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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서 넘치게 하라.미리 보는 교회력 설교/오순절 다섯 번째 주일(20100321)
박성규  |  theos53@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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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년 03월 17일 (수) 19:55:39
최종편집 : 2010년 03월 18일 (목) 07:48:33 [조회수 :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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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20070225)
성서일과/ 시 126; 사 43:16-21; 빌 3:4-14; 요 12:1-8
본문/ 요한복음 12:1-8 

흘러서 넘치게 하라.

(요 12:1-8) [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 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 하더라 [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7]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너무나 주를 사랑하여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모습으로 주를 위해 헌신했던 마리아의 사랑과 헌신을 기억하여 주를 기쁘시게 하는 성도들 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주의 염려가 우리를 살리는 은혜라면, 주의 기쁨은 우리를 복되게 하시는 은혜입니다.
주의 은혜로 산 자가 되었으니, 주를 기쁘시게 함으로 복을 누리는 성도들 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눈물로 심는 씨

오늘의 성서일과 중 시편 126편을 보시겠습니다.
         (시 126:1-6)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2]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 하였도다 [3] 여호와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4]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리소서 [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 오리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포로에서 벗어나 예루살렘에 돌아왔습니다.
꿈에서나 그리던 일이 현실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찬송하며 그리던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다시 찾은 예루살렘은 그들의 기억에 남아있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70 년이라는 세월이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성벽은 무너져 있었고, 포도원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살던 집은 들짐승들의 거처가 되어 있었습니다.
더구나 바빌론 강가에서 울며 그리워하던 성전은 흔적도 찾을 길이 없습니다.
돌아오기만 하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그들의 마음은 무너진 성벽처럼 허물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대로 무너져 버릴 수는 없습니다.
시냇물을 돌이켜 흐르게 하시듯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신 하나님의 큰 은혜를 헛되이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을 추스르고 결단합니다.
씨를 뿌리자.

그런데 왜 눈물로 씨를 뿌려야 합니까?
가을에 거둔 것을 저장하였다가 봄에 씨를 뿌리는 것은 수고롭지만 즐거운 일입니다.
또다시 가을이 오면 더 많은 것을 거두리라는 소망이 앞서기에 땀을 흘릴지언정 눈물을 흘릴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왜 눈물을 흘립니까?
“농부는 씨앗을 베고 죽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굶어 죽는 일이 있어도 씨앗만큼은 먹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씨앗을 먹으면 몇 날을 버티기는 하겠지만 내년을 기약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씨앗을 심으면 당장은 어렵겠으나 눈물을 흘리면서라도 어떻게든 버티면 그 씨앗이 30배, 60배, 100배가 되는 날이 옵니다.
이름만 농부인 사람은 씨앗을 먹고 당장의 배고픔을 해결하지만, 진짜 농부는 당장의 아픔을 눈물로 씻으며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시편 126편은 당장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성전을 지은 자들이 부른 노래입니다.
그들이 뿌린 씨는 당장의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뿌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심은 씨는 육신의 양식을 위해서 심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양식을 거두기 위해, 당장의 고통을 참으며 뿌린 씨였습니다.

먹고 남은 것을 뿌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굶주린 배를 움켜쥐며 뿌린 씨였습니다.
농사짓고 남은 시간에 심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제 밭의 일을 뒤로 한 채 하나님의 집으로 가 씨를 심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눈물로 씨를 뿌린다고 하는 까닭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밭에 씨를 뿌리는 일이 급했는데, 그들의 피곤한 육신을 눕힐 집이 더 급했는데, 그 보다 먼저 성전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도를 넘어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헌신을 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까지 할 일은 없었는데 그렇게 했다는 뜻입니다.
세상 이치로만 말하면 도를 넘으면 탈이 나는 법입니다.
過猶不及이라는 말에서 보듯이 지나치는 것은 모자라는 것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의 일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 안에서의 일은 지나치다 싶을 때 놀라운 결과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 올해 표어가 뜻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전 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더욱 힘쓰라는 말은 적당히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정도면 되었다 하는 거기서 조금 더 나가라는 뜻입니다.
그 수고가 절대 헛되지 않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수고하고, 조금 더 헌신하고, 조금 더 사랑하는 거기에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임할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마리아의 사랑과 헌신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마리아의 사랑과 헌신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성경에는 마리아라는 이름의 여자가 여럿 등장합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정확히 어떤 마리아인지 분명하게 구별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오늘 등장하는 마리아도 그런 경우입니다.
요한은 이 마리아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의 동생이라고 합니다.
나사로의 누이인 마르다와 마리아는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기쁨에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마르다는 음식을 장만하느라 분주했는데, 마리아는 예수의 발에 향유를 뿌리고 머리털로 닦아 드림으로 예수님께 대한 감사와 사랑과 헌신을 표현했습니다.
그 일은 적당한 정도를 벗어난 일이었습니다.

