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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미리 보는 교회력 설교/사순절 둘째 주(20100228)
박성규  |  theos53@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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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년 02월 26일 (금) 16:41:49
최종편집 : 2010년 02월 26일 (금) 16:54:07 [조회수 :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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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두 번째 주일(20100228)
성서일과/ 시 27; 창 15:1-12, 17-18; 빌 3:17-41; 눅 13:31-35
본문/ 눅 13:31-35
설교/ 길에서...

(눅 13:31-35) 『[31]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32]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 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33]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35]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길에서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의 후반부는 그 길에서 일어난 일들을 집중적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특기할만한 것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방향을 정하시고 난 후에는 기적에 관한 기록이 매우 드물다는 점입니다.
크게 두 가지 일들이 교차되어 나타나고 있는데, 하나는 주님이 여러 종류의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하시는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그 일을 통해 예수님이 사람들을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사마리아를 통과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이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그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율법사는 예수를 올무에 빠뜨리려고 예수님을 시험하였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겠느냐고 묻는 그에게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려 주시며, 네가 이웃이 되어주라는 교훈을 주셨습니다.

또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베풀어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신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단 두 번 베푸신 기적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본 어떤 사람들은 주님이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주님에게 다른 표적을 보여 달라며 주를 시험하려고 했습니다.
주님이 베푸신 기적도 주님을 배척하는 빌미가 된 것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도 여전히 예수를 배척했습니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를 영접하여 들인 후에 주님이 손을 씻지 않는 것을 보고 율법을 어기는 짓이라며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주님은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고 그 안은 씻지 않는 것이 바리새인들이 하는 짓이라며,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통렬히 꼬집었습니다.
많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그 말을 듣고 분노하여, 예수님의 말씀에 책을 잡으려고 길목을 지켰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을 겪으시는 동안에 예수님을 반가이 영접한 사람들은 오직 베다니에 사는 마르다와 마리아뿐이었습니다.

오늘 말씀도 그런 이야기-배척당하시는 이야기 중의 하나입니다.
헤롯이 예수님의 목숨을 해하려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주님,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이신 주님이 왜 정작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지 못하고, 배척을 당하셨을까요?

누가가 말하는 이유는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것과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 달랐는데, 사람들이 자기들과 다른 예수님의 생각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사람들은 물론 제자들마저 알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아셨는데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했던 것이 무엇일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아셨던 그것을 밝히 아는 자가 되어, 주님을 영접하고, 주의 가신 길을 따라 가는 참 제자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인간의 악함을 아셨습니다.

헤롯은 세례 요한을 죽인 바로 그 헤롯입니다.
그는 동생 빌립의 아내를 취했는데, 그 죄를 지적하는 세례요한을 죽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회개하라고 외치며,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를 헤롯이 죽였습니다.
그것도 새로 얻은 아내의 딸인 살로메의 춤값으로 죽였습니다.
사람을 죽인 이유 치고는 너무나 어이가 없었습니다.
공의도 없고, 법도 없는 그야말로 악한 왕이 이제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 죽은 세례 요한이 살아났다고 하는 것을 그도 아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죽여 자기 죄를 묻어버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헤롯의 음모를 예수님께 전한 바리새인들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걱정해서 예수님께 소식을 전하는 것처럼 보이자만 사실은 그들도 헤롯과 같은 마음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것을 못마땅해 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주님의 길이 예루살렘으로 향하지 못하게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헤롯의 음모를 알려주는 것은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주의 발길을 돌리려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길에서 베푸신 또 하나의 기적은 십팔 년 동안이나 귀신이 들려 꼼짝을 못하고 꼬부라져 있던 여인을 고치신 일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날이 마침 안식일이었는데, 이를 본 바리새인들이 주님이 안식일을 범한다고 화를 냈습니다.
주님은 십팔 년 동안이나 사단에게 매였던 사람을 풀어주는 것이 안식일의 참 뜻이 아니겠느냐고 하심으로 그들을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그 부끄러움은 바리새인들이 주를 더욱 미워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런 바리새인들이 헤롯의 음모를 전하는 것을 보시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32]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 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주님은 바리새인들이 헤롯과 내통하고 있다는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헤롯과 바리새인 사이에는 공통점이 없었습니다.
헤롯은 세상의 법을 주관하는 권세자요, 에돔 사람으로 유대인들이 멸시하는 사마리아 여자에게서 난 사람입니다.
유대교인이라고 말하면서 이교도의 생활을 한 사람입니다.
바리새인은 율법 곧 하나님의 법을 목숨처럼 여기는 자들이요, 정통적인 유대인들입니다.
달라도 너무 다른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시기에 그들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죄악에 속한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헤롯을 일러 여우라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을 부를 때에는 독사의 자식들이라 하셨습니다.
여우는 간악하고, 교활한 사람을 비유로 일컫는 말입니다.
독사는 사악하고, 어두운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유유상종이라고 하였습니다.
비슷한 것들끼리 서로 통한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독사들에게, 여우에게 가서 당신의 말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여우 헤롯과 독사 바리새인들을 한 통속으로 여기신 것입니다.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헤롯의 죄는 모든 사람의 공분을 불러일으키는 명백한 죄악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어떻습니까?
스스로 의롭다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헤롯의 음모를 예수님께 알려드리는 것은 짐짓 자기들은 헤롯과는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어떻습니까?
그들이 헤롯과 달랐습니까?
아닙니다.
주님은 아셨습니다.
그들이 다 같은 죄인이라는 것을....

