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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량 목회, 유급 목회 그리고 공동 목회자비량 목회와 유급 목회는 동전의 양면
신성남  |  canavillage@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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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년 02월 24일 (수) 05:31:15
최종편집 : 2016년 03월 06일 (일) 17:01:29 [조회수 : 4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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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최근에 쓴 부족한 글 '자비량 공동 목회, 교회 부패 쪼개는 날선 검'에서 자비량 사역의 필요성을 논하다 보니, 이에 대한 몇 가지 장단점과 쟁점들이 자연스럽게 표출되는 것 같다. 이는 바람직한 일이며 이러한 문제점과 의문점을 토의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의견들이 수렴되고, 보다 건강한 대안이 제시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하고 있다.

특히 댓글을 통하여 소중한 의견들을 정성껏 올려 주신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를 드리고 싶다. 물론 이분들의 적극적인 참여는 모두가 교회를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에서부터 나온 것이어서, 언제 다시 읽어 보아도 주 안에서 한 형제 됨이 절로 느껴진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런 좋은 의견들이 나올 것이나, 이 글에서는 우선 그동안 나타난 몇 가지 반론과 쟁점들을 중간에 점검하는 의미에서 간략히 검토해 보고자 한다.

'자비량 공동 목회'는 현실적인가

우선 '자비량 공동 목회가 이상적이기는 하나, 현실적이지는 못하다'는 일부의 지적에 대해 논하고 싶다. 그 가장 큰 이유로 자비량 사역자들에게 지나친 짐을 지우는 것에 대한 우려다. 그리고 자비량 사역자가 다른 직업에 투입하는 시간적 제한성으로 인해, 설교 준비나 심방 등 교인의 기대에 충분히 부응하지 못하는 사역을 할 여지가 크다는 내용이다. 이런 지적은 물론 그 이유가 매우 타당하고 적절한 것이라 본다.

그러나 사실 이 두 가지 지적 사항은 처음부터 제기된 근원적이며 핵심적인 쟁점이다. 만일 이 두 가지 약점을 극복할 수 없다면 자비량 목회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자비량 목회'에 '공동 사역'을 조합하여야 한다는 해법을 추가토록 하자는 것이었다.

실제로 자비량으로 동역을 하는 어느 '평신도 교회'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설교를 맡은 사역자는 원칙적으로 심방이나 기타 사역은 다른 동역자들에게 맡긴다. 아울러 교인들에게 "본인도 직장이 있으니, 설교 외에 지나친 기대를 자제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리고 이런 공백을 보완하기 위해 다른 동역자들이 나머지 사역들을 골고루 분배하여 짐을 나누고 있다.

예를 들어 교인들 중에 누구라도 당장 도와주어야 할 위급한 일이 생기면, 이 교회는 새벽 2시에라도 바로 출동할 수 있는 인도자가 별도로 준비되어 있다. 나머지 교회 운영이나 교육, 선교, 봉사 등의 사역도 이런 식으로 합심해서 처리한다고 한다. 이런 유기적인 협력과 동역을 통해, 이 교회는 지금까지 건강하게 잘 성장해 왔다.

그리고 지혜로운 자비량 사역자라면 직업 선택에서부터 신중하게 준비할 것이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해야 하는 고된 직업이나, 또는 수시로 출장을 가거나 비상 대기해야 하는 직업 등은 곤란할 것이다. 하지만 정규 근무 시간이 예측 가능한 교사나 공무원, 또는 영업 시간이 정해진 자영업 등에서는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본다.

단독으로 하는 자비량 사역의 경우는 분명히 위에 지적한 두 가지 쟁점에서 크게 자유로울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비량 공동 목회'는 이를 '현실적으로도 가능케' 해 준다고 거듭 확신한다. 기타 다른 지엽적인 문제들도 교인들이 함께 상의하고 힘을 합친다면 얼마든지 효율적으로 조정이 가능하다고 본다. 즉 작은 교회에서는 사역의 양이 그리 많지 않아서 가능하고, 교회가 커지면 상대적으로 일꾼이 늘어나니 역시 가능하게 될 것이다.

