가 대단하고 수메르 신화가 대단한 것이 되지는 않습니다. 구분을 할 줄 알게 되기를 바라고요. 밥돌이 밥순이가 필요해서 인간을 만들고 그 인간들이 피곤하게 하니 홍수로 쓸어버린다는 내용이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는 것일까요? 님에게는 이런 내용이 대단하게 생각되는 줄 모르겠지만 제게는 조악하기 그지 없답니다.

제게 언제 수메르 문화를 말하였나요? 웬 엉뚱한 소리요... 제발 핀트 좀 맞추시기를.

고고학이라는 이름으로 이집트 탈출과 가나안 정착에 대해 엉뚱한 소리하는 것, 그 내용을 잘 알고 있답니다. 그런 내용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 내용이 엉터리라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랍니다.

복음서 기록자의 윤색... 누가 윤색이라고 결정하는데요? 님이. 님과 같은 입장을 가진 학자들이. 복음서가 원본이 없으니 윤색이라고요? 그런 기준은 누가 무슨 권위로 만들었답니까? 어떤 근거로. 하여간 자유주의 신학에 입각한 현대신학이 만들어내는 결과를 어떻게 책임지려는지...

도를 전하는 것에 대해서도 왜곡된 이해를 가지고 있네요. 이슬람교가 그들의 도를 전하지요. 이슬람교도들에게만 전합니까? 불교도 그들의 도를 전하지요. 불교도에게만 전한답니까? 모든 종교는 자신들의 입장에서 수용하고 있는 도를 전합니다. 기독교만이 아니라. 그것은 하등의 문제가 아니에요. 잘못된 것이 아니랍니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 수긍이 되고 수용이 되면 그 도를 말하는 종교인이 되는 것이고요. 수용이 안되면 거부하는 것이지요. 자신만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을 왜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인지. 신은 없다, 그것은 님의 관점일 뿐이에요. 님과 같이 생각하는 이들이 수용할 수 있는 것이고요. 즉 모든 사람이 수용할 내용이 아니란 말입니다. 수용할 만한 내용이 못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님은 계속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면서 "내가 옳다"고 우기고 있잖아요? 곧 님의 입장에서 도를 상대방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이라고요? 남이 하면 강요이고 자신이 하면 강요가 아니라는 그 착각에서 어서 벗어나시기를.

신이란 무엇인가를 증명하였다? 신이란 사람이 만들어낸 존재이라는 것을 증명하였다고요? 신이란 없고 모든 만물은 저절로 생겼고 님은 어떤 저등생물에서 진화하여 생긴 한 생물의 후예이고 언젠가는 더 고등한 생물이 나타나서는 님의 자손을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요? 말 장난 좀 하고서는 증명이라니... 증명이 그런 것이라면 얼마나 쉽겠습니까?

존재 자체의 불분명은 님의 관점이라니까요? 왜 이 말을 못알아들을까나... 내게는 너무나 분명하다는데 왜 자기 관점으로 아니라고 우길까요? 하기사 자신 안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니 어쩔 수 없긴 하겠지만. 님의 사고나 경험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랍니다. 그냥 님의 것일 뿐이에요. 그게 님의 논리의 기본이면서 왜 자신의 사고나 경험에 대해서는 예외라고 주장하는지 모르겠네요. 저의 사고와 경험에서는 하나님은 실존이랍니다. 이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 사고를 가지고 있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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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명 (203.152.168.139)
2010-03-27 12:50:26
박창진님, 답글입니다.
박창진님 성의 있는 답글 감사합니다. 긴 글 쓰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자, 저도 님의 글에 성의 있게 답해보겠습니다.

님께서는 동정녀탄생이나 부활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다른 종교와 신화에 대해서는 조잡하며 설화로 취급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씀하고 계시군요. 그러나 이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지도, 논증을 하시지도 못하고 계십니다. 창진님, 창진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면 신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이나 종교학자들의 큰 비웃음을 사실 수 있습니다. 여러 지역과 나라들의 신화나 종교는 님께서 그렇게 단순히 취급할 수 있을 것이 아닙니다. 신화에는 선조들의 심오한 정신의 원형과 울림이 담겨 있습니다. 조셉 켐벨이나, 미르치아 엘리아데의 책을 읽어보세요. 우리나라의 신화에 대해서도 연구한 서적들도 꽤 있습니다.

그리고 수메르문명과 신화는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수메르 문명은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모든 문명이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교육제도, 정치제도, 정부, 법, 의학, 농업, 철학, 윤리학, 신학, 신화, 구원, 부활, 문학, 문자, 도서관 등등 수많은 것들이 수메르에서 시작되었고 그것은 수준이 높은 것이었습니다. 토라와 탈무드를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의 문화와는 비교가 안 되는 것입니다. 유대는 그저 부침이 심한 근동의 작은 나라였고. 문화라는 것도 조잡한 것이었으며 정치규모도 작은 부족국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는 다윗왕조나 솔로몬 왕조가 규모가 큰 것처럼 묘사되어 있지만 학자들은 실은 아주 작은 부족국가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역사가들 조차도 이제는 타나크를 역사적 사실로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의 타나크또한 구전되던 것들을 후대에 필요에 의해 수집해서 모은 것들이며 상당히 덧칠을 입힌 것들입니다. 또한 하스몬 왕조는 여기에다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으로 상당한 조작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님께서 기독교인들의 성서만이 야훼 하나님이 그들에게 직접 계시해준 것이고 다른 나라와 지역의 신화와 경전의 내용들은 창작한 것들이라고 치부하면서 무시하신다면 큰 잘못을 저지르고 계신 겁니다. 이것은 님의 잘못이라기보다 님에게 신학을 가르친 교수들의 잘못입니다. 님에게 제대로 성경형성사에 대해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님이 잘못된 정보와 신앙을 가지시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수메르나 메소포타미아, 바빌론신화들은 조잡한 것이 아닙니다. 상당히 스케일 있고 심오합니다. 그리고 후대에 이 신화들을 유대랍비들이 잘 편집, 정리, 계승, 발전시킨 것이지요. 이런 점은 그들의 노력이 가상한 것이지요. 이것은 신 학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출애굽기나 홍해사건은 그 역사적 근거도 거의 없고 모세가 히브리민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했다는 보도는 상당히 윤색된 창작이라는 것이 주류사가들의 주장입니다. 출애굽사건이나 홍해사건이 불분명한 것인데 어떻게 그것을 다른 신화이야기와 차별되게 사실로서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이런 정황들로 미루어 보아 창진님께서는 정확한 자료와 근거를 바탕으로 글을 전개하시는 것이 아니라 님의 짧은 지식을 바탕으로 한 추론을 하시기 때문에 이와 같은 억지주장을 하시게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님께서 참고로 하시는 서적들이 어떤 것인지 모르겠으나 좀 더 폭 넓은 서적들로 안목을 넓히셨으면 합니다. 그래야 좀 더 중립적인 시각에서 성경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신화들에는 계시하고 일을 행하는 뚜렷한 대상이 없지만 문자주의 기독교인들의 성경에는 야훼하나님이라는 뚜렷한 대상이 언급되어 있다. 그러니 문자주의 기독교의 경전이 바른 것이다.”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 같은데요. 이것도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왜 다른 경전에는 야훼하나님과 같은 대상이 나오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어떤 근거로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는 모르겠으나 수메르 신화에도 신들의 집합소인 만신전이 있고요. 그 신들의 우두머리도 있습니다. 하늘의 신 안, 대기의 신 엔릴, 물의 신 엔키, 모성의 여신 님후르사그 대개 만신전의 최고신은 엔릴이었지만 한 때 만신전 최고의 신은 안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네 명의 신이 만신전의 주요인물들이고 신들은 소리로서 세상을 창조합니다. 그리고 만신전은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움직입니다. 이처럼 오히려 수메르 신화는 독재적인 야훼신화보다 더 합리적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님께서 우습게보시는 단군신화에도 단군의 할아버지격인 환인이 천상세계의 주신으로 분명하게 나옵니다. 다른 오시리스 디오니소스 신화들의 신인들의 동정녀 탄생, 십자가 죽음 ,부활을 허구라고 치부하시면서 오직 예수사건이라고 주장하시는 근거가 너무나 희박합니다. 님의 이런 글을 읽고 누가 설득을 당하겠습니까?

그리고 말입니다. 노아에 대해서 예수가 언급하고 있으니 노아의 방주사건은 실재한 것이다라는 주장은 너무나 터무니없는 것입니다. 님은 신학적인 배경지식이 너무 부족하신 것 같습니다. 예수의 어록을 담고 있는 사복음서는 전부 원본이 아니고 사본입니다. 그리고 상이한 내용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사복음서의 유사한 내용들을 중심으로 Q복음서라는 것을 만들지요. 그러니까 상이한 내용이 많은 것은 원래 기존의 어록중심의 복음서에 윤색이 첨가되면서 마가복음이 만들어졌고 마태, 누가, 요한 순서로 만들어졌다는 것이지요. 물론 이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약간의 견해차이가 있지요. 그러나 원래 어록 복음서에 신화적인 윤색이 되어지는 과정을 학자들은 면밀히 추적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교도 신화들 간의 유사성도 발견했고요. 예수의 이적이나 기사에 관한 내용들은 분명 후대에 첨가되어진 것이 맞다는 결론을 학자들은 내렸습니다. 그리고 예수가 종말에 대해 언급한 부분들도 후대에 첨가되어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창진님은 복음서를 읽으실 때 이런 부분들을 염두에 두시고 읽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가 노아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복음서기록자의 윤색입니다. 또한 설사 예수가 직접 이 말을 했다손 치더라도 구약의 토대위에서 사고하는 사람들을 위해 필요에 의해 노아의 이야기를 차용하여 비유로서 말한 것이지 노아방주사건을 역사적 사실로서 받아들여 언급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필요에 의한 차용은 다른 종교경전들에도 나옵니다.

부처님의 설법이나 중국조사들의 설법들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부처의 초인적인 능력이나 조사들의 예지력등을 부각 시키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이것은 후대에 제자들이나 기록자들이 자신들의 부족한 안목으로 스승들의 말씀을 기록하다보니 오역해서 기록한 부분도 있고 후대 사람들이 귀중한 스승들의 말씀을 하찮게 무시해버리는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경전에 권위를 부여하는 경전 기술상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경전기술의 방식은 후대 복음서들이 기록되어질 때에도 그대로 적용된 것입니다. 그리고 창진님은 이런 부분을 염두에 두시고 성경을 읽으셔야 제대로 독해하실 수 있지 예수가 노아를 언급한 것을 보니 노아방주사건은 실제 사건이다. 라는 추론을 하시는 것은 경전에 대한 안목이 부족한 것입니다. 중국조사들의 어록에도 조사들이 마치 후대 일을 예언해서 말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것은 후대 제자들이 윤색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분명히 복음서에도 나타난다고 학자들의 연구가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이적들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또는 사람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행하신 일들입니다. 그분은 그러한 일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그러므로 그러한 일들이 역사에서 실제로 발생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려면 최소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그분이 그런 일을 행하실 수 없다는 것을 먼저 증명하여야 합니다. 그것은 없이 현대인의 사고에 맞지 않기에, 과학이라는 잣대에 부합되지 않기에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비합리적인 지성일 뿐입니다.>

이 부분은 님께서 억지를 부리고 계신 것 같습니다. 창진님, 창진님 집에 금송아지가 있다고 남에게 주장하고 그것을 담보로 남에게 돈을 빌리려면 누가 금송아지가 있는지를 증명해야 합니까? 이런 주장을 하면서 돈을 빌리는 자입니까? 아니면 이 주장을 듣거나 돈을 빌려주는 자가 금송아지의 존재를 증명해야 합니까? 당연히 창진님께서 금송아지의 존재를 증명해야하는 것이 맞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것을 증명하지도 못하면서 자신들만 그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를 믿으라고 타인에게 주장하며 전도하는 것이 비합리적인 지성이 아닐까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문자주의 기독교인들이 주장하는 성경의 기록이 역사에서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은 타당한 고고학적 연구와 사료조사를 통해서 나온 합리적인 결론이지 억지를 부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창진님처럼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고 계시해주었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라고 주장한다면 “안상홍은 하나님이다. 그것은 안상홍하나님이 직접 나에게 계시해 주었다.”라고 말하거나 “증산 강일순 하나님은 천지시공을 마치시고 나중에 후천개벽을 열기위해 오실 것이다. 이것은 증산도와 대순진리교의 경전인 도전에 증산상제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기록이 나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사실로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라고 주장하는 것과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안 그런가요?

<신의 부재를 증명했다고 생각하시는군요.놀랍게도 말입니다.증명이 무슨 뜻인지는 아시지요?사실 관계를 명백하게 밝히는 것입니다.천동설을 말하던 시대에 지동설을 말하고 그 이후에 증명하여 더 이상 태양이 지구가 도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해진 것과 같이요.님이 신 부재를 증명하였다면 신 존재를 받아들이는 이들은 모두 제 정신이 아닌 사람들이지요.지금의 시점에서 천동설이 옳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으니 말입니다.증명되었는데, 그 증명과 다른 소리를 하는 것은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지요.그렇다면 과연 그럴까요?님에 의해 신부재가 증명되었는데, 저나 저와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비정상이어서 신 존재를 말하는 것일까요?그렇다고 생각하는 님의 그 사고의 대담함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글을 조금만 생각하고 읽으면 제 글이 신 부재를 증명했다고 생각하는 님의 생각이 잘못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음을 알 텐데요. 참 안타깝네요.님의 근거는 언어와 그 규정이었습니다. 전적으로 개인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그런데 그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언어의 사회성만 생각하면 아주 쉽게 알 수 있는.제가 'G 세대'를 예를 들어서 친절하게 설명을 드렸지요.그런데도 님은 님의 글의 문제점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시고 계시네요.이미 설명하였는데도 계속 설명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고요.위의 글로 신 부재를 증명하였다고 생각하는 그 사고에 경의를 표합니다.이 글의 뜻 정도도 이해하지 못하는 수준은 아니시기를 바랍니다.>

창진님, 저는 신의 부재를 증명한 것이 아니라 신이란 무엇인가? 증명한 것입니다. 제 글을 잘 읽어 보시면 신이란 인간의 정의이고 그 정의는 누구나 자유로이 할 수 있으니 누구나 자기가 정의한 신을 믿고 신앙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누구도 자신의 신만을 절대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님께서는 제 글에 대한 독해를 잘 못하고 계세요. 정말 제대로 알고 싶으시다면 한 번 만납시다. 내 님에게 자세히 설명해 줄 테니 말이지요. 글로 쓰려고 하니 이거 감질나고 시간도 많이 걸려서 말이지요.
님께서 언어의 사회성을 말한 부분에 대해서도 충분히 말씀을 드렸는데 제 글은 읽으시고 그것에 대해서 반론은 못하시고 님의 주장을 계속 동어 반복만 하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님께서 말씀하신 G세대의 예를 제가 어떻게 설명했는지 한 번 읽어보세요. 언어는 구성원들의 약속이니 사회성이 있지만 그 약속도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고 분명한 예를 들어서 설명드리고 있는데도 님은 계속해서 님의 주장만을 그 누구처럼 동어반복하고 있지 않습니까?

제발 제 글을 잘 읽으시고 검토하신다음 글을 써 주셨으면 합니다. 부탁 드립니다.

자, 그리고 제가 언어에 대한 설명한 글은 이해하기가 그리 쉽지 않지요? 예, 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이것은 원래 아주 단순하면서도 쉬운 것인데도 인간 스스로 가지고 있는 관념의 틀 때문에 이해하기가 쉽지 않고 깊이 사고해 보아야 합니다. 그런 이에 대해서도 제가 님에게 충분히 설명을 드렸는데도 나의 설명에 대한 언급과 반론은 제기하지 못하시고서 님의 말씀만 동어반복하고 계십니다. 제가 창진님에게 설명을 드렸지요?

인간이 어떤 대상을 관찰하고 무엇을 관찰했습니다. 그와 같은 현상은 분명이 있었지요. 제가 없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현상들에 의미와 형식을 부여하는 것은 인간의 언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언어는 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사회적인 것으로 약속이지요, 이에 대해서도 이미 제가 님에게 말씀을 드렸구요. 그리고 약속이라는 것을 물론 많은 다수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이 당연한 거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같은 언어에 대해 다른 의미와 형식을 부여한다고 해서 그것이 전적으로 잘못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다수의 사람들과 소통을 하는데 지장이 있겠지만 말입니다. 소통을 할 수 없다 고해서 한 가지 대상과 그 대상을 가리키는 언어에 대해 다른 의미와 형식을 부여 한다고 해서 절대적인 잘못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다수가 실용적인 면에서 소통의 불능의 잘못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니 신이라는 대상에 대해서도 사회적인 다수가 정의한 대상과 신만이 바른 신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을 각자가 나름대로 얼마든지 의미와 형식을 부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이 말이 이해 가십니까? 좀 어려우시더라도 이해해 보시려고 노력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래야 님은 이 단계를 뛰어 넘어 더 큰 단계로 도약하실 수 있습니다.

자 그리고 님의 마지막 멘트에 대해서 좀 언급하겠습니다. 창진님께서는 신의 존재는 증명이 불가능하다. 그러니 이것은 선택의 문제이다 그러시면서 문자주의 기독교가 말하는 야훼하나님을 선택하지 않는 것이 안타까우시다고 말합니다.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면 증명 불가대상으로 취급해야지 어째서 그것을 신앙하는 선택을 합니까? 님께서는 아직 실효성이 증명되지 않은 약품이 있다면 어떻게 하십니까? “이것은 선택의 문제다. 그러니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아직 실효성이 증명되지 않은 약품을 선택하지 않는 사람들이 안타깝다.”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나요? 아니지요? 그러니 님의 논리가 얼마나 허술합니까?

그러시면서 님께서 내리시는 결론은 이것입니다.

<결국 최종적으로 남는 것은 교회가 이미 주어진 복음을 바르게 깨닫고 그 복음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신 존재가 증명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길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그리고 그 여정에서 위의 글과 같은 주장에 현혹되는 이들이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교회가 주어진 복음을 바르게 깨닫고 복음에 따라 사는 것이다. 유일 절 대신을 바탕으로 신앙하시는 창진님께서 믿으시는 야훼 하나님이 존재자체도 불분명한데 어떻게 그가 계시해주었다는 복음을 믿을 수 있으며 그에 따라 살려고 하는 결단을 하실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이것은 아직 약효가 증명되지 않은 약이 있지만 약을 믿고 그냥 복용하고 약이 어떤 효능을 주던 간에 그에 따라 살겠다고 하는 것과 뭐가 다른 겁니까? 약효가 증명되지 않았지만 먹고 살던지 죽던지 일단 먹어보자, 물론 그 약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을 경우이고 병이 죽을 수밖에 없는 심각한 경우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다른 대안의 약들이 많고 또 약효를 증명해주는 많은 증거들을 가지고 있는 약들이 있는데도 그 약만을 고집한다면 문제가 심각한 것이지요. 즉 다시 말해서 인간이 고안해낸 종교 중에 야훼신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을 경우라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지 모르나 엄연히 다른 수준 높은 종교들과 진리들이 있는 데도 증명도 불확실한 유일 절대신을 신앙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짓입니까> 그러시면 서 창진님께서는 저와 같은 주장들에 현혹되지 말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당부하고 계시니 이 얼마나 무책임한 행동입니까?

창진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님께서 올려주신 장문의 글은 감사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제가 보기에는 님께서 제 글을 면밀히 일고 검토하시지 않고 글을 쓰시는 것 같아 그것이 너무 아쉽습니다. 다음에 글을 쓰실 때에는 제 글을 자세히 읽고 그에 대해서 조목조목 짚어 가면서 반론을 펼쳐 주셨으면 합니다.

그럼. 오늘 하루도 진리 안에서 평안하시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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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mail-x (112.164.230.132)
2010-03-27 12:25:11
강대상 올라가서 니 맘대로 하시니까 세상 사람들이 다 박목사 같은 수준으로 보이죠?^^
.
자기 관점을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은 소통에서 열려 있고 상대방은 닫혀 있다네요. 그것 참.
전지전능의 신 개념의 고전 유신론이 합리적 소통이 불가하다는 근거는요?
이에 대한 답은 '합리적 소통'이라는 단어의 개념이 먼저 일치되어야 하겠지요.
님이 말하는 합리적 소통의 개념이 무엇인데요?

자신도 한선영님에게 비판하는 바로 그 모습 그대로인데, 자신은 아니라고 우기고 있네요.
전지전능한 신 이해는 합리적 소통이 불가하다는 자기 관점이 절대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잖아요?
그 주장 자체도 상대적이라는 것을 알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다는 것은 저의 입장이고 님은 아니라는 입장일 뿐이지
아니라는 님의 입장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랍니다.
제발 좀 소통이 되면 좋겠네요. 말로만 소통 소통하지 말고요.



.

---> '나도 멍청하지만 너도 멍청하다' 이런 주장인데...

당신만 멍청한거요.

내 고신 출신 목사들을 가장 많이 아는데(첫 교회 먹사도 고신 출신)
이것들 진짜 무식하오.

고신 출신만 그렇겠소?
감신 놈들은 더한 놈들이지.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고함지르고 싸움박질 하고 서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고
상대편 비난하고 저주하는 것 말고 뭐 있소?

박 목사는 상대가 자신과 같이 무식하다는 그 근거없는 믿음을 버리란 말이오.
당신만 무식한거요.

난 개독들이 소통 소통 이러면 진짜 웃기더라.
박 목사 당신만 봐도 결코 개독들은 소통할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알 수 있소.

괜히 엄한 인간들하고 소통한다고 질할 하지말고 저 위에 있는 야훼와 소통하시오.
그 놈은 당신과 소통이 될 거라 확신하오.