헤롯과 바리새인은 너무나 다른 사람들입니다.
서로 반대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다 같은 죄인들이었던 것입니다.
헤롯의 죄는 드러나 있었지만 바리새인들의 죄는 감추어져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아셨지만 그들 스스로는 알지 못하고 살았던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때로 헤롯과 같습니다.
죄를 씻으려하지 않고 묻어두고, 감추려고 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이 될 염려는 언제나 있습니다.
죄인들은 나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 죄인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조차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말합니다.
(롬 3:10-12) [10]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바울 자신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일컬어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그가 가장 큰 일을 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바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아시는 대로 우리가 죄인임을 깨달을 때, 주님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은 것입니다.
바울처럼, 베드로처럼 내가 죄인이로소이다, 당신의 십자가 고난이 나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고백할 수 있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당신이 가셔야 할 길을 아셨습니다.

주님이 헤롯에게 전하라는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32]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 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33]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오늘 그리고 내일, 당장 하실 일을 알고 계셨습니다.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레 어떻게 되실 지도 알고 계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죽는 일이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죽기까지 세상에 있는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일을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당신의 하실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는 것으로 끝날 일은 아닙니다.
그런 일들은 세상이 존재하는 한 계속될 것입니다.
주님이 세상에 머무시며, 당신을 찾아오는 자들을 고치시거나, 이 동리, 저 동리로 다니시며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신다고 한들 세상이 아주 달라질 일은 없습니다.

주님이 세상에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시는 일은 마치 마리아가 쏟아 부은 나드 옥합 한 근으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일과 같은 일입니다.
유다의 말대로 그 향유를 팔면 당장에는 가난한 사람 여럿을 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다고 세상에 가난한 자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품에 안기기 전에는 세상에 귀신의 역사와 병든 자의 고통이 끊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주님의 죽으심은 한 번 죽으심으로 온 세상의 모든 죄를 씻어, 만민이 영원히 구원받는 길을 허락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셔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완성되는 일인 것입니다.
그것이 제 삼일에 완전하여지리라 하신 말씀의 뜻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죽으셔야 할 곳도 알고 계셨습니다.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다고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예루살렘입니까?
갈릴리에서 죽으시면 어떻고, 사마리아면 또 어떻습니까?
왜 하필 예루살렘이어야 합니까?