필자는 사실 이 '평신도'라는 용어에도 거부감이 매우 크다. 그냥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기에 부득이 쓸 뿐이다. 교회 내에 평범한 신도가 따로 있고, 평범하지 않은 신도가 별도로 있다는 말인가. 무슨 근거로 목사는 '성직자'이고, 집사나 교사는 '평신도'인가. 모든 신자는 대등하며, 동시에 모든 신자는 평범하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신자들 모두가 '왕 같은 제사장‘이며, 예수님의 친구이며 형제자매이니 어찌 평범한 신도라고 부르겠는가.

이미 교회가 포화 상태이다?

어떤 분은 이미 목회자와 교회가 넘치게 많은데, 이제는 자기 돈까지 동원하여 교회를 더욱 난립시키려 하느냐는 의견을 주셨다. 이런 지적 역시 물론 일리가 있고, 외견상으로도 틀림없이 맞는 말이다. 필자도 신학교가 난립하고, 충분한 목회 자질이 없는 사람들까지 무분별하게 대량으로 배출시키는 것은 반드시 시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마 한국교회 부패와 타락의 간접적인 책임은 이들을 가르치고 졸업시킨 신학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매우 조심스러운 면이 있다. 교회가 많은 것은 사실이나, 필자가 그동안 서울과 지방 그리고 해외의 한인 교회 등 여러 교회들을 출석하며 경험한 바로는 오히려 '교회다운 교회'는 극소수로 정말 찾기가 어려웠다. 이는 필자뿐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분들도 공감하고 동의하는 사실일 것이다. 즉 '교인은 많은데, 제자가 적다'는 지적처럼, '교회는 많은데, 교회다운 교회는 매우 적다'는 것이다.

'교회답지 못한 교회'는 이미 교회의 기능과 역할을 크게 상실한 교회를 의미한다. 이런 교회가 아무리 많으면 뭐하나. 오히려 주의 영광을 가리며, 전도의 문을 막고 있을 뿐인 것이다. 마치 바리새인들처럼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다른 사람도 못 들어가게 천국 문을 막고 있는 셈이다. 이는 차라리 없는 것만도 못한 교회가 아닌가.

반대로, '교회다운 교회'라면 아무리 많은들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는 아직도 국민의 오분의 일도 제대로 복음화하지 못했다. 그리고 눈을 조금만 돌려 우리 주변 가까이에 있는 다른 이웃 국가들을 보시라. 제대로 복음화한 나라가 하나라도 있는지. 먼저 믿는 우리의 도움을 기다리는 무수한 영혼들이 그곳에서 신음하고 있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아직도 방치되어 일꾼을 기다리는 추수할 곡식이 들판에 널려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예배와 성례를 경건히 시행하고, 목회자가 검소하게 살며, 후진들을 바르게 교육시키고, 이웃과 사랑을 나누고, 선교사를 파송하여 복음을 전하고, 그리고 지역 사회의 어려운 이들을 힘을 다해 돕는 건강한 교회라면 많다고 해서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결국은 근본적으로 교회의 질이 문제이지, 양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자비량 공동 목회'는 바로 이 '교회의 질'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으로 제안된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우선 제도적인 면에서라도, 보다 순수하고 튼튼한 교회가 보다 '교회다운 교회'를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다양한 의견들이 토의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자비량 목회가 약방의 감초는 아니다

다음으로 논하고 싶은 것은 자비량 목회가 필요에 따라 가치 있고 좋은 일이기는 하나, 이런 사역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거나 또는 모두가 가야 할 길은 아니라는 점이다. 개인의 은사와 여건에 따라 유급 목회를 할 수도 있고, 자비량 목회를 할 수도 있고, 또한 목회가 아닌 다른 직분으로 교회를 섬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비량 사역은 목회자이든 평신도이든 모두에게 힘들고 어려운 길이다. 때로는 적대적인 선교지에 들어가는 선교사처럼, 반드시 확고한 소명과 잘 훈련된 준비가 필요하다. 따라서 모든 목회자나 교인들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지는 길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 강조하고 싶다.