.


뱀발 : 그리고 개독 니네들 제발 '소통' '소통' 그러지 마라~!
마치 강간범들이 여자들에게 '사랑' '사랑' 하고 외치는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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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진 (183.103.29.11)
2010-03-27 10:43:55
자기 관점을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은 소통에서 열려 있고 상대방은 닫혀 있다네요. 그것 참.
전지전능의 신 개념의 고전 유신론이 합리적 소통이 불가하다는 근거는요?
이에 대한 답은 '합리적 소통'이라는 단어의 개념이 먼저 일치되어야 하겠지요.
님이 말하는 합리적 소통의 개념이 무엇인데요?

자신도 한선영님에게 비판하는 바로 그 모습 그대로인데, 자신은 아니라고 우기고 있네요.
전지전능한 신 이해는 합리적 소통이 불가하다는 자기 관점이 절대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잖아요?
그 주장 자체도 상대적이라는 것을 알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다는 것은 저의 입장이고 님은 아니라는 입장일 뿐이지
아니라는 님의 입장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랍니다.
제발 좀 소통이 되면 좋겠네요. 말로만 소통 소통하지 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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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선이 (180.227.149.6)
2010-03-27 10:11:52
전 별로 재미 없는걸요.
박창진님과의 얘긴 어차피 위의 한성영님 글의 논점에선 다소 벗어나니 길게 얘기 안하겠습니다. 박창진님도 환영하신다고 했으니 차라리 따로 얘기나눴으면 하는군요. 앞서 말했듯이 박창진님과 저의 차이 역시 합리적 소통의 가능성을 아예 차단하는 것과 저로선 열어놓는 것의 차이에 있는 것이랍니다. 박창진님이 말하는 전지전능의 신 개념의 고전 유신론은 합리적 소통이 불가하지만, 제가 말하는 새로운 유신론 개념은 전지전능한 신 개념을 포기하고 다른 이해로 봄으로서 어느 정도 합리적 소통이 가능한 신 이해라는 것입니다.
어쨌든 저로선 위의 한성영님 글의 논점에서 벗어나니 이런 얘길 따로 했으면 했건만,
신 논증에 대해선 아예 철학책을 권해드리지요.
데이빗 그리핀의 <과정유신론>(이문출판사), 그리고 호진스키의
<화이트헤드철학풀어읽기>제7장 부분 읽어보시면 상세하게 나옵니다.(그런데 지난번에도 그랬듯이 책을 읽어보진 않을 듯 싶음ㅋ)
현실적 존재만이 근거가 될 수 있다는 경험론의 원리를 유지하면서 논증된 것이랍니다.
제가 말하는 새로운 유신론에 대한 모든 언급들은 바로 이 부분에 기초되어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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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진 (115.41.59.127)
2010-03-27 08:35:20
재미는 있네요
자신의 글의 문제점은 보지 않고서 아니 못하고서 그 글로 인해 파생한 문제점 제기는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태도가요?
"저는 애초부터 신 존재를 완전하게 증명하겠다고 말한 적도 없습니다. 이를 구분못해서 자꾸만 딴소릴하시면 곤란하지요. ok?"
ok.

"도데체 이해가 안되는 것은 증명이라는 방식을 통하지 않으면 무조건 믿어라가 된다고 하는 그 사고이지요." 이 말은 ok? 답이 무엇인지 궁금하네요.

신 존재를 완전하게 증명하겠다고 한 적이 없다고 한 것에 대해서는 오케이이에요. 님이 말하는 오류를 통한 최선의 논증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지지하지요. 저도 신존재에 대해 어느 정도 개연성있는 설명이 가능하다는 입장이고요. 제가 루이스의 옳고 그름의 법칙을 언급한 것도 그러한 이유이지요.

그런데 님이 지금은 오류를 통한 최선의 논증이라는 표현을 하였지만 그 이전에는 그런 표현이 없었고 동시에 증명할 수 없다는 말을 무조건 믿어라와 등식으로 연결하여서 말하였지요. 이것도 엉뚱한 식으로 걸고 넘어지는 것이라고 하려나...
제 글 어디에 논증을 반대한다고 한 적이 있던가요? "그러한가"를 계속 언급하였는데, 그것이 논증이 아니고 무엇일까요?
저는 증명을 반대한다고 했거든요. 증명이라는 말의 사전적인 의미 정도는 알고 있지요? 님은 증명할 수 있다고 했고요. 증명은 옳고 그름의 사실 관계가 명확하게 밝혀지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도 아니라고 할려나...
어떤 단어를 사용할 때에는 그 단어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의미가 담겨지는 것이랍니다. 이것도 엉뚱한 소리라고 하려나... 그 단어의 의미와 다른 의미로 사용하려면, 피치 못하여서 그 단어를 사용하여야 한다면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하고요. 그런데 그런 설명이 없이 단어를 사용하고서는 그 단어의 일반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것에 대해서 잘못되었다, 엉뚱한 소리를 한다라고 하면 뭘 어쩌자는 것일까요? 소통의 기본이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말이잖아요?

'그런 신은 없다 하지만 신은 있다(3)'의 내용에 대해서는 오류를 통한 최선의 논증에서 오류를 지적한 것입니다. "물질의 창발에서 어떻게 인격적인 존재가 나오느냐." 님의 글에 그에 대한 설명이 있었습니까? 반박의 내용이 여럿이었는데, 한 문장 잡고 늘어지면서 다른 반박의 내용에 대해서는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았지요. 그게 무슨 최선의 논증입니까? 그러고서는 "괜한 사람 엉뚱한 식으로 먼저 걸고 넘어지지만 않았으면 한다"라니요? 저라면 부끄러워서라도 그런 소리 못하겠는데요.

그래도 재미는 있네요. 얼마든지 응대해 준다... 저 또한 절대적으로 환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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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선이 (180.227.149.6)
2010-03-27 00:23:10
Ismail-x님의 얘기엔 공감합니다.
해악만 낳는 보수 기독교 타파라는 지상 과제 앞에선 어쩌면 연합 전선이나 혹은 유연한 전략들이 필요할 때도 있을테니까요. 앞서 말했듯이 적어도 한성영님에 대한 건 기독교 자체에 대한 논쟁은 아니기에..

그리고 박창진님과의 토론은 토론이라기보다 그냥 이분이 저의 주장들을 종종 왜곡하는 측면에 대한 방어로서 언급할 따름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박창진님 같은 분이 누구를 언급함 없이 그저 저 혼자 계속 글을 올리는 것은 얼마든지 반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역설적인 의미로 따지면 그렇게 하시는 걸 내심 원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현재로선 제가 볼 땐 이곳 당당에서조차 박창진님의 글은 유달리 공감받지 못하는 걸로 보입니다. 아마도 이 분의 글이 스스로 자초하는 면도 있다고 보여지는데, 그렇다면 제가 굳이 나서서 먼저 이 분에 대해 비판적으로 공격할 이유도 없지요.

단순히 제가 박창진님한테 원하는 건 딱 하나, 당당에서 쓰고 싶은 글이랑 주장이랑 맘껏 하시는 건 좋습니다만, 부디 괜한 사람 엉뚱한 식으로 먼저 걸고 넘어지지만 않았으면 한다는 거죠. 단지 저의 소박한 바램 하나, 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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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mail-x (112.164.230.132)
2010-03-27 00:07:09
그리고 이것은 내가 미선이 선생 광팬으로서 드리는 고언인데...
.

P.S-근데 이런 얘긴 애초 위의 한성영님글의 논점과는 약간 벗어나는 것이니
정작 계속 쟁토하고 싶다면 언제 따로 했으면 하는군요. 얼마든지 응대해드리지요.


---> 미선인 선생님. 당신은 절대로 박창진 목사와의 토론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물론 토론의 목적이 꼭 누구를 승복시키거나 이기려는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토론이 되려면 기본 툴(tool)이 같아야 합니다.
다르지 않습니까?

내가 항상 하는 이야기지만 정상과 비정상이 다투면 정상이 이길 수 없고
논리와 비논리가 다투면 논리가 이길 수 없습니다.

박창진 목사는 그 자체로 완벽한 비논리거든요-물론 박목사 뿐만 아니라 모든 개독이
다 이렇지만-


시간낭비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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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mail-x (112.164.230.132)
2010-03-26 23:59:21
내가 궁금한 것 한 가지 더...
..
1+1=2조차도 백퍼센트 증명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모르시나요?

.

미선이 선생이 한 저 말을 과연 박창진 목사가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까?

진짜 궁금하다...

진짜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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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mail-x (112.164.230.132)
2010-03-26 23:26:18
내 생각에는...
.

그렇기에 이곳 기독교 언론인 당당에서 볼 땐 한성영님 같은 분은 매우 이채롭게 보일 수 있기에(물론 제겐 진부할 뿐이지만), 다소 신선하게 느껴질 지도 모르겠군요. 그런 점에서 저로서도 좀더 자유로워 보이는 한성영님의 입장을 좋아하시는 분들의 맥락도 충분히 공감이 된답니다. 아마도 평소에 보수 기독교를 혐오하거나 비판하는 입장에 서 있는 분이라면, 오히려 박창진님을 비판하고 한성영님을 지지함으로써 보수 기독교의 나쁜 점들을 비판하려는 전략일테죠.

---> 박창진 목사를 보면 어거스틴과 켐피스가 생각납니다. 루터도 그렇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증명하느니 믿음을 행사하겠다고 했지요. 즉, 야훼가 있다는 어떤 증거도 없이 그냥 믿겠다는 겁니다. <참회록>이나 <그리스도를 본받아>에서도 결국 그런 이야기를 할 뿐이지요. 문서사역 한다고 글 쓸데없이 길게 쓰기는 하지만 결국 자신은 믿는 것이고 다른 사람은 믿지 않는 것이라고 할 뿐입니다. 어거스틴과 켐피스의 고백과 똑같죠. 터툴리안도 물론 마찬가지입니다. ‘말이 안 되니까 믿는다’ 이거죠. 어거스틴도 루터도 켐피스도 실패한 일을 박창진 목사가 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참 그저 웃기는 일이지요. 나는 그냥 믿겠다 하면 되지 무슨 거기에 신학이 필요하고 거창한 논리가 필요합니까? 그것도 철저한 엉터리 논리 말입니다.

---> 결국 신학은 철저한 허상을 바탕에 둔 학문입니다. 아무것도 알 수 없고 간단한 것 하나 증명할 수 없는 허깨비 학문이죠.

---> 미선이 선생 말마따나 한성영 선생의 글이 유별난 것은 아닙니다. 이런 정도의 글은 다른 사이트에 특히 안티 사이트나 무신론자 사이트에 수도 없이 올라와 있는 글이고, 도올선생 강의 잘 들어보면 언어와 언어에 대한 이해에 대한 문제들을 아주 자세하고 집중적으로 언급하는 곳이 많습니다. 도올 선생님은 이런 강의를 좋아하시죠. 문제는 다양한 학문과 그 입장을 이해할 만큼 개독들이 깊은 수준을 갖지 못했다는 것입니다.-자유주의 신학자 제외-그리고, 한성영 선생의 글은 어리석은 개독들에게 뭔가 주의를 환기시키는 역할로서의 글로서 좋은 재료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개독들이 한성영 선생의 글을 이해하고 그 문제점이나 반론을 깊이 있게 접근하지는 못하더라도 또 다른 어떤 개독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증명불가하니 무조건 믿을 수밖에 없다며 소통이 불허되는 지점을 낳고 있는 보수 기독교나 모든 언어와 개념들을 허상으로 치부하면서 정작 자신이 쓰는 개념과 언어 소통성은 예외로서 불허되고 있다는 점에서 박창진님이나 한성영님은 그다지 서로 다르지 않은 공통점도 있답니다. 즉, 소통의 맥락에서 볼 때 이러한 사유 패턴의 형식 자체는 둘 다 파쇼적이라는 점입니다. 이는 기독교근본주의자가 이슬람근본주의자들이 서로 싸우듯이 기독교 근본주의자와 언어 초탈의 마음교 근본주의자가 서로 싸우는 것과 같은 맥락인 거죠.

---> 뭐 그럴 수 있겠군요. 실은 도끼는 한성영씨의 글은 깊이 있게 읽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글이 수준이 낮다거나 흥미가 없어서가 아니라, 굳이 반론을 해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일단 무조건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는 미선이 선생이 보는 눈이 정확합니다. 같은 이유로 미선이 선생의 글이나 책의 내용에 대해서도 이해가 잘 안 되거나 이러한 것은 좀 내 생각과 다르다 라고 느낀 것이 있지만 굳이 그걸 따지거나 반론을 가져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보수기독교 개독의 반대편에 서 있는 자들은 내 동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나를 동지로 생각하건 안 하건 그건 상관없습니다. 순전히 내 기준이니까.

---> 박창진 목사가 내게 미선이 선생과 한성영 선생의 논쟁에서 누구 편을 들던 사람이 이제는 또 누구 편을 든다고 비난했는데 나는 전혀 불편함을 못 느끼고 있습니다. 미선이 선생과 한성영 선생의 논쟁은 내게는 사실 아무런 흥밋거리도 관심거리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 아, 그리고 박창진 목사. 신의 존재 증명 어쩌고 저쩌고 하는 거 다 필요 없수다. 무신론자나 안티들이 신의 부존재에 대해서 밝힐 이유가 없으니까. 제우스가 존재하느냐 하지 않느냐로 서로 다투는 것과 똑같소. 개독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부정한다고 존재하는 제우스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오. 그 분은 실재시며 무소부재하고 전지전능하신 분이니까.

---> 개인적으로 박창진 목사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오. 실은 박목사 같은 사람은 개신교인 치고 좋은 사람에 속하오. 대개는 인간 쓰레기들이니까. 특히 목사들. 하지만 당당뉴스 같은 곳에 박목사의 글이 실리고 기록이 남는 것이 다행이라고 항상 생각하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볼 때 개독들의 사고 방식, 수준, 지식 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이오. 그러므로 개독들이 정말로 무식하고 어리석은지 잘 보여주는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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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선이 (180.227.149.6)
2010-03-26 23:21:12
박창진님의 딴소리..
제가 언제 증명해야 믿겠다고 했던가요?
사람들이 믿게 되는 거야 물려받게 되는 환경적 요인이 더 클테지요.
님이 불교문화권에서 태어났으면 불교를 자연스럽게 보게 되듯이 말이죠.

거듭 말하지만 박창진님과 저의 차이 역시
소통가능성을 아예 차단하는 것과 저로선 열어놓는 것의 차이일뿐이랍니다.
닫아놓은 채로 선포하는 한, 파쇼적인 거란 얘기구요.
세상에는 백퍼센트는 증명이란 것도 없답니다. 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를 아신다면야..
1+1=2조차도 백퍼센트 증명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모르시나요?

하지만 역설적으로 단지 합리주의에 대한 신념 없이는 타자와의 소통 자체가 진정 불가하다는 것이구요. 제가 볼 땐 그 점에서 한성영님이나 박창진님이나 매한가지로 보일 따름이죠. 실상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가 말해주는 것도 온전한 증명으로서의 논증을 말한 게 아니라 적어도 그때까지의 오류를 통한 최선의 논증만이 있을 뿐이지요. 이는 절대적 증명으로서의 논증과는 구분된답니다. 저는 애초부터 신 존재를 완전하게 증명하겠다고 말한 적도 없습니다. 이를 구분못해서 자꾸만 딴소릴하시면 곤란하지요. ok?

P.S-근데 이런 얘긴 애초 위의 한성영님글의 논점과는 약간 벗어나는 것이니
정작 계속 쟁토하고 싶다면 언제 따로 했으면 하는군요. 얼마든지 응대해드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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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진 (115.41.59.127)
2010-03-26 22:43:04
오해하진 마시길
제가 정강길님을 언급한 것은 정강길님의 주장 전체를 담아서 말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다만 아래 글에서 설명한 그 부분에 있어서 한선영님이 들어야 한다는 입장이지요.

제가 아래 글과 관련하여서 하고 싶은 말은 믿음에 대한 오해에서 벗어나시라는 것입니다.
복음이 들려지고 성령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열어 복음을 청종하게 하시는 역사를 행함으로 복음이 수용되어집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은혜로 말미암는 거듭남이고 사람 편에서는 은혜 안에서 믿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믿음이라는 것이 증명불가니 무조건 믿으라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무조건'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이성을 포함한 전존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그분을 주님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성을 포함한 전존재가.
성경은 교회가 가져야 할 모습으로 "그러한가?"라는 태도를 말씀하고 있지요.
무조건이 아니라 이성의 활동과 함께 당사자가 수용할 만하여서 믿음이 가능한 것이랍니다.
정통적인 신학에서는 증명이라는 방식은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것뿐이지요.

도데체 이해가 안되는 것은 증명이라는 방식을 통하지 않으면 무조건 믿어라가 된다고 하는 그 사고이지요.

믿지 않는 사람에게 처음 복음을 말할 때에 누가 그 복음에서 이야기되는 신을 증명하여서 사람으로 하여금 믿게 한다는 것일까요?
정강길님은 그렇게 해서 믿게 되었습니까?
언제부터 믿었는지 모르겠는데, 증명이 이루어지고 난 뒤에 믿었는가요?
누구도 신존재를 증명해주지는 못하였을 터이고 스스로의 연구를 통하여 증명되었다고 하여서 믿었다는 말이 되는데... 참참참.

위 글이 부재 증명이 되지 못하는 것과 다르지 않게 이제까지의 님의 글이 존재 증명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사시기를...
앞으로 어떻게 될런지는 모르겠지만...
물론 해내면 저야 좋고요.
그런 의미에서 꼭 해내시기를 바랍니다.
해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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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선이 (180.227.149.6)
2010-03-26 21:32:20
한성영님과 박창진님의 입장에 대해서
훗 꾸준하시네요. 이제야 읽었는데 난데없이 저까정 걸고 넘어지시니 몇 가지 얘기해야 할 점들이 있어보입니다.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한성영님 주장의 오류 역시 러셀도 지적했던 자기모순의 오류를 범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언어 자체를 비판하면서도 항상 자신이 하는 말과 언어는 방편이요 예외라는 식으로 둬버리는 거죠. 한성영님의 윗글에서도 보듯이 언어 이전에 사건을 인정치 않는 한성영님이 말하는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면 실상은 <'신은 없다'라고 말하는 한성영님의 글과 언어 자체도 결국은 없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모든 언어는 나부랭이다”라고 말하지만, 정작 <“모든 언어는 나부랭이다”라고 그렇게 주장하는 언어 자체>는 예외로서 던져진다는 점에 바로 한성영님 주장의 이론적 논리적 허점이 있는 것입니다. 논리학에선 이러한 자기모순의 오류를 러셀 패러독스라고 말합니다. 철학 진영에서 볼 경우, 포스트모던 예컨대, 모든 것을 상대화시키고 있는 상대주의나 모든 것을 회의적으로만 보는 회의주의 입장이 바로 이러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걸로 보지요.

결국은 말놀음이 되기 십상일 뿐인데, 이처럼 한성영씨 논리의 결함을 지적하면, 우습게도 자신의 글과 언어는 마치 예외인 것마냥 자기말은 그저 진리를 전달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자신의 논리적 결함'에 대해서는 홀연히 초월하려 한다는 점이 있습니다. 물론 한성영님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니만큼 소통의 편의성을 얘기할 수밖에요. 하지만 정작 그러면서도 정작 자신이 쓰고 있는 개념과 언어에 대한 소통성은 아예 예외로 치부해버리곤 하죠.

좀더 구체적으로 말할 경우, 윗글 한성영님의 글에서 보면, “'만든다’라는 행위는 ‘만든다’라는 언어가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는데, 이는 현대 포스트모던에서도 주로 견지하는 입장이기도 합니다. “기표는 기의를 갖지 않는다”는 해체주의 철학자 데리다의 주장과도 흡사한 것이죠. 지시 대상이 존재하고 있는 게 아니라 온갖 언어 놀이만 있다는 거죠. 언어와 지시 대상 간의 불완전한 일치에서 아예 인식론적 회의주의로 기울기도 하구요. 어쨌든 한성영님은 언어 이전에 사건이 있다는 차원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자신이 깨달은 바를 전달하기 위해선 불가피하게 언어를 쓰고 있다는 점에서 자기수행 모순 즉 러셀 패러독스라는 오류에 빠져 있는 것이랍니다. 이는 모든 것들을 상대주의화 시키는 전략이 빠지는 모순과도 흡사한 것입니다.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이 흔히 말하듯이 “‘신’이라는 존재가 있는 게 아니라 ‘신’에 대한 언어 담론만 존재할 뿐”이라고 보는 맥락과 흡사한 거죠. 언어에 대한 한성영님 입장의 포지션은 바로 여기에 놓여 있답니다.

그런데 유명한 현대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도 이미 얘기하고 있듯이 언어와 지시 대상이 완전히 일치한다고도 볼 순 없지만(일치한다고 봤던 게 근대성이었죠), 언어와 지시 대상이 언제나 불일치한다고만 보지도 않는 답니다(지시대상 같은 건 ‘없다’라거나 ‘불일치’한다고 보는 게 <탈근대성>이구요). 언어와 지시 대상 간의 불통의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소통의 가능성까지도 열어두고 있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위르겐 하버마스가 현대 포스트모던을 얘기하면서 합리적 소통을 얘기하는 이유이기도 하구요. 기표와 기의가 곧잘 미끄러지기도 하지만 화해가능성을 아예 차단할 이유도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아예 화해불가능성이 되버리면 모든 말과 언어들은 상대화만 될 뿐이니까요. 여기에는 한성영님이 주장하는 말과 언어도 예외없이 몽땅 상대적이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상대주의자가 겪는 러셀 패러독스인 거죠.