그것은 제자들의 무지와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의 무지가 서로 달랐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았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에 나타난 것이 제자들이 안 주님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제자들은 바로 알았습니다.
여기까지 안 것도 제자들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마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그러나 제자들이 끝까지 몰랐던 것이 있었습니다.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리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예수님만이 그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조차 그를 버리고 흩어지는 상황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있는 권세자들과 바리새인 그리고 서기관들은 아예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그저 율법을 훼방하는 원수였습니다.
조상의 유전을 파괴하는 대적이었습니다.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였습니다.
그들이 감히 여호와라고도 부르지 않는 이름이 하나님의 이름이었습니다.
죄를 사한다고 떠드는 자였습니다.
죄를 사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셨고, 이를 선포하는 자는 오직 대제사장뿐인데 예수님은 아무 곳에서나 네 죄를 사한다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죽지 말 것을 구했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제자들은 그들의 선생이요, 주인을 죽일 수 없었으나, 예수를 주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알지 못하는 자들은 예수님을 죽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사는 곳이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이 죄인들의 손에 죽으실 수 있는 곳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섭리는 참으로 오묘하고 신비롭습니다.
예수님을 죽인 자들의 손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지 않았습니까?
그렇다고 우리가 주를 죽이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제자들처럼 주를 바로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아는 것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도 주의 제자들처럼 주님 죽으시는 그날에 주를 부인하고, 낙심하고, 두려워하는 자들이 되지는 말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이 아시는 대로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내 앞에 닥친 십자가, 뉘게나 있는 그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죽음으로 끝나는 길이 아닙니다.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길입니다.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무덤에 가둘 수 없는 분이었습니다.
주를 부인하고, 낙심하며, 두려워하지 말고, 골고다 언덕까지 아니 무덤에 이르기까지 주와 동행하여 하나님 곁에서 찬송하는 영광에 이르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을 아셨습니다.

주님이 감람산을 거쳐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셔서, 그 성을 바라보시며 우신 적이 있습니다.
(눅 19:41-44)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왜 우셔야 했습니까?
그 도성이 무너질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나타납니다.
[35]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니라

'예루살렘'의 문자적 의미는 '평화의 기초'라는 뜻입니다.
평화의 성인데 평화에 관한 일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평화하지 못한 도성에 참 평화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이 예루살렘으로 상징되는 이스라엘과 평화하시려고 얼마나 간곡하게 권고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듣지 않으니 그 성의 평화는 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 멸망의 정도가 얼마나 심한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을 정도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얼마나 예루살렘을 사랑하셔서 애를 쓰셨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암탉이 병아리를 모으는 것 같이 그렇게 예루살렘을 당신의 품에 안으시고자 했지만 그들이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라고 말하는 것이 선지자들의 일이었습니다.
(사 55:7)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예레미야도, 호세아도, 요엘과 스바냐, 말라기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렘 3:14, 호 11:7, 욜 2:12, 슥 1:3, 말 3:7)

그 소리를 들은 이스라엘이 어떻게 했습니까?
말라기 선지가 말합니다.
(말 3:7, 개정)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조상들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도다

돌아오라는 말씀에 어떻게 돌아가리이까? 라고 되묻는 족속들이었습니다.
자기들이 하나님을 떠나 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알지 못하는 그들은 마침내 그렇게 말하는 선지자들을 돌로 쳐 죽이는 데에 이르렀습니다.
[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바벨론에 의해 한 번 부서졌던 성읍과 성전입니다.
에스라, 느헤미야가 눈물로 다시 일으킨 성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에는 불과 철저하게 파괴될 예루살렘 성전의 모습이 보이는 것입니다.
너무도 선명하게 보였기 때문에 슬픔을 억제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는 옛날처럼 성전에 임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는 없게 되는 날이 닥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통해서 인간을 만나시게 될 것입니다.
[35]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선지자들의 눈에 보이고, 예수님의 눈에 보여 아는 사실을 막상 무너질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은 다시 오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날은 심판의 날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예루살렘과 같은 것입니다.
무너질 곳입니다.
없어질 곳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이 영원할 듯이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사는 것은 곧 무너질 담장에 기대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속하여 사는 것은 곧 무너질 예루살렘을 일러 평안하다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속한 자들은 그것을 알지 못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이 무너질 것을 아는 자들은 결코 그곳에 머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히 11:13-14)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 라 증거하였으니 [14]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하나님 나라를 알지 못했으면서도 그곳에 소망을 두고, 땅에서는 지나가는 나그네처럼 살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에서 죽고 다시 사심으로 우리에게 그 나라의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곳으로 가는 길을 알려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침내 돌아가야 할 우리의 본향은 하나님의 품입니다.
그곳은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하늘의 도성입니다.
예수를 주로 믿는 자들은 그것을 아는 자들입니다.
무너질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사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깨지지 않는 평화, 영원한 안식을 소망하며, 근심도 두려움도 없이 세상을 사는 자들 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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