필자가 '자비량 공동 목회'를 언급한 이유는 그 장점과 필요성을 절감하여 이를 소명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을 위해 제안을 하는 것이지, 모든 신자들이나 목회자들이 가능하면 이 길로 가는 것이 좋다는 뜻은 아니다. 즉 자신도 지기 힘든 무거운 짐을 소명과 여건이 맞지 않는 다른 분들께 함부로 권하거나, 분위기를 조장하는 의도를 지닌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즉 자비량 사역은 필요와 소명에 따라 선택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이지, 모두가 가야 할 길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필자는 어떤 분이 마음으로 이를 결심하고 실천하려고 할 때, 한 번 더 기도하고 심사숙고하라고 말리고 싶은 심정이다.

다만 필자의 사견으로는 적어도 '자비량 선교사'가 될 정도의 각오와 준비가 되신 분들이라면, 다른 자비량 사역도 가능할 것으로 본다. 사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한국교회이지만, 필자는 그래도 그동안에 축적된 한국교회의 역량을 고려해 볼 때, 이런 자원자들이 결코 적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비량 목회와 유급 목회는 서로 보완적이다

또한 '자비량 공동 사역'의 장점을 설명하고 이를 제안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유급 목회는 소명감이 부족한 목사님들이 하는 것으로 비하한 듯한 오해의 여지도 있는 것 같다. 이는 필자가 전혀 의도하지 않는 바로, 자비량 목회와 유급 목회는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보완적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말하고 싶다.

자비량 사역이 성경적으로 문제가 없듯이, 오히려 유급 목회는 더욱 성경적 지지를 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사역의 전문성만을 고려해 본다면, 자비량 사역에 비해 전임 사역이 가능한 유급 목회가 더 유리함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특히 재정적 능력이 충분한 중대형 교회의 경우, 자비량 목회만을 지나치게 고집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미자립 교회나 소형 교회의 경우, 교인 수가 많지도 않고 사역의 부담도 중대형 교회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으니, 우선적으로 '자비량 공동 목회'가 바람직하다고 보는 것이다. 특히 100명 미만의 작은 교회는 교회 예산의 거의 60-80% 정도를 유급 목회자 사례비로 충당해야 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나머지 예산으로 예배당 관리 및 유지와 각 교육 기관 지원 등을 하고 나면 선교나 구제 등 다른 일은 말도 꺼내기 힘들다. 도대체 목사를 위해 교회가 있는지, 교회를 위해 목사가 있는지 정말 헷갈릴 정도인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교회가 성장하여 중형 교회가 된 이후에는, 자비량 사역만으로 계속할 것인가 또는 유급 목회자를 추가로 청빙하여 공동 목회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개교회가 처한 지역적 여건에 따라 지혜롭게 결정하면 될 것이고, 또한 사역자들도 스스로 각자의 소명을 따라 자비량 유무를 결정하면 될 것이다.

'자비량'은 선택으로, '공동'은 필수로 하면 어떨까

즉 자비량 목회는 필요에 따라 융통성이 있게, 선택 사항으로 하자는 뜻이다. 그러나 가능하다면 공동 목회만은 어떤 경우든 필수로 하자고 제안하고 싶다. 더 이상 교회 내에서 한두 사람이 교회를 계급화하여 독선적으로 운영하거나, 교권을 쥐고 흔드는 일만은 필히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공동 사역자들을 확보할 여건만 된다면, '공동 목회'가 '단독 목회'보다 심각하게 단점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특히 중대형 교회에서는 더욱 공동 목회가 중요하고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유능한 설교자들이라고 해도 그 받은 바 달란트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즉 매 주일 한 사람의 설교로 편식을 하는 것보다, 여러 설교자들의 다양한 관점을 보다 입체적으로 보며 설교를 듣는 것이 훨씬 바람직한 일이라는 것이다.

비단 이는 설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목회자 한 사람의 재능과 은사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이미 다른 분들이 지적하였듯이, 목회는 크게 설교, 교육, 선교, 목양 등의 여러 전문 영역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중대형 교회에서 이를 홀로 주관하려는 생각은 지극히 어리석은 발상이다. 여러 사역자가 은사에 따라 이를 분담해서 공동 목회를 하면 이런 문제가 자연히 해소된다.