그런데 이 지점에서 기독교의 정통 보수성을 견지하려는
박창진님과 관련해서 말한다면....

이러한 한성영님은 박창진님의 기독교 입장과는 완전히 다른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적어도 보수 기독교인은 아니라는 점에서 아마도 한성영님이 적어도 보수 기독교인을 비판하는 사람들한테선 나름대로 지지되고 있거나 박창진님의 입장이 비판되고 있는 걸로 보여집니다. 한성영님은 오히려 기독교 보다는 기독교 세계에서 쓰는 언어와 개념들을 쓰기도 하고 문자적인 보수 기독교를 비판하는 측면이 있을뿐더러 실은 기독교 뿐만 아니라 불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 사상들에도 발을 뻗고 있기에 보수 기독교인의 입장에서도 당연히 함께할 수 없는 입장인 거죠. 한성영님에 대해선 제가 앞서 관념적 자유주의자라고 밝혔듯이 기독교 외의 다른 종교사상들까지 그저 자유롭게 휘젓고 다닌다는 점에선 일견 마치 진보적인 것마냥 보일 순 있습니다.

하지만 한성영님이 궁극적으로 설파하고 있는 사유 시스템의 본질은 하나입니다. 그저 세상은 여여할 뿐임을 마음으로 깨치자는 것이죠. 깨치는 순간 자유롭게 해방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건 공허한 허상이요 언어 게임이요 마야일 뿐임을 깨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허허롭게 살자면서 정작 자신은 이따금씩 시끄럽게 논쟁을 걸기도 하고 이렇게 자기가 쓴 글을 버젓이 내걸고 있는 거죠. 그래서 정작 이 분의 논리를 비판해버리면 자기가 하는 글과 언어들은 그저 방편일 뿐이니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는 식으로 얘기하는 것이랍니다.

끝으로 말씀드리면, 당연히 이러한 제 입장은
박창진님의 입장도 아니지만 한성영님의 입장도 아니랍니다.

박창진님의 입장이 흔히 기독교의 정통 보수성을 주장하는 기독교 진영에서 나름대로 볼 수 있다고 한다면, 한성영님 같은 분은 오히려 이곳 기독교 진영보다는 관념적인 불교 진영이나 관념적인 심리학 진영에서 종종 엿볼 수 있는 분이랍니다. 이때 학문적 탐구 대상의 범위는 좀더 한성영님이 넓다고 여겨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성영님은 기독교 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경전들도 자유롭게 탐닉하기도 하니까요. 적어도 한성영님은 기독교 라는 울타리 안에 갇혀 있거나 하는 분은 아닌 걸로 여겨집니다.

그렇기에 이곳 기독교 언론인 당당에서 볼 땐 한성영님 같은 분은 매우 이채롭게 보일 수 있기에(물론 제겐 진부할 뿐이지만), 다소 신선하게 느껴질 지도 모르겠군요. 그런 점에서 저로서도 좀더 자유로워 보이는 한성영님의 입장을 좋아하시는 분들의 맥락도 충분히 공감이 된답니다. 아마도 평소에 보수 기독교를 혐오하거나 비판하는 입장에 서 있는 분이라면, 오히려 박창진님을 비판하고 한성영님을 지지함으로써 보수 기독교의 나쁜 점들을 비판하려는 전략일테죠.

하지만 증명불가하니 무조건 믿을 수밖에 없다며 소통이 불허되는 지점을 낳고 있는 보수 기독교나 모든 언어와 개념들을 허상으로 치부하면서 정작 자신이 쓰는 개념과 언어 소통성은 예외로서 불허되고 있다는 점에서 박창진님이나 한성영님은 그다지 서로 다르지 않은 공통점도 있답니다. 즉, 소통의 맥락에서 볼 때 이러한 사유 패턴의 형식 자체는 둘 다 파쇼적이라는 점입니다. 이는 기독교근본주의자가 이슬람근본주의자들이 서로 싸우듯이 기독교 근본주의자와 언어 초탈의 마음교 근본주의자가 서로 싸우는 것과 같은 맥락인 거죠.

한성영님의 입장에선 언어를 초탈하지 못하면 여전히 무명에 있는 중생들로만 여겨지는 거니까 "제발 좀 깨치라"며 불쌍한 중생들을 전도하려는 심뽀가 있는 것인데, 이는 예수 믿지 않으면 죽어서 지옥에 간다며 불쌍한 비신자들을 전도하려는 보수 기독교인들의 심뽀와도 크게 다르지 않답니다. 즉, 설파하는 내용은 다를지언정 적어도 그 전달 패턴에 있어선 유사한 것이란 얘기죠.

암튼 서로 간에 사정이 이러하니 서로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포지션들에 대해선
각자가 잘 알아서 판단하시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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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진 (183.103.29.11)
2010-03-26 17:02:51
아주 간단한 추론 그리고
각기 다른 언어권에서 예외없이 우리말로 번역하면 '만든다'가 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만든다'는 단어는 어떻게 생겨났을까요?
인간의 초창기에 사냥을 하거나 열매를 따서 먹거리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사냥한 것이나 열매 자체를 그대로 먹거리로 삼았을 수 있습니다.
어느 시점에서는 그 자체에 어떤 변형을 가하여- 불을 이용하여- 먹거리를 장만했을 것입니다.

원래의 재료에 어떤 변화를 통하여 다른 무엇인가가 생겨나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만든다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만약에 만든다는 단어가 아닌 다른 단어로 그것을 규정하였다면 그 단어가 생겨나는 것을 나타내는 단어가 되었을 것입니다.

어떤 변화를 통하여 다른 무엇인가가 생겨나는 일이 없었는데, 만든다는 단어가 먼저 생겨났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인가가 생겨나는 현상을 다함께 만든다로 말하게 되고 그 단어를 서로 간의 의사소통의 방편으로 활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대여 잘 생각해보라 그대가 ‘만든다’라는 규정을 하지 않으면 그대의 어떤 행위도 ‘만든다’가 되지 않으며 신도 그 어떤 것을 만들 수 없으며 신조차도 존재할 수 없게 된다. 그대가 일정한 범주의 정의를 만들어 내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만들어 지지 않는 것이다. 그대가 그 모든 것을 만들어 낸 것이다. 아니 ‘만든다’라는 언어를 인간이 사용하게 되면서 모든 것이 만들어 지는 대상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알겠는가?"
라는 주장은 전혀 설득력이 없는 말일 뿐입니다.
한 개인이 규정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의해 그 행위가 의미가 있어지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성영님은 이 부분에 대한 이해를 전혀 못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개인이 그 언어로 규정을 하지 않더라도 그 언어에 담긴 의미와 그 의미에 부합하는 행위는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신 존재와 창조에 대해서는 별도의 논점이 필요합니다.
기독교에서는 신이 존재하고 그 신이 우주를 창조하셨으며 그 법칙에 따라서 지금까지 존재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신의 존재를 인간들이 만들어내고 그렇게 만들어낸 신이 우주를 창조하였다고 덧씌우고 만들어낸 신에 의해 부여된 법칙으로 지금까지 우주가 존재하게 된 것인가?
아니면 신이 존재하였고 그 신에 의해 우주와 인간이 만들어지고 정한 법칙을 따라 우주가 존재하게 되면서 인간에게 스스로를 알려서 그것이 글로 남겨지게 되었는가?
인간의 존재 이후로부터 지금까지 전자나 후자나 어느 입장도 증명을 통하여 어느 하나가 확증되지 않고 있습니다.
전자도 증명된 경우가 없고 후자도 증명된 경우가 없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전자도 증명이 불가능하고 후자도 증명이 불가능합니다.
인간의 이성 안에서 증명불가능한 사안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개인의 선택만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열어 복음을 청종하게 하신 사람들은 후자를 선택합니다.
그것이 없는 사람들은 전자를 선택합니다.

제 개인적으로 전자를 선택하는 분들에 대해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개인의 선택 사항이기에 달리 어쩔 수가 없지만 안타까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오늘날의 교회가 그 모습으로 하나님을 가리고 있는 형편이라고 생각하기에 부끄러운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끝까지 반대하는 것은 전자를 증명했다고 주장하는 경우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무슨 대단한 논리로 그것을 증명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 자체의 문제를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또한 후자를 증명하겠다거나 증명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도 반대합니다.
솔직한 마음으로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너무 좋겠지만 결코 가능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최종적으로 남는 것은 교회가 이미 주어진 복음을 바르게 깨닫고 그 복음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신존재가 증명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길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여정에서 위의 글과 같은 주장에 현혹되는 이들이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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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진 (183.103.29.11)
2010-03-26 16:20:12
신의 부재를 증명했다고 생각하시는군요.
놀랍게도 말입니다.
증명이 무슨 뜻인지는 아시지요?
사실 관계를 명백하게 밝히는 것입니다.
천동설을 말하던 시대에 지동설을 말하고 그 이후에 증명하여 더 이상 태양이 지구가 도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해진 것과 같이요.
님이 신부재를 증명하였다면 신존재를 받아들이는 이들은 모두 제 정신이 아닌 사람들이지요.
지금의 시점에서 천동설이 옳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으니 말입니다.
증명되었는데, 그 증명과 다른 소리를 하는 것은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지요.
그렇다면 과연 그럴까요?
님에 의해 신부재가 증명되었는데, 저나 저와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비정상이어서 신존재를 말하는 것일까요?
그렇다고 생각하는 님의 그 사고의 대담함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글을 조금만 생각하고 읽으면 제 글이 신부재를 증명했다고 생각하는 님의 생각이 잘못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음을 알텐데요. 참 안타깝네요.
님의 근거는 언어와 그 규정이었습니다. 전적으로 개인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그런데 그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언어의 사회성만 생각하면 아주 쉽게 알 수 있는.
제가 'G 세대'를 예를 들어서 친절하게 설명을 드렸지요.
그런데도 님은 님의 글의 문제점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시고 계시네요.
이미 설명하였는데도 계속 설명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고요.

위의 글로 신부재를 증명하였다고 생각하는 그 사고에 경의를 표합니다.
이 글의 뜻 정도도 이해하지 못하는 수준은 아니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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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진 (183.103.29.11)
2010-03-26 16:08:42
이전에 쓴 글을 약간 추가하여 옮기지요
동정녀 탄생이나 부활에 대한 이야기가 다른 종교에도 있다는 사실을 앞세워 성경(서)의 내용을 거부합니다.

이에 대한 평가를 위해 노아 홍수에 대한 기록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말씀하시면서 노아 홍수를 언급하십니다(마 24:37-39). 예수님의 말씀은 이후에 역사에서 그대로 집행되었음을 생각할 때에 노아 홍수를 역사적 사실로서 생각하시고 언급하셨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수메르 신화나 메소포타미아 설화를 언급하면서 그것을 옮겼다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기록 시점에 있어서는 성경보다 앞서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들은 고대인들의 사고의 산물로서 조잡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신들이 자신들의 음식을 만들어줄 존재가 필요하여서 인간을 창조하고 이 인간들로 인해 여러 안좋은 상황들이 발생하여 귀찮아지자 홍수로 쓸어버린다는 것이 그 내용입니다. 그러한 내용들은 상상으로 만들어낸 것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조상들에게서 들려진 이야기가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변질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후자라면 수메르나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의 조상인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서 들려진 이야기가 변질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성경의 노아 홍수는 그 일을 집행하신 하나님에 의해서 정확하게 전달된 것입니다. 기록 시점에 있어서는 이후이지만 그 내용의 진정성은 앞서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노아 홍수의 기록자는 어떻게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는가? 조상들로부터 그 이야기가 변질되지 않고 전수되었기 때문에 알 수 있었는가? 결코 아닙니다. 만약 그런 과정에 의한 것이라면 수메르 신화나 메소포타미아 설화의 수준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자신의 상상으로 그렇게 기록한 것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알려주셨기 때문이라고 밖에 달리 이해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선지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야웨께서 말씀하시기를”이라는 표현도 그 성격 상 동일합니다.

이집트 탈출과 홍해 건넘에 대한 기록의 경우에는 그 당대에 그 일을 직접적으로 겪은 이들이 있었고 그것을 기록하였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에 바탕을 둔 현대 신학자들은 그 기록 시점을 그 일이 발생한 때로부터 700~800 년 이후로 잡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역사 방식에 어긋납니다. 하나님께서 그 역사를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 기념물을 두도록 하셨음을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아무런 기록이 없었는데 그렇게 오랜 기간이 지난 후에 그 내용들이 정확하게 기록한다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결국 구약 성경에서 모세 오경의 경우에는 기록자의 상상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밖에 볼 수가 없습니다. 아무런 기록도 없이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구전되었다가 기록되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런 입장은 합리적이지 못합니다. 정당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일을 겪은 이에 의해서 기록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며 정당합니다.

곰이 백일 동안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나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는 실제로 그런 일을 일으킬 수 있는 존재가 없습니다. 상상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것을 설화라고 보는 것은 지극히 정당합니다.
동정녀 탄생이나 부활에 대한 다른 종교의 기록도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에는 그 일이 일어나도록 하는 존재가 없습니다. 실존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람이 생각으로 만들어낸 존재일 뿐입니다.

반면에 성경(서)는 그 일을 행할 수 있는 실존하는 존재가 있고 그분에 의해 그 일이 발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른 종교에서의 기록과 전혀 다른 차원인 것입니다. 그런데 양자를 동급으로 놓고서는 신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지성을 바르게 사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너무나 단순하게 비교하고서는 결론을 이끌어낸 것입니다. 노아 홍수를 수메르 신화나 메소포타미아 설화의 차용으로 보는 것도 똑같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이적들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또는 사람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행하신 일들입니다. 그분은 그러한 일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일들이 역사에서 실제로 발생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려면 최소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그분이 그런 일을 행하실 수 없다는 것을 먼저 증명하여야 합니다. 그것은 없이 현대인의 사고에 맞지 않기에, 과학이라는 잣대에 부합되지 않기에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비합리적인 지성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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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명 (203.152.168.139)
2010-03-26 12:01:17
언어 그 자체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언어 그자체가 신의 존재를 확실하게 변증한다고 하시는 군요.
음 , 왜 그런가요? 저는 님의 말씀이 확실하게 이해가 가지 않군요.
좀 더 설명을 해주시면 감사드리겟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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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명 (203.152.168.139)
2010-03-26 11:57:54
박창진님 답글 감사드립니다.
자, 제가 님에게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부탁을 드렸는데요. 아직도 단편적인 언급만 하셔셔 제가 님이 어떤 말씀을 하시고자 하는지 파악하기가 힘듭니다. 예를 들어 보지요.

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창진님의 글을 <,> 기호로 표시하겠습니다)

<그대여 잘 생각해보라 그대가 ‘만든다’라는 규정을 하지 않으면 그대의 어떤 행위도 ‘만든다’가 되지 않으며 신도 그 어떤 것을 만들 수 없으며 신조차도 존재할 수 없게 된다."
님의 글이지요.
님은 신의 존재가 있는지 없는지 증명하지 못했습니다. 맞지요?혹시 위 글이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명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그렇다면 제가 웃고 넘기지요. 위 글로 신부재를 증명하였다고 생각한다면 기가 막혀 웃지 않을 수가 없지요.>

저의 글이 신의 부재를 설명하지 못했다는 말씀을 하실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창진님의 글에는 어떻게, 왜 신의 부재를 증명하지 못했는 지에 대한 설명과 논증이 빠져 있어요. 님은 “증명하지 못했습니다. 맞지요?”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님의 단순한 주장에 동의를 강요합니다. 그리고선 그냥 웃어 넘기신다고 합니다. 예, 웃어 넘기셔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창진님이 그냥 웃어 넘기시기만 하고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 못하시면 저도 님의 요지를 파악하기가 어렵구요. 창진님의 글을 읽는 다른 분들도 님의 글을 제대로 독해하지 못하거나 비웃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게 얼마나 시간낭비이자 당당뉴스에서 문서선교를 하시는 창진님에게도 피해가 됩니까?

창진님이 수준 높으신 안목을 가지고 계시더라도 타인에게 전달할 때 남을 배려하고 그들이 알아 들을 수 있도록 정성을 들이지 않으시면 소통을 제대로 할 수 없고 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제대로 전달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님의 진지한 모습을 볼 때 “내 말을 못 알아 들으면 말고..” 이런 입장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렇죠? 그렇다면 님의 글을 읽는 분들이나 제가 수준이 못 미쳐서 님의 글을 제대로 독해할 수 없다면 이에 대한 친절한 해설을 성의있게 해 주시는 것이 이곳 당당에 글을 게재하시는 분의 책임있는 태도라고 생각됩니다.

님께서 뉴스엔조이에 올라와 있는 제글 ‘예수의 정체를 밝힌다’에서 저와 사랑그리고 편지님과의 대화를 참조해 주셨으면 합니다. 사랑그리고 편지님께서는 상당히 친절하고 성의 있는 답변을 주셔셔 매끄럽게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런 부분을 님께서 참고하시고 받아들여서 저에게 배려를 보여 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님의 수준에 못미쳐서 님의 글을 읽고 요지를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신의 부재를 증명하지 못했는지를 자세한 설명을 덧붙여서 논증해 주시면 감사드리겟습니다. 그리고 저도 님의 글 중 어떤 것들이 이해가지 않는 지 구체적으로 덧붙이겟습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님은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했습니다. 혹시 위 글이 그 증명이라고 생각한다면 역시나 웃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부분에서도 웃지만 마시고 어떻게 증명을 못했는 지 구체적으로 풀어서 설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규정에 의해 그것이 결정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인간의 규정이 없다면 신도 없게 되고 신의 창조도 없게 된다고 말입니다.그렇지만 인간의 규정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하나님과 그분의 창조는 실재입니다.다만 그것을 수용하는 사람 또는 수용되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것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요.>

인간의 규정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하나님과 그 분의 창조가 실재라고 하셨는데 그것을 뒷 받침할 수 있는 구체적인 근거와 논증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창진님의 글에서는 이것이 빠져 있어서 저도 이해하기가 어렵고 남을 설득할 여지가 적어집니다. 그렇지 않나요?

<언어가 없다고 행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제 글은 위의 글이 담고 있는 바 때문에 한 이야기입니다.님은 인지하지 못하는지 모르겠지만 그 말이 그 말이랍니다.님의 적은 글과 제가 그것에 대해 언어가 없다고 행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같은 의미라는 것입니다.그런데 제 글에 대해 본인이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니요? 역시나 우스운 소리이지요.>

이 글은 독해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마치 “거시기가 거시기혀서 엄청 거시허니껜 거시기하덜 마러!!”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스운 소리라고 끝마치고 있으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면 너무 설득력이 떨어지시고 글을 읽는 분들의 빈정만 사실 여지가 있으십니다.

<님의 관점에서는 문자에 대한 수용이 우습게 보이겠지요?님과 같은 관점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그럴 것이고요.그런데 그 관점 자체가 엉터리이거든요.그러니 우습게 보는 것을 마음에 담을 이유가 없지요.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이전 글에서 여러차례 밝혔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말이지요. “한성영은 문자에 대한 수용을 우습게 보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엉터리이다. 이미 이전 글에서 여러 차례 밝혔다.” 이렇게만 말씀하시면 제 관점이 어떻게 엉터리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문자에 대한 수용이 어떤 의미인가요? 저는 문자에 대한 수용을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자에는 외연과 내포가 있습니다. 즉 외연이라 함은 문자가 가지고 있는 형식적인 모습이 이고요. 내포라 함은 문자 속에 담겨있는 의미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문자의 외연에만 치중해서 그 의미를 제대로 짚어내지 못하시는 분들을 문자주의자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문자의 형식에 집중해서 오래 전 고대인들의 세계관이 담겨 있는 천지창조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과 소통하기가 힘들고 심한 갈등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저는 천지창조가 의미하고 있는 내포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이지 문자의 수용자체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님께서 먼저 저의 글에 답을 하시면서 대화를 청하셨다면 창진님께서 이미 이전 글에서 님의 입장을 여러 차례 밝히셨다 하더라도 저는 모를 수도 있는 것이니 좀 더 구체적으로 자세하게 언급해 주시는 것이 바른 자세가 아닐까요? 충고 하듯이 말씀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러나 단지 저는 우리의 대화를 매끄럽게 하기위해서 부탁을 드리는 것 뿐입니다.

<님은 정강길님의 비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자신의 글에 적용하여야 합니다.언어의 사회성을 좀 깊이 묵상하시기를 바랍니다.우리나라에서 요즘 G 세대라는 표현이 생겨났습니다.누군가가 그 표현을 처음 사용하였을 것입니다.그가 그 표현을 사용한 것은 그 표현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그 표현을 사용하여서 그 표현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이 아니고요.그리고 그 표현을 사회적으로 수용하여서 한 개인의 개인적인 표현으로 그치지 않게 되었습니다.이제 누가 그 표현을 처음 사용하였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그 표현이 개인을 넘어서서 사회적인 가치를 지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많은 사람들이 그런 표현을 사용하지요.그런데 누군가가 그 표현이 수용되지 않아서 그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합시다.그 사람이 그 표현을 수용하지 않고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여서 그 표현의 의의가 없어질까요?그런 사람이 있다고 하여서 그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잘못일까요?님의 논리는 그 표현의 의의가 없이지고 잘못이라는 것이지요.오직 개인 그리고 그 개인의 선택만이 중요하다는 입장이니까요.모든 것이 개인의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는 입장이니까요.제 입장에서는 왠만하면 좀 그런 수준에서 벗어나시라는 것입니다.>,

정강길씨와의 대화가 매끄럽지 않은 것도 어느 정도는 그 친구가 님처럼 단편적인 부분만을 짚어서 물고 늘어질 뿐 구체적이고 분명한 설명과 논증을 하지 않기 때문에 제가 더 이상의 대화가 무의미하다고 여겨져서 중단한 것입니다. 그러니 님께서도 저와의 지속적인 대화를 원하신다면 저의 부탁을 들어주셔야 저와의 대화가 이어질 것 같습니다.