첫째는, 물과 수건을 사용하여 손님의 발을 씻어주는 것은 이스라엘의 풍습입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종이 하는 일이지 주인이 직접 하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마리아는 이 일을 종에게 시키지 아니하고 여인의 몸으로 직접 나섰습니다.
지나친 일이었습니다.

둘째는, 향유를 머리에 사용하지 않고 더러운 발에 썼습니다.
향유는 머리에 바르는 것입니다.
머리에는 치장할 목적으로 깨끗이 씻은 후에 좋은 것을 바르기도 합니다.
더러운 발은 물로 씻어내는 것으로 족합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향유를 발에 썼습니다.
화장품처럼 조금 찍어 바르는 것도 아니었고, 물 쏟듯이 부어서 더러움을 닦는데 썼습니다. 쓸데없다 여기는 것이 당연할 만큼 지나친 일이었습니다.

셋째는, 수건으로 닦지 아니하고 자기의 머리털로 닦았습니다.
마리아는 향유로 씻은 예수님의 발을 머리털로 닦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여자는 머리털을 남에게 보이는 법이 없습니다.
부끄러운 일이라고 여겼기에 수건을 둘러쓰고 다녔습니다.
마리아는 수건을 벗어 던지고 머리털을 수건으로 사용했습니다.
눈에 거슬릴 정도로 지나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엄청난 돈을 물 쓰듯이 써버렸다는 것이 지나쳤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부은 순전한 나드 향유 한 근은 값으로 쳐서 300 데나리온이나 하는 비싼 것이었습니다.
300데나리온은 노동자의 일 년치 품삯에 해당합니다.
발 닦는데 들인 돈 치고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많은 금액이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친 일이었습니다.
부끄러움을 아는 여자라면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하지 않을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 일을 했습니다.

마리아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까닭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생각할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이유는 그녀가 주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이 행하시는 기적 때문에 주님을 따랐습니다.
주님이 저들의 왕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새롭고 놀라운 가르침을 들으려고 주를 따랐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는 다른 가르침이었기 때문입니다.
위로를 받고, 깨달음을 얻으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르는 제자들도 있었지만 그들에게도 속셈이 있었습니다.
주와 함께 높아지려는 욕심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들과 달랐습니다.
죽은 오라비를 살려준 은혜를 입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앞서는 것은 사랑이었습니다.
주님 곁에 있는 것만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에도 주님이 마리아의 집에 들르신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향유를 붓기 전에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주님이 오시자 언니 마르다는 주를 대접할 준비를 하느라 바빴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의 곁을 떠나지 않고 그 발아래 앉아 주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마르다가 예수님께 마리아더러 그러고 있지만 말고 내 일을 좀 도우라고 말씀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눅 10:41-42) [41] ...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리아가 전념하고 있는 한 가지는 무엇입니까?
마리아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주님이 빼앗기지 않으리라 하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주님 곁에 있는 것, 주님을 바라보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주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후일에 사람들이 이런 사실에 주목해서, 마리아와 예수님의 사랑을 남녀 사이의 사랑이라고 짐작하고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었을 정도입니다.
무엇이 되었든 확실한 것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사랑했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랑이 마리아로 하여금 도를 넘는다고 생각 되는 일, 지나치다고 생각되는 일을 거리낌 없이 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그대로입니다.
          (고전 13: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하는 힘입니다.
주를 믿는 것으로 되었다, 충분하다 생각하지 마십시오.
마지막 순간에 주를 부인한 베드로처럼 될 수 있습니다.
주를 사랑하는 자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베드로에게 물어 보신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요 21:15-17) [15] ...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16]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 [17]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세 번을 한결같이 같은 것을 물으셨습니다.
나를 사랑하느냐는 물음이었습니다.