더군다나 담임목사가 과도한 교권을 가짐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심각한 문제점들은 이미 기존의 여러 교회들에서 우리가 지겨울 정도로 매일 보고 있다. 교회가 커지고 교권이 커지면 목회자들은 소위 흔하게 말하는 '돈과 명예와 여자'의 시험을 받게 된다. 우리 모두가 사역자이기 이전에, 연약한 죄인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꼭 제도적인 제어 장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고양이에게 홀로 생선을 맡겨 놓고, 나중에 고양이만을 탓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부패와 타락은 제도적인 결함에도 큰 책임이 있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이런 강력한 제어 장치의 일환으로 장기적인 관점에서, 적어도 '공동 목회'만은 꼭 우리가 가야 할 길이라고 말하고 싶다.

요약해서 정리하자면, 미자립 교회나 작은 교회는 '자비량 공동 목회'를 우선적으로 채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그러나 중대형 교회에서는 교회 여건에 따라 '자비량 목회'와 '유급 목회'를 선택적으로 또는 혼합해서 하되, '공동 목회'만은 필수로 하자는 것이다.

교회 개혁은 화합과 동역으로

외견상으로 자비량 사역자는 유급 사역자에 비해 더 큰 주목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참된 제자'가 아니라면 자원하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급 목회자라고 해서 '덜 참된 제자'로 보아서는 절대 안 될 것이다. 유급 목회자들도 역시 자신의 삶을 오로지 목회에 헌신하시는 귀한 분들이다. 따라서 자비량 사역자는 더욱 화합에 노력하고 겸손하게 처신을 해야 한다.

또한 자비량 사역의 의도는 유급 사역자들을 무시하거나 부끄럽게 하고, 직업 전선으로 내 몰자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만일 누구라도 이런 생각을 한다면 이는 성경을 크게 오해하는 것이며, 스스로 형제들의 헌신적인 목회를 밥그릇 챙기기로 비하하는 행위가 될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중대형 교회에서는 이 두 종류의 사역자들이 자연스럽게 화합하고 조화를 이루어 동역함으로써 더욱 건강하고 전문화한 목회가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이런 아름다운 공동 목회는 교회의 부패를 크게 억제할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다른 긍정적인 효과도 기대할 수 있어 보인다.

유급 사역자는 전문화에 장점이 있고, 자비량 사역자는 교회의 재정 부담을 줄이며 부패를 제어하는 장점이 있다. 반면에 유급 사역자는 이권에 시험을 받을 수 있고, 자비량 사역자는 시간 관리의 제약성으로 인해 전문성에서 뒤질 수가 있다. 이들이 힘을 합쳐 공동 사역을 한다면, 단점들은 최소화하고 장점들을 극대화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은 교회 내에서 목회자이든 평신도이든 한두 사람에게 지나치게 과도한 짐을 지우는 것은 늘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사람을 지치게 하고 결국에는 시험에 빠트리게 하기 때문이다. 교우들 각 사람에게 그 받은 은사에 따라 적절한 책무를 고루 나누고 동역하는 것이야말로, 공동 사역의 핵심이 되는 정신이 되어야 할 것이다.

'공동 목회'는 교회가 새로워지는 길

언제나 교회 개혁을 억누르고 반발하는 세력들은 사회 일반인들이 아니고, 교회 내에 세속적인 기득권을 막강하게 지닌 교권주의자들이다. 예수님 당시에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었으며, 중세 시대에는 부패한 주교와 사제들이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이들 상당수가 거의 중대형 교회의 담임목사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은 겉으로는 겸손하고 경건한 척 미소를 보여 주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주를 향한 헌신을 호소하기도 하지만, 뒤로는 항상 자신들의 사욕을 채우는 현대판 바리새인들이다. 예배당을 크게 짓든지, 선교에 열을 내든지, 전도에 총력을 다하든지, 힘들게 구제를 하든지, 결국 그러한 노력들은 모두 교인들을 동원하기 위한 하나의 전술적인 눈가림에 불과하고, 최종 목표는 언제나 교세를 확장하여 자신들의 교권과 이권을 키우고 신도들 위에 군림코자 하는 것이다.