언어의 사회성을 말씀하시는 군요. 그러시면서 G세대라는 예를 드셨어요. G세대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때문에 G세대가 생겨난 것이 아니라 G세대라는 표현을 하기 전에 그에 상응하는 사람들이 먼저 있었고 다른 사람들이 그들이 하는 행동, 습관, 생활방식들을 관찰하고서 나중에 G세대라는 명칭을 부여했다는 말이지요? 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G세대라는 것은 소통을 위해 편의를 위해서 사용한 명칭일 뿐이지 그들은 G세대라는 언어 범주에 국한된 존재들이 아니지요. 다만 다른 세대들과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부분을 설명하기 위해 G세대라는 명칭을 차용한 것 뿐이지 본질적으로 그들은 G세대라는 차별적 존재는 아니지요. 그렇지 않나요?

아주 세밀하게 분석하고 분류한다면 인간 존재 각각은 전부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특성들을 하나하나 구별해서 A존재, B존재, C존재........등으로 구별할 수도 있습니다. 구별하는 방식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하게 분류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코의 모양을 가지고 뭉툭한 세대, 비쭉한 세대, 펑퍼짐한 세대, 들창코 세대 등등으로 분류 할 수 있듯이요. 그런데 그런 식으로 분류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통합적으로 무엇으로 불러야 합니까? 그냥 인간이지요. 그렇죠? 인간이라는 것도 언어에 의한 분류에 해당합니다. 인간이라고 언어에 의해 분류하지 않으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인간이 이와 같은 분류를 하는 것은 소통과 편리를 위해서 하는 것이지 그 언어에 해당하는 변하지 않는 원리나 특성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리고 관찰된 어떤 특성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러한 특성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는 것이지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나요? 그러니 언어에 의해서 규정하는 모든 것들은 영원하고 지속적인 것이 아니라 제한적이고 순간적인 것들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언어로 어떤 대상을 규정하기 전에 그 대상들의 특성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특성들은 시간과 공간 지역과 사회와 문화에 따라 나타난 순간적인 것이지 지속적이고 영원한 특성들이 아니며 그 특성들을 바라보는 시각들도 관찰하는 사람들의 시각과 입장에 따라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이 G세대라고 언명한 대상들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은 다른 시각과 입장에서 그 특징들을 달리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하나의 대상에 대해서도 보는 사람들의 처지와 입장에 따라 다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언어에 의해서 생겨난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언어는 구별과 분류를 하는 것이고 그 구별과 분류는 영원하고 불변하는 특성이 아니라 시간적으로는 순간적이고 공간적으로는 제한적인 것입니다. 그러니 신에 대해서도 설령 신에 해당하는 대상이 있다하더라도 신의 특성에 대해서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사람들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해석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신이라 하더라도 어떤 고정된 특성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시, 공간, 지역과 문화의 제약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신 자신은 그것들에 제약을 받지 않는 무소불위의 능력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대상들은 얼마든지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쪽에서 다르게 받아들인다면 이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러니 신에 대한 규정은 신 독단적으로 할 수 없는 것이고 신과 그것을 신으로 받아들이는 대상간의 약속에 의해 결정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대상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 대상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해석되어서 받아들여 질 수 있는 것이니 그 대상의 의미는 고정된 것이 아니며 끈임없이 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대상은 받아들이는 바에 따라 달라지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신이라는 것도 신에 해당하는 대상이 아무리 자신이 신이라고 주장하더라도 인간이 그것을 신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인간의 관점에서는 신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인간이 호흡을 할 수 없으면 생명을 유지 할 수 없으니 호흡을 가능하게 하는 공기를 신이라고 한다고 해서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해석하고 받아들이기 나름이니까요.

그리고 기독교인들이 언어로 규정한 전지전능한 신에 해당하는 대상이 실제로 존재하는 가 하는 문제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문자주의기독교인들이 언어로 규정한 전지전능한 신이 언어로 규정하기 전에 실제로 전지전능한 대상이 실제하였는 가 하는 문제는 Ismail-X님이 말하신 것 처럼 그것의 존재를 주장하는 문자주의 기독교인들이 증명해야할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 증거가 전혀 없을 뿐만아니라 현대과학과 신화와 종교학에 따르자면 문자주의 기독교의 전지전능한 신은 허구이며 그저 신화적인 상상의 존재라는 것이지요. 또한 그것이 실재한다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대상인 우리가 그 전지전능한 대상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달라지는 것이고, 만약 그 전지전능한 대상이 자신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는다고 인간들을 억압하고 폭력을 행사한다면 그 전지전능한 대상과 인간은 신과 피조물의 관계가 아니라 원수관계가 될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신과 피조물이라는 설정도 양자간의 합의하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인간이 언어로서 대상을 분류하며 설정하는 것은 인간이 대상과 자신을 이분법으로서 분리된 존재로 인식하기 때문에 인간이라는 분리된 특성안에 오래 그리고 안전하게 머물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분리된 존재로 인식하는 모든 개체들은 기본적으로 개체성을 위협하는 요소들에 가장 민감합니다. 예들들면 호흡, 의, 식, 주, 안전등에 개체는 아주 민감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개체성을 유지하게 하는 가정 기본적인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받아들이려 하지요. 그러나 좀 더 다른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호흡, 의, 식, 주등도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생명현상이란 하나의 습관또는 경향성입니다.일정한 조건하에서 보여지는 현상인 것이지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조건이 바뀌면 그 경향성의 특징들도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진화론은 자연선택과 진화라고 표현하지요.

인간은 그 생명현상을 유지하고 싶어하는 경향성의 습관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허물 수 있는 조건들에 가장 민감하고 절대적인 가치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개체성이란 영원한 것이 아니고 조건에 따라 바뀌며 허물어질 수밖에 없는 데도 인간은 그 조건들을 더 강화시켜주는 것들에 집착하게 되고 집착하면 할수록 괴로움은 커지는 것이지요, 그러나 인간이란 하나의 현상이고 경향성이라는 것을 꿰뚫어 보면 그 현상과 경향성에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허상의 개체성으로 여행하다 개체가 아니었던 본래로 돌아가면 되는 것이지요. 인간이 이러한 개체성을 강화시키려는 성향은 발전의 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전쟁과 폭력, 배타와 갈등의 주범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것의 본질을 꿰뚫어 이러한 성향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배해야 합니다. 그것이 수행종교에서 말하는 수행입니다. 이러한 성향을 지배하지 못하고 지배를 받기 때문에 인간은 갈등과 전쟁과 번뇌의 중심에 서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문자주의 기독교의 목사들은 이런 것을 모르고 수행도 하지 않으니 자신의 성향에 그대로 지배를 받게 되어서 치기어린 각종 문제들을 일으킬 수 있는 조건을 다분히 가지고 있고 또 그것을 우리앞에 여지없이 증명주고 있지요.

그리고 제가 인간의 언어가 사회성이 있는 것인지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언어는 사회적인 약속일 뿐만 아니라 생성, 발전, 소멸하지요. 언어의 이러한 특성 때문에 너무 빨리 변하고 다양해지면 소통에 지장이 있기 때문에 언어학자들이 표준어를 만들고 고수하려는 것입니다. 언어가 사회적인 가치를 갖는다는 것은 그것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그 약속을 받아들였다는 것이지요. 그 약속체계를 무시한다면 당연히 그 약속에 따라 소통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할 수 없지요. 그렇다고 해서 자신들만의 약속을 강요하고 주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대화를 하는 사람들과 소통하려 한다면 일단 그들의 소통방식을 존중하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지 그것이 전적으로 옳기 때문에 받아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것도 변하는 것이지 절대적인 기준이 아닙니다. 사회 일반이 공유하는 언어약속과 문법이 있더라도 각 개인은 자신만의 언어와 문법을 얼마든지 만들어 사용할 수 있고 창의성이 뛰어난 사람들이 이것을 선도하지요. 작가들은 기존의 언어를 바탕으로 새로운 언어와 문법들을 창작하고 미술가들도 자신들만의 언어와 문법으로 예술성을 표현함으로서 기존의 고장관념과 인식의 틀 문법을 깨고 새로움을 창출해냅니다. 이것이 인간의 현실의 모습이지요. 그러니 언어적 표현은 얼마든지 누구나 다양하게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다만 그 표현들은 고정된 것이 아니고 변하는 것이며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 표현의 의의가 없어지고 잘못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좀 더 신중하게 읽어 달라고 부탁드리는 겁니다.

<오직 개인 그리고 그 개인의 선택만이 중요하다는 입장이니까요.모든 것이 개인의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는 입장이니까요.>

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은 물론 제가 님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저는 개인의 선택이 중요하다. 개인의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 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꿰뚫어 보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님께서 이렇게 독해하셨다면 제 글을 오독하십겁니다. 그러니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질문을 통해 확인해 주세요. 그래야 제 말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시고서 대화를 이어갈 수 있지 않겟습니까? 창진님께서 말씀하시듯 저를 그런 수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싶어서 저의 글에 대화를 청하셨다면 좀 더 성의 있고 정성을 들인 글과 고민을 보여주셨으면 합니다. 자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두서 없이 쓴 글이라 빈 틈이 많을 텐데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질문해 주시면 감사하겟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창진님께서 성의 없는 단편적인 주장만을 하신다면 님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지속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저는 진지하게 서로 배우고자 하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싶거든요. 물론 창진님께서 진지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고 지금까지 글로 미루어 보아 나타나는 모습이 그렇다는 것이니 앞으로 글을 쓰실 때는 이런 점을 염두에 두셔셔 저의 부탁을 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럼 오늘은 이만 할까 합니다.

진리안에서 늘 평안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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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그자체 (218.51.101.108)
2010-03-25 17:11:17
'관념'과 '유물'의 차이..만큼이나 '언어'와 '글ㅆ;'의 차일 아실라나..!
님께서 이핼 못하신 것 뿐이지.. 그걸 또 미치실 것 까지얌.. 쩝!
이땟껏 '말꼬리잡기'놀이 했든 것 아니던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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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진 (183.103.29.11)
2010-03-25 14:46:46
돌아 돌아...
내가 언제 한번이라도 신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고 하였는가?
내가 언제 한번이라도 신존재를 증명한다고 한 적이 있는가?
신 증명과 관련하여 일관된 입장은 존재나 부재나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요.
기억력이 나쁜 것 자랑하지 말기를... 애처로울 뿐이니...

근거는 이미 이전에 글에서 여러차례 밝혔기에 다시 적는 수고를 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무슨 소리를...
역시나 기억력 나쁜 것 자랑하고 있고요. 애처롭게도...

압권인 것은
정강길님과 한선영님과의 논쟁에서 정강길님이 계속적으로 언어의 사회성을 무시하는 한선영님의 자기 식의 이해와 표현에 대해 논박하였는데
그때에는 정강길님의 주장에 반박하는 한선영님의 글에 대해 비난하던 인간이
지금 한선영님은 그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논조의 글을 적고 있는데
열렬히 지지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돌아 돌아... 왜 사니? 그렇게 살고 싶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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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그자체 (218.51.101.108)
2010-03-25 13:24:09
문제는, 언어는 형체는 없어도 그 자체로 존재합니다. 이것 만큼 신의 존재를 변증할 게 또 있을까요 ?! (창 11:7)
언어가 동일한 사회를 묶어 연방이라하고.. 한민족의 언어가 소멸하면 그 민족도 혼혈로 쇠락해 버리는 것처럼.. 언어라는 것은 참 귀하지요. 그런데도 영어를 가르치지 못해서 난리부르스를 떠는 댈똥령이라는 넘은 대체 머엿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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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mail-x (116.47.191.5)
2010-03-25 12:07:06
박창진 목사의 글을 10%라도 이해 할 수 있는 분 손 들어 보세요~!^^
.

1. 그래요 웃으면서 합시다. 즐거운 논쟁을 해야지요.
"그대여 잘 생각해보라 그대가 ‘만든다’라는 규정을 하지 않으면 그대의 어떤 행위도 ‘만든다’가 되지 않으며 신도 그 어떤 것을 만들 수 없으며 신조차도 존재할 수 없게 된다."
님의 글이지요.
님은 신의 존재가 있는지 없는지 증명하지 못했습니다. 맞지요?
혹시 위 글이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명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그렇다면 제가 웃고 넘기지요. 위 글로 신부재를 증명하였다고 생각한다면 기가 막혀 웃지 않을 수가 없지요.

--> 박 목사는 ‘부존재 증명’에 대해서 먼저 알아야 하오. 어떤 존재에 대한 증명은 있다고 주장하는 쪽에서 하는 것이지 반대 측에서 하는 것이 아니오. 도끼가 주장하기를 “나는 100억원 짜리 금송아지를 가지고 있다”라고 말하면 이 금송아지에 대한 존재나 부존재 증명은 듣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나 도끼가 해야 하는 것이오. 이런 것은 정말 중학교 입학하는 아이들에게 차근차근 가르쳐도 알 수 있는 것인데 왜 개독들은 아무리 이야기 해 주어도 모른단 말인가?


2. 하나님의 천지창조. 님은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했습니다.
혹시 위 글이 그 증명이라고 생각한다면 역시나 웃지 않을 수 없습니다.

--> 마찬가지로, 제우스신의 천지창조도 박 목사를 비롯한 개독들 역시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지 않소?^^ 박 목사는 웃겠지만 우리는 박 목사를 비롯한 개독들을 비웃소.^^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규정에 의해 그것이 결정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규정이 없다면 신도 없게 되고 신의 창조도 없게 된다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규정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하나님과 그분의 창조는 실재입니다.

--> 그러니까 왜 실재가 되냐고? 여기서 개독의 문제점이 드러나는 것이다. 주장만 있고 증거가 없잖아? 주장을 하면 거기에 합당한 논거를 대야지. 누가 뭐라든 야훼는 존재한다는 주장은 누가 뭐라든 제우스는 존재한다. 누가 뭐라든 부두신이 존재한다는 주장과 뭐가 다르냐고?


4. 다만 그것을 수용하는 사람 또는 수용되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것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요.

--> 솔직히 이 대목에서는 “너 바보지?” 라고 묻고 싶다.


5. 언어가 없다고 행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제 글은 위의 글이 담고 있는 바 때문에 한 이야기입니다. 님은 인지하지 못하는지 모르겠지만 그 말이 그 말이랍니다.
님의 적은 글과 제가 그것에 대해 언어가 없다고 행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같은 의미라는 것입니다.

--> 나도 꽤나 배운 사람에 속하지만 정말 박 목사의 글은 ‘이해불가’다.


6. 그런데 제 글에 대해 본인이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니요? 역시나 우스운 소리이지요.

--> 주특기 또 나오는군. 지 맘대로 생각하고 지 맘대로 해석하고는 “넌 이런 주장을 했어. 니가 뭐라든 이렇게 말한거야” 라고 떠드는군.


7. 님의 관점에서는 문자에 대한 수용이 우습게 보이겠지요? 님과 같은 관점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그럴 것이고요. 그런데 그 관점 자체가 엉터리이거든요.

--> 왜 엉터리인데? 아무리 봐도 맞는 말이구만. 주장만 하지 말고 근거를 대라니까. 근거. 근거. 근거.


8. 그러니 우습게 보는 것을 마음에 담을 이유가 없지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이전 글에서 여러차례 밝혔답니다.

--> 자신은 밝혔다고 하는데 남들은 아무도 모른다. 그게 밝힌건가?^^


9. 님은 정강길님의 비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자신의 글에 적용하여야 합니다.

--> 여기서 괜히 정강길 선생 끌어다 쓰는데 솔직히 박 목사 당신이 정강길 선생의 글을 10%라도 이해나 하고 그러는거요?^^ 남들이 비웃소.^^


10. 언어의 사회성을 좀 깊이 묵상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나라에서 요즘 G 세대라는 표현이 생겨났습니다.
누군가가 그 표현을 처음 사용하였을 것입니다.
그가 그 표현을 사용한 것은 그 표현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표현을 사용하여서 그 표현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이 아니고요.
그리고 그 표현을 사회적으로 수용하여서 한 개인의 개인적인 표현으로 그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 누가 그 표현을 처음 사용하였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표현이 개인을 넘어서서 사회적인 가치를 지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표현을 사용하지요.
그런데 누군가가 그 표현이 수용되지 않아서 그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합시다.
그 사람이 그 표현을 수용하지 않고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여서 그 표현의 의의가 없어질까요?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하여서 그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잘못일까요?
님의 논리는 그 표현의 의의가 없이지고 잘못이라는 것이지요.
오직 개인 그리고 그 개인의 선택만이 중요하다는 입장이니까요.
모든 것이 개인의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는 입장이니까요.

--> 글은 열라 긴데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다. 개독들끼리는 혹시 서로 통 하려나?
혹시 다른 개독 지금 댓글 보고 있으면 좀 말해주시오. 당신은 박 목사 글 알아들을 수 있는지? 전에 보니까 다른 개독 한 마리는 잘 알아듣는 것 같던데. 내가 본 유일한 사람. 박 목사의 글을 이해 한다는... 무척 신기했지...


11. 제 입장에서는 왠만하면 좀 그런 수준에서 벗어나시라는 것입니다

--> 지금 뭐 초등학생이 대학생에게 수준 운운하는 건가?^^
그리고 ‘왠만하면’이 아니라 ‘웬만하면’이오.
내가 말 하지 않았소?^^
글 쓰려면 옆에 국어사전, 맞춤법 책자 두고 쓰라고.........

말 진짜 안 듣는다. 당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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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진 (183.103.29.11)
2010-03-25 11:25:08
그래요 웃으면서 합시다. 즐거운 논쟁을 해야지요.
"그대여 잘 생각해보라 그대가 ‘만든다’라는 규정을 하지 않으면 그대의 어떤 행위도 ‘만든다’가 되지 않으며 신도 그 어떤 것을 만들 수 없으며 신조차도 존재할 수 없게 된다."
님의 글이지요.
님은 신의 존재가 있는지 없는지 증명하지 못했습니다. 맞지요?
혹시 위 글이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명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그렇다면 제가 웃고 넘기지요. 위 글로 신부재를 증명하였다고 생각한다면 기가 막혀 웃지 않을 수가 없지요.

하나님의 천지창조.
님은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했습니다.
혹시 위 글이 그 증명이라고 생각한다면 역시나 웃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규정에 의해 그것이 결정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규정이 없다면 신도 없게 되고 신의 창조도 없게 된다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규정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하나님과 그분의 창조는 실재입니다.
다만 그것을 수용하는 사람 또는 수용되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것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요.

언어가 없다고 행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제 글은 위의 글이 담고 있는 바 때문에 한 이야기입니다.
님은 인지하지 못하는지 모르겠지만 그 말이 그 말이랍니다.
님의 적은 글과 제가 그것에 대해 언어가 없다고 행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같은 의미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 글에 대해 본인이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니요? 역시나 우스운 소리이지요.

님의 관점에서는 문자에 대한 수용이 우습게 보이겠지요?
님과 같은 관점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그럴 것이고요.
그런데 그 관점 자체가 엉터리이거든요.
그러니 우습게 보는 것을 마음에 담을 이유가 없지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이전 글에서 여러차례 밝혔답니다.

님은 정강길님의 비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자신의 글에 적용하여야 합니다.
언어의 사회성을 좀 깊이 묵상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나라에서 요즘 G 세대라는 표현이 생겨났습니다.
누군가가 그 표현을 처음 사용하였을 것입니다.
그가 그 표현을 사용한 것은 그 표현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표현을 사용하여서 그 표현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이 아니고요.
그리고 그 표현을 사회적으로 수용하여서 한 개인의 개인적인 표현으로 그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 누가 그 표현을 처음 사용하였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표현이 개인을 넘어서서 사회적인 가치를 지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표현을 사용하지요.
그런데 누군가가 그 표현이 수용되지 않아서 그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합시다.
그 사람이 그 표현을 수용하지 않고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여서 그 표현의 의의가 없어질까요?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하여서 그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잘못일까요?
님의 논리는 그 표현의 의의가 없이지고 잘못이라는 것이지요.
오직 개인 그리고 그 개인의 선택만이 중요하다는 입장이니까요.
모든 것이 개인의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는 입장이니까요.

제 입장에서는 왠만하면 좀 그런 수준에서 벗어나시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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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3 (122.44.97.59)
2010-03-25 11:24:00
아무도 그를 이길 수 없습니다.
예전에 TV 토론에서 진중권씨가 상대편 수구꼴통 논객에게

"말을 알아듣질 못하니 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라고 했는데,

박창진씨한테도 적용되는듯... 후덜덜...you w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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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mail-x (116.47.191.5)
2010-03-25 10:55:01
박창진 목사의 댓글이 기대되는데?^^ 어쩐지^^
.

박 목사...

툭툭 던지는 식으로 이야기 하면 안 된다니까요.
그러면 마치 처음 보는 사람들은 박 목사가 현대철학이나 과학에 대해서 뭘 좀 알고
글 쓰는지 안다니까.

논리에는 논리로 대응하시오.
단, 이때의 논리란 '5W1H'에 근거한 글을 말 하는 것이오.

초등학생 수준도 안 되는 '개독교 변증론'이나 '조직신학' 수준의 허접한 글 말고...


한성영 선생이 성의를 보였으니 박 목사도 그 정도는 보여야 예의가 아닌가?^^

.

솔직히 궁금한데......

박 목사 당신


조직신학이나 제대로 알고 있소?

.

그냥 궁금해서...

.