주의 일은 사람이 하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를 사랑하는 자가 자기도 모르게 주의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그랬습니다.
마리아는 오로지 주를 사랑하여 향유를 부었는데, 그 일이 주의 장사를 준비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는 자에서 나아가 사랑하는 자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하여 주의 큰일에 쓰임 받는 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

가룟 유다의 말이 이 모든 지나침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지당한 말입니다.
유다처럼 예수를 팔 생각이 없던 사람이라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하나도 이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특별히 가난한 자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던 예수님께는 뼈아픈 말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7] ... 저를 가만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무슨 뜻입니까?
우선은 마리아의 한 일이 단순히 발을 씻는 일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향유는 발을 씻는데 쓰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장사를 준비한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발을 씻는 것으로 보였으나 하나님의 구원 섭리가 이루어지는 한 과정이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죽음으로 세상을 구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런 일을 예상치 못했습니다.
가장 가까운 제자들조차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도를 넘어선 헌신이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지는 길을 닦았던 것입니다. 분명 마리아 자신도 그것을 생각지는 못했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넘어서 있는 하나님의 계획은 사람의 생각을 넘어서는 사랑과 헌신으로 이 땅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이어졌습니다.
          [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무슨 뜻입니까?
매일처럼 도를 넘어서는 헌신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이라고 해서 날마다 향유로 발을 씻을 일은 없습니다.
아니 주님은 그렇게 섬김을 받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닙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당신은 섬기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는 항상 있습니다.
그러니 유다가 말하는 일은 항상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장사는 오직 한 번밖에 없는 특별한 일입니다.
항상 해야 할 일 조차 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평생에 오직 한 번밖에 없는 일을 하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유다의 속마음이 그렇지 않습니까?
          [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도를 넘어서는 헌신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평소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면, 특별한 때에 특별한 헌신을 할 수는 없습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우리의 생각을 넘어서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확인하신 것은 굳이 이삭을 바치는 일을 통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이전에도 이미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은 사람의 상식이나, 하늘의 이치를 뛰어넘는 일이었습니다.
두 말할 것도 없이 지나친 일이었고, 도를 넘어선 일이었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이삭을 다시 살리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히 11:19)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 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성경 말씀이니 이의를 달 수 없겠습니다만 한 번쯤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과가 어찌 될지 뻔히 알고 그랬다는 말이 아닙니까?
이 말씀은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느라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행위를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그가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자였기 때문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 아들까지 죽일 수 있는 사랑이 어디 사랑이겠는가? 라는 반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사랑해 보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일 따름입니다.
그럴 수 없을 것 같은 데 그렇게 해야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 10:37-38) [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사랑해 보지 못한 사람은 아브라함의 일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사랑해 보지 않으면 마리아의 일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도를 넘어서 헌신하는 자를 보면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유다처럼 어떤 트집을 잡아서라도 그렇게 할 일이 무엇이냐고 따져 묻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브라함과 같이 하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매일 마리아처럼 해야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평생에 한 번은 그렇게 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니 꼭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할 수 있을 만큼 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일도 평생에 한 번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마리아의 일도 평생 한 번 있었던 일입니다.
평생에 한 번 그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랑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사랑이었고, 마리아의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십자가에 걸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그렇게 사랑했는데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는 항상 있을 것이라는 말씀은 그들을 구제하는 일은 성도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 특별한 일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은 상급이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 일은 하지 못하면 징계를 받는 일입니다.
그러나 평생에 한 번 할 수 있는 일, 도를 넘어서 지나치게 힘쓰는 일은 특별한 일입니다. 상급이 있을 만한 일입니다.
마리아에게 주신 상급이 무엇입니까?
          (막 14: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 시니라

사실 별다른 보상이 없습니다.
그저 마리아의 행한 일이 사람들의 머리에 남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기억하여 따르게 하려는 것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해서 하는 일은 보상을 바라는 일이 아닙니다.
아무런 보상이 없어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일입니다.
그 일로 그냥 기쁜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마가복음에 기록된 이 말씀이 없이 그저 마리아가 그렇게 했다는 것으로 끝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순절은 주님의 십자가 고난을 상기하는 주간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도를 넘어서는, 흘러서 넘치는 사랑의 증거입니다.
죄 없이 죄 값을 치렀습니다.
죽을 수 없는 분이 죽었습니다.
우리 죄를 대신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믿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그렇게 믿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야만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다 되었다고 여기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 사랑을 입었으니 우리도 마리아처럼 주를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넘치는 사랑을 입었으니 넘치도록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마리아처럼 평생에 한 번은 잊혀지지 않는 일, 기념이 될 만한 일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리아의 사랑과 헌신이 잊혀지지 않고 기억되는 것 곧 주님이 기념하라고 하신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주님이 잊지 않으시겠다고 하시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온 마음으로 주를 사랑하셔서, 주님이 잊지 못하는 성도, 주님이 기억하시는 성도들 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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