때로는 교회 개혁이 영적 전투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이 싸움에서 자비량 목회와 공동 목회는 이들의 탐욕을 골수까지 쪼개는 '좌우에 날선 검'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특히 건강한 공동 목회는 '허수, 허세, 그리고 허상'을 추구하며 이권을 챙기는 교권주의자들의 문전옥답을 초토화시킬 것이다.

교회 부패의 심장은 인간의 타락한 마음속에 있고, 한국교회 부패의 머리는 '담임목사제'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문제점을 명확히 알고도, 이리저리 돌아서 먼 길로 가는 것은 지혜가 아닐 것이다. 필요하면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했듯이, 목회자들 사이에도 강력한 견제와 조정을 가능케 할 제도적 장치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목사님들이 다 교권화하고 사욕을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 나라 구석구석 크고 작은 교회들에는,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제자의 길을 묵묵히 걷고 계신 충성된 '주의 종'들이 셀 수 없이 많다. 그리고 이분들의 순수한 기도와 헌신은 하나도 헛됨이 없이 아름답게 열매를 맺어, 이 땅의 참된 복음화에 진한 밑거름이 될 것임을 결코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제도적인 안전장치가 무력화한 교회는 언제라도 교권주의자들의 온상이 되기 쉽다는 것이다. 공동 목회에서라면, 감히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유화하여 욕심을 채우거나 세습을 시킨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 될 것이다. 또한 다른 여러 부교역자들이 대등한 동역자들임에도 불구하고 부당한 차별을 받고, 단순히 담임목사의 도우미로 전락하는 일도 사라질 것이다. 이런 이유로, '공동 목회 제도'를 확산시키는 일이야말로 의심할 여지없이 한국교회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라고 굳게 믿는 것이다.

목회의 길이란 하나님 말씀을 손에 들고,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교회와 지역 사회를 섬기는 숭고한 길이다. 하지만 사탄은 늘 교묘한 방법으로 사람을 속이고, 편리와 안락함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수천 년 교회 역사 속에 항상 존재해 온 이 영적 싸움은 '순수'와 '비순수'의 싸움이며, '십자가의 도'와 '세속주의'의 싸움이다.

그런데 이 싸움의 길은 단거리 달리기가 아니라, 사도 바울처럼 평생을 걸고 달려야 할 '좁은 길'이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신자들을 지치게 하고 낙심하게 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늘 비둘기처럼 순결하고, 뱀처럼 지혜롭게 처신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제는 우리에게 점점 잊혀져 가는 어느 한 개혁가의 거룩한 소원을 인용하며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역사와 인생의 어두운 부분에, 하나님 말씀의 빛을 비추이게 하자!"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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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자씨믿음 (59.14.89.61)
2012-01-22 19:01:47
지극히 적절한 현실적 대안이라고 생각됩니다.진정 사명감있고 겸손한 자비량 사역자들이 뭉쳐서 각자의 형편을 고려하여 효율성을 극대화 시켜나간다면 이시대에 가장 아름답고 본이되는 주님의 교회로 든든히 세어져갈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주님을 기쁘시게할 믿음과 각오,그리고 용기가 필요할 따름이겠지요~
리플달기
18 22
앵벌이목사. (124.60.170.56)
2010-02-24 20:54:39
지금 앵벌이 목사들 때문에 감리교회가 이렇게 많은 건데요.
사실 지금 자비량 목회 아니구 앵벌이 목회 아닌가. ? 앵벌이 목회도 인정해 주라. 정규 대학 신학대나와 기초수급자도 못되어 , 식구들 먹여살리며 목회 하다보니 한달 일백만원벌기 힘들고 게다가 교회월세, 각종 공과금, 도저히 목회에 전념할 수 없다. 그런데도 교단은 대책이 없다. 도데체 목사 안수 주면 끝이냐!!!
리플달기
17 20
선지자 (218.147.5.134)
2010-02-24 15:09:36
자비량 찬성
자비량목회는 단점보다 장점이 더 많은 듯 하다
리플달기
1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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