참고로 내가 3년 전에 자주 읽었던 책 중 하나가 '벌코프 조직신학'이오.

난 개독들이 조직신학이란 거 왜 만들었는지 모르겠어.
도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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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명 (203.152.168.118)
2010-03-25 10:03:28
박창진님 답글 감사드립니다.
자. 먼저 한 번 웃고 시작합시다. 핫핫핫핫핫핫핫핫
박창진님도 웃으세요. 심각한 표정 짓고 대화를 나누면 몸만 상합니다. 그러니 좀 더 부드럽고 열린 마음으로 대화를 나눠 봅시다.

자, 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는데요.

“님이 자신의 주장의 근거로 제시하는 바에 대해 문제를 삼는 것이지요.즉 그 당대의 생각을 님의 관점으로 마음대로 뒤집어엎는 것을 문제 삼는 것이랍니다.'창조한다.'는 말을 님이 말하는 바와 같이 사용하지 않았는데도 님은 님이 이해하는 바를 앞세워 그 단어를 원 저자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 만든 것을 문제 삼는 것이지요.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십니까?”

예, 저는 이해가 안 됩니다. 당대의 생각을 제가 어떻게 나의 관점으로 뒤집어엎었다는 것인지, ‘창조한다. 는 말을 나는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원 저자의 의도와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는 것인지 님의 글에서 구체적인 언급을 하나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이건 님의 깊은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수준이 높으신 님께서 좀 더 아량을 베푸셔서 쉽게 그리고 차근차근 짚어 가면서 설명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부탁드립니다.

님께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언어가 없으면 그 행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랍니다.언어와 상관없이 행위는 존재하는 것이거든요.다만 그 행위를 어떻게 언어로 표현하느냐의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저는 언어가 없으면 그 행위가 없어지는 거라고 말하지 않았는데 님께서 저의 글을 일방적인 독해로 오해하고 있으시군요. 그리고 말입니다. ‘행위’라는 말도 언어에 의한 규정일 뿐이지 언어에 의해 규정하지 않으면 그건 어떤 의미가 있는 건가요? 자 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다만 그 행위를 어떻게 언어로 표현하느냐의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요.

자 님도 인정하고 계시지 않나요? ‘언어로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래요. 같은 행위라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해석하고 정의하는 사람과 언어에 따라 달라지는 것 맞지요? 저는 그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창조한다. 라는 언어를 유발시킨 어떤 행위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해석하고 받아들이고 어떻게 언어로 규정하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지 그 어떤 것도 고정되고 정해진 것은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한국의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은 자신들만의 해석을 고집하고 있으니 저는 그것을 지적하고 있는 겁니다. 이해가 가십니까?

그리고 말입니다. 님께서는 “행위의 선재가 있었다. 라고 말씀하시는 걸 보니 아마 문자주의자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어떤 행위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나중에 언어로 규정한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싶은 것 같습니다. 다른 분들께서 님에게 “목사님”이라고 호칭하는 것을 보니 목사님이신 것 같은데 그렇다면 신학교에서 충분히 학습을 하고 훈련을 받으신 분 아니십니까? 신학교에서 신학자들이 뭐라고 가르치던 가요? 신화라고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까? 맞죠? 그런데 님께서는 어떤 신학훈련을 받으셨는지 모르시겠지만 구약의 천지창조를 신화가 아닌 사실로서 받아들이고 계시군요. 음. 이런 부분은 아마도 님께서 정보가 없으신 것 같으니 부족한 제가 감히 님에게 조금 설명을 드리려 합니다.

구약의 천지창조는 문자 그대로 여호와 하나님이 유대인들에게 던져준 메시지도 아니요. 그렇다고 고대인들인 관찰한 사실을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구약에 나오는 창조신화, 홍수신화등 많은 신화적인 요소들이 이미 수준 높은 문화를 이루고 있었던 수메르문명의 영향을 받은 신화들입니다. 이런 것은 이미 100여 년 전부터 학자들이 아주 착실하게 연구한 결과물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이미 서구의 신학자들이나 이스라엘학자들도 인정하고 있고요. 또한 이스라엘인들조차도 타나크에 기록된 이야기들을 역사적 사실로서 받아들이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국민도 아닌 한국문자주의 기독교인들이 그것을 사실로서 받아들이고 있으니 이것은 참으로 기묘하고 요상한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마치 한국 사람들은 단군과 관련된 웅녀이야기를 신화로서 받아들이고 있는데 중동의 어느 국가에서 그것을 사실로서 받아들이고 신앙하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아마 우리 한국 사람들은 그들을 신기하고 우습게보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말입니다. 현대과학으로 보자면 전혀 가능성이 없지만, 누군가 이 세상을 창조한 대상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문자주의 기독교가 말하는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어떻게 주장할 수 있습니까? 이미 다른 나라에도 창조신화를 나름대로 다 가지고 있는데요. 서로 자기들만의 창조신화만이 옳다고 주장한다면 싸움밖에 더 하겠습니까? 그러니 문자주의자들이 자신들의 경전에서 말하고 있는 창조신화만이 옳다고 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비웃음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약의 상당부분이 유대인들의 고유한 경전이 아니고 근동지역의 다른 국가들의 수준 높은 신화와 신앙체계, 문학과 전승들을 수용, 계승 ,첨가, 발전시킨 것이고 후대에는 하스몬왕조가 많은 부분 조작까지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설사 여러 신화에서 말하는 창조에 해당하는 행위를 하는 신이 있다 하더라도 인간인 우리가 규정하는 ‘창조’의 의미와 신 스스로가 규정하는 창조의 의미가 다르다면 신은 스스로 인간을 창조하였다고 생각하지만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는 겁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만약 창진님께서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을 겁니다.

“당신이 말을 하고 생각할 수 있는 로봇을 만들었다고 해봅시다. 그런데 그 로봇이 그걸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당신이 그 로봇을 만든 것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이렇게 말이지요.

그러나 이것을 잘 생각해 보십시다. 여기서 ‘로봇, 만든다. 라는 규정은 창진님이 임의로 규정한 것일 뿐이지요. 창진님이 로봇이라는 어떤 정의를 내렸고 님의 해석에 맞는 어떤 것을 만들어 냈다. 그런데 님의 해석에 의해 만들어진 사물은 전혀 다르게 ‘만들다’라는 것을 해석하고 정의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창진님이 만든 로봇이 ‘만들다’라는 정의를 ‘만든다는 것은 내가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럴 때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라고 인식하고 있다면 창진님은 그 로봇에게 만큼은 만든 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 그 로봇을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자가 그를 만든 사람이 될 거에요. 그렇죠? 이렇게 ‘만든다. 라는 것도 창진님의 해석과 창진님이 만든 사물이 인식하는 해석이 일치할 때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창진님이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단지 창진님의 해석일 뿐입니다. 저의 부족한 설명이 이해가 가시는 지요?

그리고 한 가지만 제가 감히 님에게 충고를 드리겠습니다. 님께서

“현대철학의 사유를 아무런 비판 의식 없이 수용하고서는 앵무새처럼 되뇌이는 수준에서 벗어나시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으시지만 단편적으로 툭툭 던지시는 님의 심오한 말씀이 지지를 받으려면 적어도 성의 있는 설명과 글로서 설득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런 점을 님께서 감안해 주시고 저에게 가르침을 베풀어 주시면 감사하겟습니다.

자, 저의 글은 이 정도 하렵니다. 부족한 자가 님에게 감히 입을 열어 죄송합니다. 이에 대해 더 가르쳐 주실 부분이 있으시면 해 주셔도 됩니다. 진리 안에서 항상 평안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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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진 (183.103.29.11)
2010-03-24 12:46:40
행위와 언어의 상관관계
언어가 없으면 그 행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랍니다.
언어와 상관없이 행위는 존재하는 것이거든요.
다만 그 행위를 어떻게 언어로 표현하느냐의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창조한다는 언어가 없으면 창조하는 행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랍니다.
그 언어 규정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무엇인가가 생겨나도록 하는 행위는 존재하고 있는 것이랍니다.
다만 그것을 '창조한다'라고 규정하든지 아니면 다른 어떤 언어로 규정하든지가 뒤따르는데, 인간은 그것을 창조한다로 규정한 것이고요.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의해서 그렇게 규정된 행위가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규정과 상관없이이미 행위가 선재해 있고 그것을 인간들이 서로 통용할 수 있는 언어로 규정하는 것입니다.
순서를 마음대로 뒤바꾸지 마시기를.

현대철학의 사유를 아무런 비판 의식 없이 수용하고서는 앵무새처럼 되뇌이는 수준에서 벗어나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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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진 (183.103.29.11)
2010-03-24 12:31:37
여전히 이해를 못하시네요
그들의 세계관에 대해 수용하느냐 않느냐는 현대인의 몫이 맞습니다.
수용되는 사람- 수용하는 사람-이 있고 수용안되는 사람- 수용안하는 사람-이 있지요.
그것을 시비하는 것이 아니랍니다.

님이 자신의 주장의 근거로 제시하는 바에 대해 문제를 삼는 것이지요.
즉 그 당대의 생각을 님의 관점으로 마음대로 뒤집어엎는 것을 문제삼는 것이랍니다.
'창조한다'는 말을 님이 말하는 바와 같이 사용하지 않았는데도 님은 님이 이해하는 바를 앞세워 그 단어를 원 저자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 만든 것을 문제삼는 것이지요.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되십니까?

님이 님의 입장을 글로 표현했습니다. 거기에는 님의 관점이 반영되어 있지요.
그런데 누군가가 님의 글을 님이 의도한 바와는 전혀 다르게 해석하고 이해하고서는 그 누군가의 관점을 앞세워 틀렸다고 말한다면 님은 수긍하겠습니까?
이제까지의 글을 보면 아마도 다른 누구보다도 더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기 위해 열심이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남의 글에 대해서는 자기 입장을 앞세워 자기 마음대로 평가하고서는 그것을 수용하라고 하고 있고요.

과거의 사람들은 그 시대에서 나름대로 진정성을 가진 삶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현대인들 중의 어떤 이들은 좀 더 발달한 과학 지식을 앞세워서는 자기 마음대로 재단하고 뒤집어 엎기를 예사로 하지요.
현대 철학, 이것이 진정으로 사유의 발전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조차 의문인데, 그것을 앞세워 똑같은 짓 아니 더 심한 짓을 하는 이들을 보면 참참참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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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명 (203.152.169.135)
2010-03-24 11:46:22
사랑 그리고 편지님, 답글입니다.
“모든 것은 인간이 가정한 정의에 의해 존재하고 실체는 없다.” 예, 맞습니다. 그러니 이 말도 부분적으로만 맞습니다. 여기서 더 들어가야 할 단계가 있지만 님께서는 아직 그 단계까지는 이해하지 못하실 것 같아요. 그리고 위의 말은 세상을 실체가 있는 것으로 고집하는 사람들에게 방편(수단)으로서 말하고 있을 뿐, 그런 주장을 고집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님이 인간의 자아, 실존, 죽음 등은 인간의 언어로 규정한 것이지 실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저는 님의 이 말씀과 같은 주장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실상이 있다.’라고 고집하는 사람들의 허상을 깨우기 위해 이 말을 하고 있을 뿐 저는 이런 주장이나 관념을 고집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조차 언어의 상징을 통한 표현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실상이 있다, 라는 관념을 가지고 계신 분들에게는 그것을 깨우는 좋은 수단이 될 수는 있는 것이지요.

사랑 그리고 편지님의 주장은 그러니까 이건가요?
“나는 예수의 부활, 재림을 믿는다. 인간의 자아, 실존 ,죽음 등은 실상이 있는 것이다.”
님께서 이렇게 믿는다 고해서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도 없고 님이 말씀하였듯 님의 사유를 양보하지 않으시겠죠. 그러나 저는 대화를 해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정말 예수가 몸으로 부활한 것이 맞는 것인지. 인간의 자아나, 실존, 죽음이 있는 것인지 말이지요. 제가 앞서 말씀 드렸듯이 몸의 부활이란 꼼꼼히 따져 보면 가능한 것이 아니고, 단지 당시 사람들이 경전을 기술하는 방식이었을 뿐이고, 이런 이적과 기사 등이 포함된 경전기술방식은 다른 종교 경전에도 무수히 드러나는 것인바 우리는 그 경전기술을 문자 그대로 ‘몸이 부활하여 죽음을 극복하였다. 그리고 누군가가 재림하여 천국이 시작된다.’라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문화와 언어관습, 시대상황등을 반영하여 문자 너머로 가리키고 있는 진리를 읽어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깨달음을 말하고 있는 종교들은 당연히 이런 방식으로 자신들의 경전을 이해하고 있고요. 저는 님께서 이런 부분들을 간과하여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시간을 낭비하지 않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있습니다. 자 님께서 이런 부분들을 염두에 두어 주셨으면 합니다.

저도 님과의 대화가 즐거웠습니다. 다른 글에서도 다시 만나길 바랍니다.

그리고 진리안에서 항상 평안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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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명 (203.152.169.135)
2010-03-24 11:42:10
박창진님, 답글 감사합니다.
글은 시대의 세계관을 반영한다고 하셨군요. 예, 그렇죠. 성경은 과거 근동지방 사람들의 기록이고 그것은 당시 그들의 문화, 언어, 상징을 바탕으로 기술되었죠.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고요. 그것은 다른 종교의 경전들도 마찬가지고요. 불경도 그 경전이 작성된 시대의 문화와 언어습관에 기대어서 작성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그것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신화적인 방식을 첨가해서, 그러니까 좀 더 과장되고 재미있고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스토리와 플롯을 통해 진리를 전달하려고 한 것이지요.

아 물론 과거 사람들의 신화가 전부 궁극적 진리를 전하기 위한 것은 아니고 그들이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이었죠. 물론 현재 사람들은 세상을 해석하는데 신화적인 방식보다는 과학을 바탕으로 합리적인 해석을 더 선호하지요. 그러나 불교를 비롯한 몇몇 고등종교는 신화적인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궁극적 진리를 전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이 고대인들의 진리전달방식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였다.”라고 해석하고 있으니, 저는 그 해석이 현대의 관점에서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고 그 사람들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맞는데 세계관이 바뀐 현대 사람들이 왜 고대 사람들의 세계관을 고집해야하는 건가요? 그리고 고대 사람들이 진리를 전달하려는 목적으로 신화적인 방식의 서술을 하였다면 우리는 경전의 기록을 문자그대로가 아니라 진리를 읽어내는 안목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 제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문제가 있는 것인지 단편적인 님의 글 속에서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창조한다”에 대한 나의 헛다리짚기라고 하셨는데, 이런 식의 짧게 툭툭 던지시는 님의 말이 개연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설득력이 없고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자, 제 글을 좀 더 신중하게 읽으시고 님의 주장을 구체적인 논증을 바탕으로 설명해주세요. “글 이해의 기본이 갖추어지지 않았다”라는 과감한 말을 상대에게 던지실 수 있으시려면 좀 더 설득력 있게 설명을 해야 다른 사람들도 공감을 할 것이 아닙니까? 님께서 그렇게 해주신다면 님의 설명에도 성실히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자, 님께서는 히브리적 세계관으로 본다면 “창조한다” 이말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입니까? 님의 설명을 제대로 듣고 싶군요.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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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그리고편지 (59.7.13.27)
2010-03-24 00:03:23
그러니까 한성영님의 주장은...
모든것은 인간이 가정한 정의에 의하여 존제하고 실체는 없다 이거네요^^
제가 잘 이해 했는지 모르지만 님의 글을 읽고 느낀 것이 그거니 어쩔수 없군요^^
또한 제가 님의 글을 통해 불교의 깨달음을 접하게 된것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석가의 깨우침은 가장 <현실적> 이며<현세적> 이고
님이 비판하고 제~발 깨어나기를 바라는 기독교인들이 맹신하는
예수신앙은 <비현실적> 이며 비합리적이라는 것이잖아요^^
저도 기독교인들이 교리적인 것에 같혀서 종교적으로 헛된 것에 매여 거짓 먹사들과
사기꾼들에게 속는 기독교인들이 제~ 발 눈이 뜨이기를 소망합니다.
비록 형식은 다르지만 아마도 님이나 저나 같은 마음이라 봅니다.
물론 님의 수준이 저에 비하면 훨씬 고차원적이고
저는 단순 무식하게 님이 비판하는
그 허구인 예수 십자가 부활 재림에 대하여 전하는 것이고요.

부활논쟁은 성경에도 등장합니다. 이런 부분은 논쟁해봐야 끝이 없겠지요.
님이 다른 종교에도 이러한 스토리는 많다 하십니다. 그렇겠지요.
저는 예수 이야기만 주장하는게 아닙니다. 다만 님이 결국 인간의 자아 실존 죽음등은
인간의 언어로 규정한것이지 실체가 존제하지 않는 허상이다 라고 정의하듯이 저는 실상이다고 신앙하는 것일 뿐이지요^^

님을 설득하려는 것도 없고
님의 신앙과 자유를 억지로 무조건 예수믿어라고 할 생각도 없답니다.
그런다고 님의 현제까지의 사유를 양보하실 리도 없기 때문이지요.

판단은 독자들의 몫이겠지요^^
즐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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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mail-x (116.47.191.5)
2010-03-23 23:31:21
박목사님이 이해 못하는 것이 당연하죠
.
.내가 정강길 선생 팬은 맞소만 그렇다고 해서 한성영씨 팬이 되지 말라는 법이 어디있소?

정강길 선생이나 한성영 선생이나 글로 다툴 수도 있는 것이고 그들 역시 다 옳은 것은 아니지 않소?

내가 정강길 선생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은 오랜 시간 동안 그의 글을 봤고 그의 주장에 많은 부분 동감을 하기에 단순히 내가 친밀하게 느끼는 것 뿐이오. 정강길 선생은 나에 대해서 아마 거의 아는 것이 없을 것이오.

그리고 한성영 선생 같은 경우는 그의 의견에 굳이 반대해야 할 이유를 못 느끼오. 왜냐하면 그의 주장이 다 옳아서가 아니라 개독들에게는 충분한 교육이 될 좋은 글을 쓰고 있기 때문이오.

만약 다른 주제로 토론을 한다면 그와 이런 저런 다른 논쟁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럴 필요를 전혀 못 느끼오.

내가 정강길 선생이나 한성영 선생 둘 다 좋아하면 안 되다는 무슨 법칙이라도 발견하셨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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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진 (115.41.59.127)
2010-03-23 23:01:14
안타깝고 신기하네요
별로 어렵지도 않은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니 말입니다.
현대 철학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네요.

글은 언제나 그 시대의 세계관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님이 위 글에서 비판하고 있는 내용이 적힌 성경은 2000년에서 3400년 이전의 사람들에 의해 기록된 것입니다.
그런 글들을 읽을 때에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그 시대의 세계관으로 그 글들을 읽어야 할까요?
아니면 이 시대의 세계관으로 그 글들을 읽어야 할까요?

이 시대의 세계관으로 읽는다면 굳이 그 당대의 배경이나 히브리적 사고 등을 논할 이유가 없겠지요.
당연히 그 시대의 세계관으로 그 글들을 읽어야지요.

그런 면에서 '창조한다'에 대한 님의 글은 전형적인 헛다리 짚기이고요.
님은 그 단어를 현대 철학의 관점으로 풀이하고 있으니까요.
참 갑갑하지요. 글 이해의 기본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말이니까요.

우습기도 하네요.
정강길님과의 논쟁에서 님을 그렇게도 핍박하던 이들 둘이 여기에서는 아주 친밀한 우군이라도 되는 양 글을 적는 것을 보니요.
그런 인간들이 자기 인격의 됨됨이을 그렇게도 자랑하는 모습에 실소가 나네요.
그런 인격을 가진 이들의 모습에 일희일비하지 않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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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mail-x (116.47.191.5)
2010-03-23 17:30:21
나도 엄청 기대를 하고 있다.
.

한성영님의 글도 기대하지만 글에 대한 개독님들의 댓글이 훨씬 기대된다.

문제는 한성영님의 글을 알아들을 수 있어야 개독들이 제대로 된 댓글을 달텐데...


.

내가 개독들이 보일 반응 몇 가지 예상 해볼까?


1. 야훼와 개독경은 인간의 과학이나 지식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잣대로 그 분을 재려고 하지 마십시오.

2.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야훼가 없다고 생각하도다. 라며 개독경 들먹인다.

3. 횡설수설, 방언을 하면서 "니가 아무리 잘난 척 해도 야훼보다 잘났느냐?"
"누가 뭐라고 해도 야훼는 존재한다." 등의 헛소리를 한다.

.
박창진씨를 비롯한 개독들은 철학자 그리고 현대신학자들이 어떤 입장인지 전혀 모른다.
수박 겉 핥기 수준의 지식 그것도 엉터리 지식만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한성영님의 글을 이해 할 리 만무하다.
그것을 이해할 만한 기초적인 베이스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예수 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헛소리도 모두 개독경을 단순 문자적 해석을 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불교가 뭐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한다고 생각하는 개독들이 대다수인데 결코 안 그렇다.
아래 한성영씨도 이야기 했지만 불교야 말로 가장 현실적이고 실전적인 가르침이다.

법화경 내용 중 '독화살의 비유'로 석존께서 비구들에게 가르침을 준 것이 있다.
이것은 형이상학적 문제들이 인간의 지성으로는 그 사실 여부를 확실하게 논증할 수 없는 관념적인 문제이며, 인간의 일상적 실제 생활에서 삶의 직접적인 문제해결과 무관한 것이므로 이를 경계하신 것이다.

.

예수 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주장이야 말로 사단들이 인간들에게 가장 성공적으로 주입시킨
가르침이며, 지금도 수많은 개독들은 사단의 지배를 받아서 이 교리를 전파하기에 바쁘다.

사단은 개독들이 결코 현명해지거나 깊은 사고를 하게 되거나 많은 지식을 갖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저 할렐루야. 아멘.
예수가 최고야.
예수 외엔 구원이 없다.
예수천국 불신지옥

같은 단순무식하고 아무 생각이 없는 말들만 지껄인다.

그리고 루터, 칼빈 이런 사람들 그만 우려 먹어라.
이 사람들이 예수냐?

이 놈들에게 배울 바에야 정약용, 박지원 선생님 같은 우리 선현들이 100배 1,000배 더 낫다.
루터도 칼빈도 실은 수많은 사람들을 자기 마음대로 죽인 살인귀들 아니냐?

.

여하간 개독들의 반응이 무척이나 궁금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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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바람 (210.2.45.158)
2010-03-23 16:24:16
와우! 댓글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한성영님의 논지에 그냥 빨려 들어갑니다. 글도 잘 쓰시지만 그 논지가 뚜렷하고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해박한 지식에 감탄밖엔...과학분야까지 넘나드는 그의 박식함엔 정말이지 놀랍습니다. 종굘 떠나 이런 해박한 분의 글을 본다는 사실로도 당당이 가지는 가치는 충분합니다.
리런 장을 통하여 여러분들의 다른 분들의 생각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은 여간 귀한 장이 아닐 수 없는 것이죠. 이것이 전 제일 맘에 들고 이런 경지에 있는 분들의 사고를 엿볼 수 있는 장이여서 여간 값진 공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로 기독교 종교 인일테지만 다른 종교의 생각이나 태도를 비교할 수도 있는 좋은 장이라 생각합니다. 양자 이론이 밝혀지기 전인데 석가는 아상이 없는 것까지 통찰할 수 있다는 것은 역시 놀라운 선각자입니다. 전 불교인은 아닙니다만 경전을, 말씀을, 나를 넘어서 진리에 귀의 하라는 그 권면은 참으로 놀라운 탁견인 것으로 여깁니다. 댓글을 읽고 느낀 점을 몇 말씀드렸습니다. 한성영님 건필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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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mail-x (116.47.191.5)
2010-03-23 13:26:56
'이게 다 노무현 탓이다' 가 아닌 야훼 탓이다. 야훼가 혼나야 한다.
.


한성영님은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논조로 대답을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다. 일차원적이며 직접적인 글을 쓰겠다. 왜냐하면 개독들 수준에 맞춰서 글을 써야 된다는 것이 내 지론이기 때문이다.

‘점투(..)’닉의 글을 내 방식대로 까겠다.

숫자는 점투, 화살표는 도끼다.


1. 한성영님, 성실한 답변에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언어의 범주에 가두어 놓을 수 없는 분이지요. 그 분의 존재나 부재도 언어와 논리의 희롱으로 증명할 수 없고요. 그렇다면 불가지론이 가장 진실하고 겸손한 태도이지요. 증명불가능하기 때문에 있다 없다 할수 없으면 모른다는 대답-인정하신대로-이 가장 솔직하다는 거지요.

→ 점투님, 성실한 답변에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代 : 알라, 제우스, 시바, 오리리스, 디오니소스, 천조태신, 환인, 선문대할망, 트롤, 산타클로스 등)은 언어의 범주에 가두어 놓을 수 없는 분이지요. 그 분의 존재나 부재도 언어와 논리의 희롱으로 증명할 수 없고요. 그렇다면 불가지론이 가장 진실하고 겸손한 태도이지요. 증명불가능하기 때문에 있다 없다 할수 없으면 모른다는 대답-인정하신대로-이 가장 솔직하다는 거지요.

→ 야훼 대신에 뭘 집어넣어도 된다. 버틀런트 러셀이 말한대로 우주를 날아다니는 ‘물주전자’를 야훼 대신 집어넣어도 결과는 똑같다. 한 마디로 저런 식으로 주장하는 놈들은 저능아들이다.


2. 과학적 가설들에 상당히 신뢰를 두시지만 과학적 가설들도 언제나 변하는 것 아니던가요?
→ 과학적 가설들은 당연히 변한다. 과학적 법칙조차 변하는 경우가 있다.-특수한 상황에서- 우리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현재 귀속되어 있는 모든 지식과 과학적 사실 그리고 논리 등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 당연히 이러한 것들은 변할 것들은 변하고 첨가될 것들은 첨가되고 빠질 것들은 빠져서 또 다른 법칙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다.

→ 이런 글을 쓰는 개독들이 원하는 주장이 있다. 과학적 법칙조차 변하지만 단 한 가지 변하지 않는 것은 야훼라는 것이다. 이것도 말이 전혀 안 되는 것이, 도끼가 말하기를 “과학적 법칙조차 완전하지 못해 변하지만 내 주님이신 ‘깐따삐야’ 신께서는 결코 변하지 않는 완벽한 전지전능의 존재이십니다.” 라고 말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 원래 개독들은 주장만 하지 아무런 근거가 없다. 이것이 개독의 가장 큰 특징이다. 터툴리안도, 토마스 아 켐피스도 그 어느 개독도 야훼의 실존을 증명하지 못해서 ‘그냥 믿으련다’라고 말했을 뿐이다. 그러면 그냥 지네들끼리 아랑서 쳐 믿어야 할 것이 아닌가? 왜 안 믿는 사람 괴롭히고 짜증나게 하는가 말이다. 온갖 저주 다 퍼부으면서.


3. 그리고 불교인들이나 힌두교인들이나 이슬람교인들이나 유대교인들이나 다 자신이 믿는 대상을 절대자로 신앙하며 포기하지 않는데 기독교인들에게만 유독 그 절대신앙을 내려놓으라는 이유가 뭔가요?

→ 그 이유를 정말 몰라서 묻는거냐? 그럼 너희들은 왜 그 힌두교도 있고, 이슬람교도 있고, 유대교도 있고 불교도 있는데 왜 유독 개독교를 믿냐? 엉? 멍청한 것들아?

→ 어떤 개독들은 이렇게 묻더라. “왜 도끼 너는 다른 종교는 안티 안하고 개독교만 안티하느냐?” 내가 답했지. “난 원래 한 놈만 패.” “죽을 때까지~!”
도끼에게 왜 개독교만 안티하느냐고 묻는 것은 내가 너희 개독들에게 그 많은 종교 중에 왜 하필 개독교를 믿느냐고 묻는 것과 논리적으로는 완벽하게 똑같아. 하긴 너희 개독들이 논리를 알겠냐?


4. 기독교의 절대주의적 신관과 전투적 선교가 많은 폐해를 가져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참된 기독교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희생적 사랑을 강조하지 못하고 교회가 권력화 세속화된 것의 문제라고 봅니다.

→ 결국 다 니네들 잘못이라는 거네? 2,000년 동안 이렇게 잘못되어 온 것이라면 앞으로도 잘 될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것 아니냐? 너희들 개독들은 역사의 개념조차 이해 못 하지? 앞으로 시간이 흘러가도 그 먼 미래에도 너희들은 바뀔 수가 없어. 개독경 자체가 폭력적이잖아? 너희 개독들은 절대 인정 안 하지만 그렇다고 폭력적인 개독경이 시집처럼 우아하고 아름답게 변하는 것은 아니다.


5. 물론 님께서는 그것조차 부인하고 영지주의적 해석을 믿고 주장하지만.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처럼 하나님이 인류에게 봉사하는 모습이 어디에 있나 싶습니다."

→ 영지주의적 해석이건 또 다른 해석이건 지금 개독교 주류 해석이건 어떤 것이 옳은지는 아무도 모른다. 주류가 주장하면 그게 진리가 되냐?

→ 그리고 십자가에 나타난 구속에 대해서 뭐 대단한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나 이거 진짜 웃기더라~!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꼴까닥 갔잖아? 그러면 뭐라도 지가 잘못을 했으니까 죽은거지 거기에 무슨 의미를 부여하고 신성화 하느냐 말이다.

→ 백번을 양보해서 예수의 죽음이 위대하다고 쳐. 인류사를 통틀어 예수 보다 나은 인간은 수두룩했다. 자신이 믿는 올바른 신념을 위해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자기 한 몸 바친 훌륭한 분들이 얼마나 많냐? 이 분들이 예수보다 못하냐? 예수는 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왔다고 구라를 치고는 지 민족인 유대인도 2,000년이 지난 지금도 구원 못하고 있지 않냐?

→ 그리고 내 죄를 대신해서 예수가 죽었다고 구라 좀 치지마라. 완전히 죽었다면 또 불쌍해서 믿어주기라도 할 텐데 3일 만에 왜 죽은 놈이 도로 살아서 무덤을 기어나오냐고? 그렇게 부활의 능력이 있는 놈이 뭐 그리 죽음이 두려웠겠냐? 그 정도 능력이 있으면 나는 100번 쯤 전 인류가 아니라 전 지구상의 생명을 대속해서 죽었다고 하겠다. 그리고 인간 뿐 아니라 원숭이 돌고래 개 말 소 토끼 등도 나를 경배하게 하겠다.

→ 빵이 단 하나 밖에 없는데 그 빵을 내게 주고 자기는 정말 죽은 놈이 고귀한 거지, 빵을 1개 가지고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 주고는 다시 빵을 얼마든지 만들어 먹을 수 있는 놈이 어찌 고귀한 놈이냐? 이런 점으로 보면 예수는 살신성인한 수많은 사람들보다 훨씬 못한 놈이다.

→ 그래. 예수가 원래 정말 신이라고 쳐. ‘야훼 = 예수’ 라고 치자고. 원래부터 모든 것이 가능해서 목숨도 마음대로 죽었다 살았다 할 수 있는 놈이 십자가에 매달려서 좀 고생한 것이 뭐 그리 대단하냐 말이다.

→ 개독들 너희들은 돌대가리라서 이해가 안 될 테니 쉽게 예를 들어 줄게. 박창진이 재산이 딱 5억이 있어. 근데 박 목사가 이 돈으로 주식을 해서 홀랑 다 까먹었어. 그래서 집도 나머지 재산도 다 넘어가고 가족 모두 거리로 나와 앉았다. 이 때 스트레스 엄청 받겠지?
근데 박창진에게 누가 또 5억을 그냥 줬어. 주식하라고. 그래서 했어. 또 말아먹었어. 그런데 또 5억을 그 사람이 줬어. 또 주식해서 말아먹었어. 또 줬어. 또 말아먹었어. 자... 자꾸 반복했어. 스트레스 받을 것 같아?

→ 정말 야훼의 목숨이 한정이 있다면 인간을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십자가에 박혔다면 그건 어느 정도 인정할 만 해. 하지만 목숨이 고무줄보다 더 긴 놈이고 원래 목이 1,000개 10,000개 라도 되는 놈이 십자가에 좀 박혔기로서니 그게 뭐 그리 대단해? 그게 경배하고 울고불고 할 일인가? 난 도무지 니네들이 이해가 안 돼.

→ 야훼에게 내 말 전해라. ‘제발 공치사 좀 하지 마라. 자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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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명 (203.152.165.139)
2010-03-23 13:02:41
독자3님 안연하세요. 반갑습니다.
박창님의 글을 검색해보라고요?
ㅎㅎㅎㅎ 알겟습니다. 님의 충고도 받아드리겟습니다.

그런데 전에 제글에 댓글을 남기셨던 독자님이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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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명 (203.152.165.139)
2010-03-23 13:00:31
자유인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침묵과 섬김, 가장 높은 경지이지요.

예, 그것을 향해 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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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명 (203.152.165.139)
2010-03-23 12:58:45
사랑그리고 편지님 답변입니다.
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과연 부처는 같은 사람으로서 경이로운 지경까지 터득한것 같습니다. 참 매력적이고 보편적으로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수긍할 수 밖에 없겠네요^^ 하지만 제가 읽기에는 왠지 허망하고 결국 부처 역시 스스로도 죽음에 대하여 모른다는 말로 들립니다. 자기가 많은 삼라만상을 깨달았지만 죽음의 실체에 대하여는 모른다는 것이고 결국 그도 역시죽음에 대하여 자신 없는것이기에 죽음이 '없다' 고 말하고 역시 죽었지요.
죽음의 두려움을 피하기 위하여 없다고 가정한것이고 그것을 긍정하는 것입니다.
죽음은 긍정이 아니지요. 부처는 모든것을 긍정으로 이해한것 같아 보입니다.
예수는 긍정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부정으로긍정을 밝혔습니다. 죽음을 몸소 당하심으로 죽음의 실체를 증명하셨고 다시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임 당하시기 전에 친구 나사로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내 친구 나사로가 잔다" 하였으며 깨우러 가자 하셨지요.

자. 부처는 죽음 따위는 없다 하였고 결국 죽었지만(영혼이 없다는 것이지요)
예수는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잠든 자를 깨우러 가자 하시지요.
종교는 있는 그대로를 긍정하며 살자는 것이고 예수는 여기가 전부가 아니라 곧 다른 세계가 올것이다를 말합니다. 죽음 그 너머가 있다고 준비하라고 말하지만 종교는 여기서 바르게 살면 그만 아닌가 합니다.
선택은 각자의 몫입니다^^ 깨달음 너머 무와 공과 허상 저 너머에 분명한 세상이 준비되었다고 합니다. 무지한 자들 맹신자들이 좋아할 내용이겠지요^^
님은 신은 허구다 하면서 결국 님 자신의 관념과 사유를 확신하고 있는 것이고
저는 예수를 신앙하고 있는 것이지요^^"


부처가 죽음이 없다고 하는 것이 허망하고 부처 역시 죽음이후를 모르기 때문에 두려움을 피하기 위해 없다고 가정한 것이라는 말씀이시지요? 그런데 예수는 죽음을 극복하고 부활했으니 더 긍정적이고 희망적이다. 그리고 나사로의 비유를 드셨군요. 죽음은 잠이다. 나사로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것이다. 그러니 깨우러 가자.

자, 지난번에 이부분에 대해서는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죽은 자를 살리고 병자를 고치고 이적을 보이고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한다는 스토리 구조는 예수이야기에만 나오는 내용이 아니라 이미 앞서시기에 있었던 고대고등종교의 신인들의 이야기에도 나오는 것이구요. 아시아지역의 다른 종교에도 유사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것을 가지고 기독교 경전의 내용만이 옳은 것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말입니다. 영지주의 기독교에서는 예수의 부활이야기는 육체의 부활이 아니다. 부활이란 무명속에 있던 자가 깨달음을 통해 깨어나는 것 그것을 부활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이 정도 설명하지요.

그리고 부처의 말과 저의 말을 님께서는 아직 이해를 못하고 계십니다.

죽음이란 인간이 정의한 설정일뿐입니다. 그리고 그 설정에 따라 삶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집착하니 죽음이 두려운 것이지요. 인간 스스로가 설정한 삶이라는 것에 집착하고 그것을 계속 이어가고 싶은 열망 때문에 죽음이 두렵고 죽음이후를 걱정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면서 지금 이 순간을 오롯이 살지 못하고 후일을 걱정하며 전정긍긍하며 살고 있는 것이고요.

그러나 부처는 삶과 죽음의 실상을 바로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문자주의 기독교가 예수의 이야기를 오해해서 실제로 죽음이후에 몸이 다시 부활한다는 설정을 하였는데요. 자, 그러면 죽음 이후에 다시 몸이 부활한다면 몇 살의 상태로 부활하는 겁니까? 유년기? 십대? 청년기? 중년기? 노년기? 아니면 죽기 직전 상태로 몸이 다시 부활하는 겁니까? 전혀 새로운상태로 부활한다고 해도 그것이 님께서 죽기전에 가지고 있던 기억과 습관 몸의 상태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부활하는 겁니까? 아니면 부활하면 나쁜 기억과 습관은 전부 저절로 고쳐진 상태로 부활하는 겁니까?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애초에 나쁜 기억과 습관을 만들지 않도록 설계해서 인간을 만들지 않고 이런 이상한 과정을 거치는 건가요? 이상하지 않나요?

그리고 부활하기 전에 기억이나 습관, 정체성과는 다른 상태로 부활한다면 부활이전의 님과 부활이후의 님이 어떻게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전혀 다른 개체이지요. 않 그렇습니까? 부활이전의 정체성과 부활이후의 정체성이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전혀 별개의 개체일 수 밖에 없구요. 또한 정체성이 이어진다면 습관이나 기억등이 교정되지 않았다는 말인데, 그러한 정체성으로 어떻게 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까? 그리고 습관과 기억이 수행하지 않고도 신의 능력으로 고쳐질 수 있다면 애초에 인간을 만들 때부터 잘못된 습관에 물들지 않도록 설계할 수 있었다는 것인데 이건 무슨 인간가지고 장난질을 치는 겁니까? 이것은 모순이지요.

님께서는 무와 공, 허상너머 세상이 존재한다고 하시는데 고통도 배고픔도 불안과 공포도, 죽음도 없고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행복하고 즐거운 삶을 사는 어떤 파라다이스를 꿈꾸고 계시는 지 모르겠습니다만 만약 님께서 그런 세상에 가신다면 아마 지루해서 죽게될 것입니다. 행복한 삶의 모습은 불행한 삶의 모습이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상대적인 것이고, 즐거운 삶의 모습은 불쾌한 삶의 모습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상대적인 것입니다. 또한 각자각자의 상태나 해석에 따라 행복과 즐거움도 다 다른 것이지 행복이나 즐거움이라는 고정되고 표준적인 삶의 모습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분리되고 이분법적인 상태의 개체로서 자신을 받아들이는 한 인간의 삶에 행복과 불행, 즐거움과 고통은 끊임없이 반복되어질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끊임없는 지루함만이 계속되어질 겁니다. 지루함을 없애기 위해서도 인간은 일부러 고통과 불행을 초래하기도 할 겁니다.

부처는 이러한 검증할 수 없는 인간의 상상력에 기댄 파라다이스를 이야기하지 않고 가장 현실적이고 검증가능하며 실체적인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님께서 스스로를 독립된 개체라고 인식하고 있는 님 자신은 실은 여러 가지 조건의 결합일뿐이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은 현대 과학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자아라고 여기고 있는 것은 실은 연합한 세포들이 그 씨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라는 것이지요. 즉 뇌라고 하는 기관의 종합적 해석패턴의 산물이 자아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님께서 스스로를 자아라고 받아들이고 계신 정체성은 단지 세포씨스템인 감각기관과 해마의 정서나 느낌등의 기억, 호르몬들의 패턴화된 습관들로 이루어진 것이고 상태나 조건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지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고정된 자아가 없을 뿐만아니라 그것은 단지 여러 가지 조건들의 결합일 뿐이고 조건이 사라지면 함께 사라지는 하나의 현상인데 어떻게 님이 부활한다는 말입니까? 사건으로서의 님이 부활한다면 이것은 마치 시드니 동계올림픽이벤트가 독립된 실체가 있어서 다시 부활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시드니 동계올림픽이 다시 개최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또 다른 사건일 뿐이지 2010년의 동계올림픽이 고스란히 부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부활이라는 말 자체가 모순인 겁니다. 부활이라는 말 자체가 소통을 위한 인간의 언어적 정의일 뿐이고 부활이라 정의한 개념은 단지 인간의 상상력의 산물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상상력 또한 기독교만의 전유물이 아니고 여러 나라와 지역의 신화속에 면면히 내려온 문화입니다.

그러니 부처가 말한대로 고정되고 독립된 자아란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것을 현대과학은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제가 ‘신은 허구다’라는 저의 관념과 사유를 확신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전능한 대상으로서의 신의 존재를 확신하고 계신분들을 위해서 그것의 허구성을 방편(수단)을 통해 보여 드리고 있는 것 뿐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신은 허구다. 아니다.’ 라고 입을 벌려 주장하는 것 조차 의미가 없습니다. 이것마저 그저 언어라는 허구적 상징을 통한 설명이기 때문에 고정된 실체가 없는 말이기 때문이지요.

자, 사랑그리고 편지님 이러한 주장과 언어를 하지 않는다면, 사유너머에 무엇이 있습니까?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말씀해 보세요. 무엇이 있습니까? 예수고 신이고 그런 잡다한 생각들을 내려 놓아 보세요. 그러면 님에게 남는 것이 무엇입니까? 님은 실제 무엇입니까? 지금 이순간 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즉시 답을 해보세요. 답을 해보세요. 답을 해보세요. 생각너머로 답을 해보세요. 무엇입니까?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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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3 (122.44.97.59)
2010-03-23 11:35:26
우명님, 죄송한 말씀이지만...
저 밑에 박창진이라는 분이 쓰는 글은 원래 알아듣기가 힘듭니다. 자신도 자기가 무슨 말 하는지 모르시는것 같아요...시간이 아주 많으시면 그 분 글 검색해서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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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명 (203.152.165.139)
2010-03-23 11:21:38
Ismail-x님 안녕하세요.^^
칭찬과 격려감사드리고요. 님의지지 또한 감사드립니다.

자, 지난번 님의 충고대로 띄어쓰기, 문단나누기를 제대로 하려고 하는데 잘 되고 있는 것 같은가요? 또 부족한 점이 있으시면 지적해 주세요. 그러면 고쳐 보겟습니다.

그러면 님께서 말씀해주신 것처럼 우린 친구가 된건가요?

자, 우리, 제대로 친구해봅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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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명 (203.152.165.139)
2010-03-23 11:13:27
박창진님, 답변입니다.
박창진님,죄송하군요.

님의 말씀의 요지가 잘 잡히지 않습니다. 물론 이건 제가 부족해서 그렇구요.
그러니 좀 더 님의 논지를 구체적이고 쉽게 다듬어서 설명해주셨으면 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질문과 충고가 있으시면 또 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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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명 (203.152.165.139)
2010-03-23 11:06:49
더블포인트님(Ismail-x님의 표현을 빌렸습니다.)^^
"한성영님, 성실한 답변에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언어의 범주에 가두어 놓을 수 없는 분이지요. 그 분의 존재나 부재도 언어와 논리의 희롱으로 증명할 수 없고요. 그렇다면 불가지론이 가장 진실하고 겸손한 태도이지요. 증명불가능하기 때문에 있다 없다 할수 없으면 모른다는 대답-인정하신대로-이 가장 솔직하다는 거지요.
과학적 가설들에 상당히 신뢰를 두시지만 과학적 가설들도 언제나 변하는 것 아니던가요?
그리고 불교인들이나 힌두교인들이나 이슬람교인들이나 유대교인들이나 다 자신이 믿는 대상을 절대자로 신앙하며 포기하지 않는데 기독교인들에게만 유독 그 절대신앙을 내려놓으라는 이유가 뭔가요? 기독교의 절대주의적 신관과 전투적 선교가 많은 폐해를 가져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참된 기독교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희생적 사랑을 강조하지 못하고 교회가 권력화 세속화된 것의 문제라고 봅니다. 물론 님께서는 그것 조차 부인하고 영지주의적 해석을 믿고 주장하지만.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처럼 하나님이 인류에게 봉사하는 모습이 어디에 있나 싶습니다."



먼저 님의 이 답변

"그러니까 하나님은 언어의 범주에 가두어 놓을 수 없는 분이지요. 그 분의 존재나 부재도 언어와 논리의 희롱으로 증명할 수 없고요. 그렇다면 불가지론이 가장 진실하고 겸손한 태도이지요. 증명불가능하기 때문에 있다 없다 할수 없으면 모른다는 대답-인정하신대로-이 가장 솔직하다는 거지요."에 대해 답을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나 부재도 증명할 수 없으니 모른다. 님께서는 이 말을 어떻게 사용하시고 계신 것인지요? 모른다는 것은 글자 그대로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르는 채로 두어야지요. 그런데 님께서는 전혀 엉뚱한 해석을 하시고 계신 겁니다. 님의 해석은 정확하게 하면“하나님은 존재하는데 인간이 존재, 부존재를 증명할 수 없을 뿐이다.” 이것이지요.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로 말씀하시는 것이지 하나님의 존재, 부존재를 논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존재. 부 존재를 증명할 수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로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이것은 모순이지요.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모르지만 존재한다.” 이게 말이 되나요?

그러니까 님의 이 말씀은 하나님의 존재, 부존재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불가지론은 글자 그대로 불가지론입니다. “하나님은 존재하지만 인간이 알 수 없다”가 아닌 겁니다. 또 제가 드리는 말씀은 불가지론이니 뭐니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가지론이니 뭐니 하는 말은 소크라테스 같은 철학자들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자들이 떠드는 말일 뿐입니다. 저의 말은 하나님이나 그 어느 것이든 실상은 모른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언어로서 설명하려드는 것은 다만 인간의 관찰과 시각, 언어와 사고라는 도구로서 인위적으로 설정한 것일뿐 인간이 어떤 대상을 설정하고 설명하려 드는 것 모두가 실은 알 수 없는 것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원래 실체가 있는 것인데 알 수 없는 것들이라는 말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알 수 없는 것들이며 “알 수 없는 것들”이라는 말도 인간의 언어에 의한 설명일 뿐이지요. 그러면 설명하지 않으면, 그러면 무엇이 있습니까? 바로 이 단계를 넘으셔야 님은 제가 한 말을 이해하시게 될 겁니다.

예, 님의 말씀대로 과학적 가설들도 변하는 것이지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소크라테스나 불교에서 말하려는 바이구요, 모든 것은 변한다. 고정된 것은 하나도 없다. 다른 종교도 자신의 종교의 절대를 주장하며 내려놓지 않는데 왜 기독교만 내려 놓으라고 하는가? 이 말씀은 이렇게 답해드리지요. 왜 다른 종교는 자신의 절대성을 강요하지 않는데 기독교는 자신의 절대성을 남에게 강요하고 모두를 이단으로 규정하는가? 바로 여기에 답이 있지요. 그 모든 종교 중에서 기독교의 독선이 가장 크니까요. 특히 한국의 개신교는 유별나지요, 그리고 자신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종교가 있다면 그것 또한 짚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님께서 어떤 신앙을 가지시던 그것은 물론 님의 자유입니다. 그리고 제가 이렇게 떠들고 있는 것도 저의 자유이지요. 그러나 저는 이제는 닫혀있고 좁은 시각으로만 보지말고 좀 더 열린 마음으로 여러분들이 믿고 있는 신앙을 바라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인류에게 봉사한 모습이라? 님께서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을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제가 이 부분은 사랑그리고 편지님과의 대화에서 말씀드렸지만 예수스토리의 큰 줄기, 그러니까 동정녀 탄생, 동방박사들과의 만남, 포도주사건, 무화과 사건, 병자를 고치고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일, 물위를 걸은 사건, 제자들과 떡과 포도주를 나누는 일, 십자가 죽음, 부활등은 문자주의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수이야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보다 먼저 있었던 많은 미스테리아 신인(티모시 프리크와 피터 캔디의 표현을 빌리자면)들도 이와 같은 스토리 구조속에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문자주의 기독교만이 그것을 독점하고 있다고 말씀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과 같은 신이 이 땅에 내려왔다는 종교적 표현은 다른 많은 종교들에서도 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단군신화에도 환인의 아들 환웅이 이 땅에 내려와 인간이 된 곰과 결혼하여 단군을 낳아 광명개천, 홍익인간, 재세이화를 펼치는 봉사를 했구요. 대순진리교와 증산도의 교주 증산 강일순은 하나님으로서 이땅에 와서 후천개벽을 열기 위해 천지시공을 마치시고 다시 하늘로 돌아가시는 봉사를 했구요. 안상홍증인회는 안상홍이라는 하나님이 이땅에 직접오셔셔 가르침을 펼치시다 가셨습니다. 이런 표현을 진실이라고 받아들이신다면어떻게 문자주의 기독교의 하나님만이 진실이고 나머지는 틀닌 것이라고 할 수 있겟습니까?

질문과 답변 감사드리고요. 자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또 질문이 있으시면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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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명 (203.152.165.139)
2010-03-23 10:03:00
우와!, 댓글이 많이 달렸군요,^^
여러분 안녕하세요.
댓글을 많이 달아 주셨군요. 여러분 모두의 충고와 격려에 감사드립니다.
자 자 ,천천히들 가보시자구요. 우리..

좀 더 열린 마음으로 서로를 존중하면서 대화를 해보라고 당당뉴스이하 운영진여러분들이
판을 깔아 주셨는데 이런 기회를 잘 살려보자구요. 자신의 생각만 옳다고 무조건 주장하지말고 자신의 생각이 왜 옳은 것인지, 잘못된 것은 없는 것인지 점검해보면서 합리적인 근거와
타당한 논거로서 서로를 설득할 건 설득하고 받아들여야 할것들은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서로를 더 이해하게되고 신앙의 성숙이 이루어지지 않겟습니까? 제가 바라는 것도 그것이구요.
성숙한 신앙이 이루어 지지 않으면 자신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하고 그 힘으로 타인도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없기에 이렇게 글을 올리는겁니다.

그러니 대화하다가 에너지 다 소비하고 서로에게 적개심을 키우면 성숙은 커녕 마음이 상해서
병을 키울 수도 있습니다. 자, 좀 더 냉철하고 그리스도의 도를 따라가는 사람들 답게 포용력과 인내심, 관용을 가지고 대화를 해 가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정해진 상대에게 하는 충고도 좀 더 릴렉스하게 하면 더 큰 힘을 발휘할 것 같습니다.
자, 그러면 한 분 한 분에게 답을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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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자 (222.119.83.166)
2010-03-23 08:53:16
내 손이 다 비워질 그 날까지..
'평안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경멸이 우리 가운데 넘치나이다.'

이 말을 남기는 자는 구원의 자유를 못 누리는 자인가!

논쟁하면 자유를 누릴까?

침묵하게 될 그날까지..

섬김만이 증명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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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진 (115.41.59.127)
2010-03-23 08:07:03
장고 후에 악수의 전형
바둑에서 사용되는 말입니다.

위 글은 전형적으로 여기에 해당됩니다.

사람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하나님이 배제된 자기 공부에 깊이 빠져서 그 내용에 온 마음을 빼앗기고서는 그것이 전부인 양 생각하고서 자기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찾아오시는 것이 없으면 대책이 없습니다.
자신이 많이 공부했고 나름대로 깨달음을 가지고 생각을 바르게 정리하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당대의 최고의 학문을 소유하였던 사울이 그것을 전부로 생각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일에 최전선에서 온 힘을 다하였지요.
그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만나주시고 이후에 하늘로 올림을 받아 하늘의 비밀을 알게 되자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현대 철학...
사울과 같은 자리에 있는 이들을 죽이는 무서운 인간적 논리이지요.
그 안에서는 그 독성을 결코 알 수 없는 교묘함을 지닌.
공중 권세 잡은 자의 지배 아래 있는 인간들.
네 마음대로 살아라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지배로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도록 하는 사탄에게 사로잡혀 사는 사람들.
그 최전선에 활용되는 도구가 오늘날은 현대 철학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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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진 (115.41.59.127)
2010-03-23 07:56:40
못 읽으신 듯 하여서
'예수의 정체를 밝힌다'에 적었던 댓글입니다.
못 읽으신 듯 하여서 이렇게 옮깁니다.

뭔가 좀 있는 것처럼 보이기는 한데...
자기 철학에 빠져서 그 안에서 허우적대고 있다고 여겨지네요.

하나님께서 역사를 통해 계시하신다.
이 표현이 인간의 역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에 의해 발생한 일이라는 뜻이 아니거늘.
"한국전쟁은 한국기독교인들에게는 슬프고 비극적인 하나님의 계시이지만 오히려 일본인들에게는 무너진 국가경제를 다시 일으켜 세울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복된 계시가 아닌가?"라니...
자연 재해를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하는 이들의 사고에 대한 비판으로야 괜찮은 예시일 수 있겠지만...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신다는 말 뜻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있구만요.

예수님이 유대 농민 견유철학자이다...
그렇게 볼 수도 있지요.
그런데 왠만하면 자신이 읽은 글만이 예수님에 대한 연구의 전부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시기를.
N.T. 라이트의 '예수와 하나님의 승리'(크리스챤다이제스트) 정도는 읽고서 글을 적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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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그리고편지 (59.7.13.27)
2010-03-23 04:08:33
Ismail-x 씨는 좀 빠져 주시구료~
마음에 가득한 것이 입 밖으로 나온다오.
님이나 한성영이나 각자 믿는 신념을 인정해주자는 의미로다가 기독교를 까데는것 아니겄오?
나야 님이 그리 열라게 까데는 개독이니 기독교와는 일치감치 이별했으니가 뭔소릴 하던 신경 안쓴다오^^

그러니까 댁은 좀 끼어들지 마시오.
아직 혈기 방장하신가 본데...
댁도 어지간히 세월좀 가면 힘빠져서
새롭게 고민하게 될 날이 온다는거 하나만 기억하시면 아마도 유익할것이오^^

한성영씨는 부활에 대하여 그런식으로 나불대지는 않더이다.
적어도 댁처럼 그렇게 거품은 안물고 합니다만^^
댁의 거시기 정도만 누리고 그것이 시들할 때가 오면 어쩔라고 그러시오?
다 한때더이다^^*

참 재미나는 사람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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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mail-x (116.47.191.5)
2010-03-23 00:12:28
사랑편지가 겸손한 것은 단 하나, 자신이 한성영씨보다 수준 미달이라는 것을 알고 있군.
.

한성영 씨가 좀 번잡하게 쓰긴 했어도 전하려고 하는 바를 어느 정도 전했지만 도무지

개독들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수준 미달 맞는데, 한참 미달이오.


예수가 뭘 근거로 죽음을 이겼다고 하는 것이오?
부활한 놈들이 한 두 놈이오?
내 거시기도 매일 아침 부활하오.
그럼 내 거시기가 예수보다 더 낫다는 증거 아니오?


석존이 무엇을 깨달아 생사를 뛰어넘었는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예수 같은 구라쟁이는
아니오.

내가 개독들에게 질문했지.
죽은 다음에 천국 가면 뭐 하냐고?

어떤 놈들은 천국의 꽃밭에서 뛰어논다고 하고, 예수님 옆에서 항상 기쁘게 경배하고
찬양한다고 그러고, 어떤 놈들은 요한계시록 들먹이면서 보석으로 치장된 아름다운 곳에서
매일 행복하게 산다고 그러고 하여튼 100놈이면 100놈, 1,000놈이면 1,000놈 다 천국에
대해서 다른 이야기를 한다.
왜냐하면 한 놈도 가 본 적이 없거든.

내가 또 질문했지.

살아서 교회에 노예처럼 묶여 매주 매일 찬송하고 헌금하고 교회 일을 뼈 빠지게 하고
이제 죽어서 천국에 갔는데 또 거기서 모여 예수 옆에서 찬송하고 그런 삶이 행복하냐고?

어떤 놈들은 천국에서의 감정은 우리가 살아있을 때 가장 기쁜 마음의 상태가 지속되는 것을
말한다고 하더군.

이 색희는 인간의 감정은 상대적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놈이다.
이 놈이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조금이라도 있는 놈이라면 이런 소리 못한다.

높다는 것은 낮은 것이 존재해서 높은 것이고, 배고픔은 배부름이 존재해서 알 수 있는
것이며, 슬픔은 기쁨이 존재하기에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다.

이처럼 어떤 감정이 항상 그렇게 계속 된다면 그것은 결코 그러한 감정으로 불릴 수 없다.

인간의 희노애락과 칠정은 항상 변하는 것이다. 그 변화와 변화 속에 일정한 규율이 있고
법칙이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도 인간의 감정도 인간을 둘러싼 외부도 항상 변한다. 잠시도 그 변화를 멈추는 법이
없다.

불교에서는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한다. 단 한가지 변하지 않는 유일한 것은
'모든 것은 변한다'는 그 사실 자체다.

나는 불교에 대해서 고민을 했을 때는 내가 정말 내가 가진 모든 지식과 사고를 다 동원해서
이해를 해야 하는 그런 문제일 경우였다.

하지만 기독교에 대한 고민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기독교에 대한 나의 고민은 초등학교 수준을 넘어 본 적이 없다.
따라서 개독들에게 나는 항상 초등학교 수준의 질문만 한다.

어떤 개독도-자유주의, 현대 신학자들 제외-특히 보수주의 개독들은 단 한 마리도
기독교와 바이블 그리고 예수에 대한 초등학교 수준의 질문에 단 한 번도 제대로
대답한 적이 없었다. 지금도 물론 마찬가지다.

터툴리안이 고백했듯이 '말이 안 되기 때문에 믿는다' 딱 이거다.
이 놈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믿는 것-곧 신앙-일 뿐이지 아무런 근거가 없다.


예수의 부활의 뭐 그리 대단한 것인줄 아느냐?
예수는 내 거시기 보다 더 못한 놈이다.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은 아무도 증명하지 못하지만 내 거시기는 날마다 증거한다.

너희들은 내 거시기 보다도 덜 떨어진 예수에게 예배하면서 뭐가 잘났다고 이리
야단법석을 떠느냐?


그리고 한성영씨는 원글은 좀 정리해서 쓰는 것 같은데 댓글은 대충대충 쓰는 것 같다.
안 그래도 머리 나쁜 개독들 전혀 못 알아 먹소.


읽는 개독들 수준도 좀 생각하고 글 쓰시오.

.

그럼 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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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그리고편지 (59.7.13.27)
2010-03-22 23:28:41
죽음이란 실체가 없다 하셨군요^^
한성영님 참 대단하십니다.
님의 박학다식함에 절로 머리가 숙여집니다. 님의 지식과 다양한 논리에 어지럽기도 하고 매우 현란하여 자칫하면 정신 빼았기겠습니다그려^^
제가 님의 수준에는 정말 미치지 못하지만 정신 바짝 차려 보겠습니다.

아래 죽음에 대하여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호흡이 멈춘것을 죽음이라고 할 수도 있고 아직 시체라는 모양이 있는 동안은 죽음이 아니다 라고 정의할 수도 있고 시체를 이루고 있는 구성성분들이 다 흩어지기전에는 죽음이 아니다라고 정의 할 수도 있고 사람들의 뇌리에서 누군가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기전에는 죽음이라고 볼수 없다. 라고 정의 할 수도 있다. 바로 이렇게 삶과 죽음이란 실체가 없는 우리들 관념속의 정의일 뿐이다. 삶은 어디있고 죽음은 어디있는가? 그대들이 이것이 삶이고 이것이 죽음이다라고 정의 할때 삶과 죽음은 그대들앞에 나타난다. 그러나 정의 하지않을 때 그것은 무엇인가? 그저 무이며 공일뿐이다. 삼라만상이 전부다 이와 같다. 그리하여 부처는 생사는 없다고 하는 것이다."

라고 부처의 가르침을 인용하셨습니다. 과연 부처는 같은 사람으로서 경이로운 지경까지 터득한것 같습니다. 참 매력적이고 보편적으로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수긍할 수 밖에 없겠네요^^ 하지만 제가 읽기에는 왠지 허망하고 결국 부처 역시 스스로도 죽음에 대하여 모른다는 말로 들립니다. 자기가 많은 삼라만상을 깨달았지만 죽음의 실체에 대하여는 모른다는 것이고 결국 그도 역시죽음에 대하여 자신 없는것이기에 죽음이 '없다' 고 말하고 역시 죽었지요.
죽음의 두려움을 피하기 위하여 없다고 가정한것이고 그것을 긍정하는 것입니다.
죽음은 긍정이 아니지요. 부처는 모든것을 긍정으로 이해한것 같아 보입니다.
예수는 긍정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부정으로긍정을 밝혔습니다. 죽음을 몸소 당하심으로 죽음의 실체를 증명하셨고 다시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임 당하시기 전에 친구 나사로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내 친구 나사로가 잔다" 하였으며 깨우러 가자 하셨지요.

자. 부처는 죽음 따위는 없다 하였고 결국 죽었지만(영혼이 없다는 것이지요)
예수는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잠든 자를 깨우러 가자 하시지요.
종교는 있는 그대로를 긍정하며 살자는 것이고 예수는 여기가 전부가 아니라 곧 다른 세계가 올것이다를 말합니다. 죽음 그 너머가 있다고 준비하라고 말하지만 종교는 여기서 바르게 살면 그만 아닌가 합니다.
선택은 각자의 몫입니다^^ 깨달음 너머 무와 공과 허상 저 너머에 분명한 세상이 준비되었다고 합니다. 무지한 자들 맹신자들이 좋아할 내용이겠지요^^
님은 신은 허구다 하면서 결국 님 자신의 관념과 사유를 확신하고 있는 것이고
저는 예수를 신앙하고 있는 것이지요^^

감사합니다. 죽음 저 너머를 향하여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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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진 (115.41.59.127)
2010-03-22 22:19:32
한번 스스로 생각해보시기를
2000년 전에 기록된 한 글이 발견되었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배를 타고 바다를 나가는 남편을 향해 아내가 "여보, 너무 멀리 나가지 마세요. 혹시라도 바다 저 끝을 넘어 떨어지면 안되니까요. 조심하시고 건강하게 돌아오세요"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여야 할까요?
참 무지하네. 지구가 둥근데 바다 멀리 나간다고 떨어진다고 생각하다니.
이렇게 생각하고서 글을 읽으면 옳은 것일까요? 그른 것일까요?

한성영님은 어느 쪽이지요? 그 이유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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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mail-x (116.47.191.5)
2010-03-22 19:00:34
개독들이 한성영 씨 같은 사람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이야기 해 주지~!
.

어차피, 사고능력이나 지적수준 등에서 개독들은 한성영 씨와 같은 사람과는 아예 비교조차
할 수 없으니 말과 글로 대적할 수는 없다.

그냥, 십자가, 성수, 마늘 준비해서 한성영 씨에게 뿌려라~!

내가 보니까 이건 대화가 아니다.


수준이 어느 정도 비슷해야 대화가 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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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mail-x (116.47.191.5)
2010-03-22 18:53:12
한성영 님의 글에 모두들 게거품을 무는군.
.

한성영 님 이 사람 글 잘 쓴다.
재미있네요.


한성영 님에 대한 댓글 수준이 한 두 크리스천 외에 다른 개독들은 엉망이군.
그리고 박창진 목사 당신 수준으로는 한성영 씨 발 끝도 따라가지 못 하오.

박 목사 당신이 주로 상대한 자들은 같은 개독들이라서 수준이 그 나물에 그 밥이었지만
한성영 씨 같은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하고 다르오.

그리고 다블포인트 씨는 야훼를 언어의 범주에 가둘 수 없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은 어떻게 하게 되었나요?
이건 마치 나 도끼가 '깐따삐야'신이 존재하는데 이 분은 언어의 범주에 가두어 놓을 수
없는 분입니다. 라고 주장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습니다.
쉽게 말해서 발바닥의 때 만큼의 가치도 없는 주장입니다.


대학생이 이야기 하면 같은 대학생이 서로 질문하고 토론해야 하는데 대학생이 이야기 하면
초등학생 자기 이야기 하는 꼴이군요.

박 목사.
당신의 지적 능력, 독서 수준, 사고 수준으로는 한성영 씨와 절대 대화가 불가하오.
박 목사 당신도 한 3년 딴 짓 안 하고 철학, 역사, 문학, 경제, 문화 등 여러 가지
학문을 진지하게 공부해 보면 한성영씨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있을거요.
하지만 목사들의 머리 수준으로는 100번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 모르지.
그러니까 목사하지.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했었지만 목사들 같이 무식한 종자들은
일찌기 보지 못했소.


사실 한성영 씨와 같은 글은 처음이 아니라 안티 사이트나 혹은 무신론자 사이트에는
수없이 올라있는 글이고, 도올선생이나 아트앤스터디 같은 곳에서 철학강의를 들으면
쉽게 접할 수 있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을 아는 개독들은 거의 없으니까...


그리고 갈바람 님의 글도 일리는 있습니다.
문제는 일반독자의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를 규정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도올 강의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면 한성영 씨의 글은 충분이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아마 갈바람 님의 뜻은 일반독자 - 보통의 대한민국 독자가 아닌 기독교인이면서 일반 독자
-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비기독교인이라면 그리 어렵지 않은 한성영씨의 글도 기독교인에게는 무척 어렵겠지요.
이들은 대부분 무식하니까...

아래 박목사를 비롯해서 개독분들은 한성영씨가 무슨 글을 썼는지도 전혀 이해를 못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점에서 일반 개독 독자 분들 수준에는 어려울 수도 있겠지요.


오해를 할 수 있는데 한성영 님의 글 수준이 별 것이 아니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런 수준의 글도 이해 못하는 자들이 개독들은 거의 절대 다수란 말입니다.

한성영씨와 같은 글을 쓰라면 도끼도 억지로 쓸 수는 있겠지만 그리 쉬운 작업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적어도 한성영씨는 글쓰기 훈련도 아주 잘 된 사람입니다.


물론 뭐, 누군가 한성영씨의 글을 보면 잘난 체를 한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 정도는
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 정도는 이해해야죠.^^


차라리 무식한 개독들의 말도 안 되는 글 보는 것 보다 100배 낫습니다.


좀 있다가 더블포인트 닉의 글에 대해서 한 마디 더 하겠습니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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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5.216.85.152)
2010-03-22 16:07:25
성실한 답변에 감사
한성영님, 성실한 답변에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언어의 범주에 가두어 놓을 수 없는 분이지요. 그 분의 존재나 부재도 언어와 논리의 희롱으로 증명할 수 없고요. 그렇다면 불가지론이 가장 진실하고 겸손한 태도이지요. 증명불가능하기 때문에 있다 없다 할수 없으면 모른다는 대답-인정하신대로-이 가장 솔직하다는 거지요.
과학적 가설들에 상당히 신뢰를 두시지만 과학적 가설들도 언제나 변하는 것 아니던가요?
그리고 불교인들이나 힌두교인들이나 이슬람교인들이나 유대교인들이나 다 자신이 믿는 대상을 절대자로 신앙하며 포기하지 않는데 기독교인들에게만 유독 그 절대신앙을 내려놓으라는 이유가 뭔가요? 기독교의 절대주의적 신관과 전투적 선교가 많은 폐해를 가져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참된 기독교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희생적 사랑을 강조하지 못하고 교회가 권력화 세속화된 것의 문제라고 봅니다. 물론 님께서는 그것 조차 부인하고 영지주의적 해석을 믿고 주장하지만.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처럼 하나님이 인류에게 봉사하는 모습이 어디에 있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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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명 (203.152.166.220)
2010-03-22 12:42:00
삶과 죽음에 관한 묵상
삶과 죽음 - 생사에 대한 묵상





삶과 죽음(생사)는 무엇인가?

불교는 생사는 없는 것이라고 한다. 과연 그러한가?

먼저 삶의 시작과 죽음에 대한 정의를 내려보자

여러분은 무엇을 삶이고 죽음이라고 보는가?

여기에 대해 법과 의학은 머라고 정의 하고있을까?



사람의 시기 - 사람이라고 간주한다고 보는시기를 말하는 것이다.

삶이란 사람의 살아가는 것이니 사람의 시기를 삶의 시기라고 볼수도있을 것이다.

사람의 시기를 확정하는 문제는 그 초점이 ‘사람과 태아의 한계’를 분명히 함에 있고 이러한 구분의 실익은 ‘형법적 보호의 차이’에 있다. 생명, 신체에 대한 죄의 객체로 되는 형법상의 사람의 시기, 즉 출생 시기를 정하는 데에는 종래 분만개시설(진통설), 일부노출설, 전부노출설, 독립호흡설 등이있다. 친상법은 태아는 출생한 것으로 간주한다.



죽음의 시기

1) 의학적 측면

의학에서는 죽음을 인격적 과정이라기 보다는 단적으로 혹은 주로 생물학적 사건으로 취급하고 있다.

의학에서 죽음의 개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생체액 유동 기능의 불가역적 정지 (심장과 폐혈관의 기능정지)

(2) 육체로 부터의 영혼의 불가역적 이탈 (호흡기능 정지)

(3) 신체적 통합 능력의 불가역적 정지 (뇌기능의 정지)

(4) 사회적 상호 작용 능력의 불가역적 정지 (뇌피질사)



2) 법학적 측면

첫째, 호흡이 종지한 시점을 택하는 호흡 종지설.

둘째, 심장의 박동이 종지한 시점을 택하는 맥박 종지설.



이것이 법이나 의학에서 정의하는 삶이고 죽음이다. 여러분은 삶과 죽음을 머라고 정의 할 것인가?

지역적인 문화마다 사람마다 그 정의는 다양할 수있을 것이다. 여기서 여러분은 무엇을 느끼는가? 삶과

죽음이란 바로 정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의는 얼마든지 다양하게 할 수있다. 나라는 존재의 출발을 어머니, 아버지생식기에서부터 정의 할 수도 있고 그이전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생식기에서 부터 정의 할 수도 있고 난자와 정자라는 것이 사람의 몸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고 몸은 물,흙, 단백질 탄수화물 기타등등으로 구성된것이니 물, 흙 ,단백질 기타등등으로부터 나라는 존재의 출발을 정의 할 수도 있다.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호흡이 멈춘것을 죽음이라고 할 수도 있고 아직 시체라는 모양이 있는 동안은 죽음이 아니다 라고 정의할 수도 있고 시체를 이루고 있는 구성성분들이 다 흩어지기전에는 죽음이 아니다라고 정의 할 수도 있고 사람들의 뇌리에서 누군가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기전에는 죽음이라고 볼수 없다. 라고 정의 할 수도 있다. 바로 이렇게 삶과 죽음이란 실체가 없는 우리들 관념속의 정의일 뿐이다. 삶은 어디있고 죽음은

어디있는가? 그대들이 이것이 삶이고 이것이 죽음이다라고 정의 할때 삶과 죽음은 그대들앞에 나타난다.

그러나 정의 하지않을 때 그것은 무엇인가? 그저 무이며 공일뿐이다. 삼라만상이 전부다 이와 같다.

그리하여 부처는 생사는 없다고 하는 것이다.





깨달으라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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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명 (203.152.166.220)
2010-03-22 12:39:51
사랑그리고 편지님, 여기서도 뵙는군요.
사랑그리고편지님 저는 깨달음을 실체가 있는 것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깨달음, 진리는 방편(도구, 수단)일 뿐입니다. 바로 허상을 깨우기 위한 수단이지요.

님꼐서 말씀하신 "결국은 "무" 요 "공" 이요 "허상" 입니다. 실체가 없는 것이니까 결국 "피장파장" 입니다."

바로 이말 너머에 무엇이 있습니까? 그것을 들여다 보세요. 님께서 무, 공, 허상을 제대로 깨우치셨다면 제가 어떤말을 하고 있는지 아시게 될 겁니다. 님께서는 이미 가지고 계신 편견과 관념이 너무 많으세요.

자,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셨군요. 결국 모든 인간은 죽는다. 과학도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님, 죽음이 무엇입니까? 석가모니는 무 생노병사라고 말했습니다.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없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어요. 우리가 보기에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분명한데 석가모니는 왜 그것이 없다고 말한 걸까요?

존경하는 사랑그리고 편지님, 생각해보세요.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것은 제가 쓴 글에서처럼 인간의 언어에 의한 정의일 뿐입니다.
인간이 보기에 산에 있는 소나무는 나고 늙고 병들고 죽지만,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소나무만 그런것이 아니라 들에 핀 민들레도 그렇고요. 개나 고양이, 소나 말, 제비나 비둘기, 강속에 붕어나 바다의 고래도 그것을 모릅니다. 다만 자연의 흐름대로 흘러갈 뿐이지요.

그러나 인간은 그 자연의 흐름에 이름을 붙여놓고 그것이 실체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은 나쁜 것이다.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죽는 것을 두려워 하는 것이지요. 죽음이 무엇일까요? 님께서는 종교가 특히 기독교가 죽음이후에 부활을 말하고 있으니 기독교만이 참된 종교라고 말하시는지 모르겠으나 그러면 인간만이 부활하는 겁니까? 소나무나 민들레 붕어나 고래는 부활하지 않아도 되는 겁니까? 인간의 생명이 소중하다면 모든 생명이 소중한 것이지요. 그러니 인간만이 부활한다고 하면 이 얼마나 편협한 생각입니까?

그러나 소나무나 민들레, 하나못해 하루살이들도 인간처럼 죽음에 안달하지 않고 자연의 흐름에 당당히 자신을 맡기고 살다 죽습니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을 실체가 있는 독립적인 개체라고 착각하고 있기에 그 개체성이 소멸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 개체성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자연안에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마치 지구안에 모든 질량이 있는 물체는 지구 중력장의 영향을 받고 엔트로피는 증가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듯이 태어난 생명체는 죽게되어있습니다. 다만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순응하지 못하니 죽음이후에 무엇이 있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바람은 죽음이후를 걱정하지 않습니다. 구름도 죽음이후를 걱정하지 않지요. 발코니에 잠시 앉았다가 날아간 참새 한마리도 죽음이후를 걱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연의 흐름대로 당당하게 흘러 왔다가 흘러갑니다.

그것이 진실입니다. 그러나 인간만은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지요. 그리고서는 이 존재으 순간을 오롯이 즐기며 여행하지 못하고 쓸데없는 욕심과 허영과 가식, 무지함으로 세월을 낭비하고 다른 존재들도 괴롭게 하고 있습니다. 바보들이지요. 이 진실을 바로 받아들이면 우리는 이 경이적이고 독창적인 허상의 꿈과 같은 삶을 아주 가치있게 여행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삶에 집착하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고 영원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제대로 가르치는 종교는 삶과 죽음의 실체를 바로 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삶에 집착하기때문에 죽음이 두려운것이고 또한 인간이 자신을 실체가 있는 독립된 개체라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 개체성을 계속 유지하고 싶은 겁니다.

사랑그리고 편지님 삶과 죽음은 무엇입니까? 제가 얼마전에 쓴 글을 보여 드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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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명 (203.152.166.220)
2010-03-22 11:57:50
박창진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우명은 한성영의 필명입니다)
예, 저는 바보입니다.^^

그러니 바보가 아닌 박창진님께서 많이 가르쳐주세요.

그럼 제가 배우겠습니다. 자, 님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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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명 (203.152.166.220)
2010-03-22 11:49:50
..님, ~ 필명이 너무 추상적이군요.^^
한성영이 없다고 주장한다고해서 한성영의 존재가 지금 없는 것인가? 그것을 묻고 계시는 군요.
한성영이라는 존재는 무엇일까요? 한성영은 한성영이 아닙니다. 한성영은 한성영이라는 인위적인 이름표가 가리키는 대상이지요. 그런데 그 이름표가 가리키는 대상은 싳체가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은 다만 우리의 시각의 한계안에서 보는 것일뿐이지요. 좀 더 정밀한 관찰의 도구로 보면 한성영이라는 이름표가 가리키는 대상은 양자물리학적으로 본다면 하나의 사건일뿐이지 고정된 실체가 아납니다.

다만 우리의 시각적 관찰의 한계와 뇌의 절충적 해석때문에 고정된 실체 처럼 보일뿐이지요. 그러니 한성영이라는 이름표가 가리키는 대상은 좀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하나의 사건 입니다. 그러나 하나의 사건이라고 기술하는 것도 언어의 간섭에 의한 설명일뿐이지요. 언어의 간섭이 없다면 한성영이라는 사건은 무엇입니까?

존재와 부재의 증명이 말의 희론으로 가능한가? 그러면 님에게 묻겟습니다. 존재는 무엇이고 부재는 무엇입니까? 존재는 단지 존재라는 말이 있기 때문에 있는 것이고 부재는 부재라는말이 있기 때문에 있는 것일 뿐이지요. 말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엇인가요?

'있다. 없다.'는 언어 표현 양식속에서만 가능할 뿐 언어의 간섭이 없다면 그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언어의 간섭이 없다면 대상으로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들은 소크라테스가말하고 불교의 선사들이 말하는 것처럼 "오직 모를 뿐......"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있다, 없다.'는 언어적 기술을 철학적 공리로 받아들일 수 있는 건가요? 그것은 그저 소통을 위해 편의주의적으로 가공한 상징체계일뿐, 실체가 없는 것이지요.

그리고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고 없다고 단정할 수 있는가?
예, 과학에서는 증명할 수 없는 것들은 단정하지 않고 가설로 남겨 두지요. 그러나 그것도 상당히 개연성이 있고 설득력이 있지만 증명할 수 있는 도구나 증거 설명체계가 부족한 경우에만 그렇게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존재여부는 가설로서 남겨 둘수 있는 것인가? 그것도 기독교 경전이 기술하는 하나님만을 설득력있는 가설로서 남겨둘 수 있는 것인가? 기독교 경전, 특히 구약의 하나님은 심리적 위안을 주는 신앙의 차원이라면 모를까, 과학의 견지에서 보자면 가설로서도 가치가 전혀 없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을 존재할 수 있는 가설로 남겨 둘 수 있다면 이슬람의 알라나 일본의 창조신,일본의 창조신은 이자나미와 이자나기, 천부경의 상제, 조로아스터교의 아후라마즈다, 인도의 브라만, 단군신화의 환인도 가설로서 남겨두어야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기독교의 하나님만이 존재증명이 안되었지만 가설로 남겨둘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겟습니까? 이것은 독선이지요. 그리고 과학과는 별개인 신앙의 차원이라고 한다면 신앙이란 개인들의 신념체계이니 헌법이 보장하는 종교의 자유처럼 누구나 각 개인은 자신이 임의대로 정한 것을 신앙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기독교인들이 증명되지 않은 하나님을신앙하듯이 우리의 조상들이나 고대 그리스인들, 인도인들이 수많은 신들을 신앙한다고해서 문제될 것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근본주의 개신교인들은 이것을 이단이다 취급하고 있으니 말도 않되는 주장일뿐아니라 독선적이고 배타적이며 갈등의 주범들일 뿐입니다. 지금 러시아에서 급증하고 있는 신나치 백호주의, 스킨헤드족들과 하등 다를 것이 없는 겁니다.

그러면 다원주의 관점을 받아들여서 '창조신은 하나이지만 여러 종교에서 표현하는바가 다를 뿐이다.'라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설득력이 있는 것인가? 그러니 이것도 제가 설명한 것처럼 한성영이라는 존재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인위적인 이름표요 관찰의 한계 때문에 고정된 것처럼 보이는 사건인 것처럼 창조신도 그것이 설령 있다고 치더라도- 물론 전혀 가능성이 없지만- 그것은 인간의 인위적인 언어적 정의일뿐이며, 하나의 사건일 뿐입니다. 그리고 사건이라고 하는 것도 언어의 간섭에 의한 표현일 뿐이니 실은 모른다. 이것이 가장 정확하고 솔직한 고백이 됩니다.

여기까지하지요. 질문 감사드리고 또 질문이 있으시면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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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명 (203.152.166.220)
2010-03-22 10:55:31
&#44043;바람님~
일반독자들이 보기엔 좀 어렵겠다구요?

예 그런 면이 좀 있지요? 그러나 기존 기독교의 허구적인 면들을 점검하려면 먼저 기존의 것들을 짚어야 할 수 밖에 없고 기존의 기독교신학이나 철학들이 지들만 알아볼 수 있는 용어들을 사용하기에 그것을 짚으려하다보니 일반대중들이 보기엔 어려워 질 수 밖에 없군요.

그래서 이런 작업을 마치면 좀 더 대중 친화적이고 쉽고 간편한 표현들로 글을 써볼 작정입니다. 짚어야할 것들이 너무 많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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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그리고편지 (59.7.13.27)
2010-03-22 00:07:54
여기서 보는군요^^
뉴스앤조이보다는 이곳 당당뉴스가 님의 글이 잘 어울립니다^^
신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다 라고 결론 내리고 있군요^^
님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기존 님이 비판하는 보수주의 근본주의 분자주의 기독교에서 말하는 창조주 하나님이 곧 "진리" 라고 설명하셨지요^^
진리 역시 눈에 보이는 존재는 아니고 님의 논리대로라면 그 진리 역시 인간에 의하여 필요에 따라서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문화적인 욕구와 충족 그리고 당시의 주류세력에 의하여 당당하게 주장되었겠지요. 그렇다면 세속적으로 "힘" 이 곧 "진리" 라는것이 되고요.

님이 적극적으로 피력하는 깨달음이나 진리 역시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결국은 "무" 요 "공" 이요 "허상" 입니다. 실체가 없는 것이니까 결국 "피장파장" 입니다.

그렇지만 그런식으로 신 존제를 입증할수 없는 것처럼 님의 논리 역시 허구에 가깝습니다.
사실 쓸데없는 말장난만 되풀이 하는것이 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죽음>과 죽음 이후의 문제가 남았습니다.
이것은 과학과 철학적인 것으로 해결 할 수 없는 인간의 근원적인 부분이며
치명적인 약점이기도 합니다.

님의 논리대로 인간이 공포와 두려움등을 방어하기 위한 작용으로서 심리적인 대안으로
신 을 만들었다고 해도...그것이 죽음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가요?

기독교인들이 전지전능한 신이라 믿고있는 그 신을 님의 주장처럼 인간이 만들어냈다면
죽음의 문제 역시 인간 스스로 해결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누가 있어서 죽음이라는 화살을 피할 수 있을까요?
결국은 죽음이라는 덫을 벗어날 길이 없다는 것이 바로 신의 존제와 인간의 피조된 존제를 입증하는 분명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하나님이 없다고 악을 쓰던가 말던가 님이나 모든 사람의 결국은 죽음앞에서 자신을 변호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죽음의 문 앞에서 님이 없다하던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혹은 님이 주장하는 진리 앞에서
어떻게 변호하실 것인지요?

그리고 그 시간이 사실 언제 우리 코 앞에 덫처럼 들이닥치는가를
가늠할 수 없다는 것이고요...
님의 글은 참 매력적이고 훌륭하지만 근본을 놓치고 있어서 아쉽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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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진 (115.41.59.127)
2010-03-21 22:05:06
정말 바보스런 이는 한성영님이지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막 4:26-27).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예수님이 참 무식하시지요? 씨가 나서 자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계시니요.
우리는 다 아는데 말입니다. 생물학을 조금만 배우면 광합성 작용으로 자라는 것을 알게 되거든요.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무식하신 것이다.
맞는 말일까요? 틀린 말일까요?
맞는 말이라고 대답하는 이는 무식한 것입니다. 바보스런 이이지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를 대상으로 하신 말씀이 아니라 그 시대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신 말씀이고 그 시대의 사람들은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 적으면 알아야 할텐데, 아무래도 모를 것 같아요.
위 글의 문제점을.
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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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5.216.85.152)
2010-03-21 20:33:20
한성영은 없다! 없다! 없다!
그렇게 말한다고 한성영이란 현존이 지금 없는건가요? 존재와 부재의 증명이 어찌 말의 희롱으로 증명이 가능합니까? 존재를 증명할 수 없으면 없다고 말해도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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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바람 (210.2.45.158)
2010-03-21 17:51:23
일반 독자들이 이해하기엔 좀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신이 없다는 명제를 언어의 약속체계를 통하여 논증하셨네요. 놀라울 뿐입니다. 님의 경지가...종교 학자들은 인간이 신을 낳는다고 합니다. 심리학자들은 인간이 자신의 투사를 신이라고도 합니다. 신은 존재한다라는 의미는 신이 있다고 전제한 신의 정의입니다. 신은 화자의 술어를 들어야 그 정의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없다고 하면 없는 것도 그 화자의 정의 안에 내장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누구도 이를 있다 없다로 구분지어 말하기엔 여간 어려운 논제가 될 수 밖엔 없네요. 다만, 그 주장의 합리성에 무게를 두고 받아들이면 되는 사안이고 무거운 주제임은 어쩔 수 없습니다.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도 하나님의 정의(언어)는 있어 왔고 우린 자라면서 신이란 단어를 수도 없이 들어 왔지만 그 실체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어 이를 실증할 수가 없는 것인데. 다만,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그 신이라는 주제로 좁히면 여호와 그리고 예수 성령이라는 삼위일체의 신을 정의하고 교리로 내세우고 있는데, 여호와는 유대부족신이고 부족과의 계약의 신인데 왜 우리가 이를 믿어야 하는지 의문이고요. 예수는 그의 역사적 실체가 없는 신화적인 신으로 보이는데 이를 동등한 신으로 믿는 것은 모순 중의 모순으로 보입니다. 아울러 성령은 예수의 존재가 없는데 성령이란 것이 성립 가능한가요? 신학의 언어가 어차피 예수의 중보논리를 신도들에게 변증하는 변증학 이상은 아니라고 여겨지거든요.물론 신학자체는 학문으로 성립이 불가능하고요. 인간 존재론적 성찰을 말하려면 철학의 논제가 더 현실성이 있는 것 아닌가요? 어차피 철학도 관념논을 벗어나기 힘들어 보이지만. 필자님에게 한 수 배우고 싶습니다. 진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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