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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기복(祈福)종교 맞습니다
박경은  |  0117669763@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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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년 02월 08일 (월) 16:06:36
최종편집 : 2010년 02월 08일 (월) 16:46:36 [조회수 : 3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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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48:12~22


   
“우리 그리스도교는 기복종교가 맞다”고 한다면, 이 말을 듣는 순간.... 여러분의 느낌은 어떨까요? 기분이 좀, 그렇겠지요? 하지만 이를 결코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기복종교임이 맞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예언자 이사야의 글을 통해 알아보고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신령한 복을 구하시며(祈福하시며) 주신 바, 받은 하나님의 복을 넉넉히 감당하시는 하나님의 충실한 자녀들이 될 것을 굳게 결단하시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우리 그리스도교는 ‘복받으라’는 종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들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자청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선포합니다. 하나님 쪽에서 먼저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에 그 초점이 있습니다. 창세기는 이에 대해 잘 증거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달라고 구하기도 전에 이미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인간의 타락 이후에도 하나님은 자청하셔서 사람들에게 복을 주셨을 뿐만이 아니라 주시겠다고 먼저 자발적으로 자원하여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교는 하나님 쪽에서 먼저 ‘복받으라’고 말씀하신 것에 뿌리를 둡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사람을 향해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에 대해 세 가지로 살펴보면 우리 그리스도교는 ‘복’을 중간매개로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돈독히 맺어가는 종교라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알 수 있습니다

먼저 12a를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르시는 그림이 아주 잘 그려집니다. 질문부터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야곱을 부르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부르시면서 그를 향해 또한 이스라엘이라고 반복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여기에는 깊은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인정하셨다는 뜻을 갖고 있는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인정하신 사건, 그 사건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야곱은 하나님께 인정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복주심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힘을 다하여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이긴 사람...(창32:28)

여기서 “하나님을 이겼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전폭적으로 야곱을 복주시겠다고 확정하셨다”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복의 수여자, 복의 결정권자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바꿔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름을 바꿔달라고 먼저 요청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쪽에서 먼저 그의 이름을 바꾸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이름에 걸맞는 복을 주시겠다는 뜻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왜 부르시는가?”를 통해 우리 그리스도교는 복받으라는 종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부르신 것일까요? 복주고 싶으셔서... 주는 복 받으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 하나님의 은총 안으로 부름받아 들어 와 있으니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모든 복을 온전히 잘 감당하시는 기쁨을 누리시게 되길 바랍니다.

또, 14절a를 봅니다. ‘다 모여 들으라’는 초청의 말씀이 나타납니다. 무엇을 들으라는 말씀일까요? 14절을 얼핏 훑어만 봐도 ‘복주신다는 말씀’임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으시지요? 복주신다는 말씀을 들으라는 뜻 아닙니까? 이 구절을 15절과 연결시켜 보시기 바랍니다. 15절에 ‘내가 그를 부르며’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왜 부르셨을까요? 그 이유가 바로 뒤따라 나오지 않습니까? 그의 길이 형통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 무슨 뜻입니까? 그가 복을 받도록 그를 불렀다는 뜻,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기 위하여 그를 불렀다는 뜻, 맞지요?


• 깊이 각성하고 있어야 할 사항

그런데,,, 바로 이 14절, 15절을 통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깊이 각성해야 할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는 슬픔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먼저 부름받아 받게 된 복을 남에게 고스란히 넘겨주는 ‘나중 되는 자’의 슬픔을 겪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실까요? 14절에 나타나는 ‘여호와가 사랑하는 자’는 누구일까요? 야곱일까요? 15절에 ‘내가 그를 부르며 그를 인도하였다’는 말씀에서 ‘그’는 누구일까요? 이스라엘인 야곱을 가리키는 말씀이 틀림없습니까? 아닙니다. 놀랍게도 여기서 “여호와가 사랑하는 자, 그”는 이방인 고레스 왕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잘 알지도 못하는 이방인 고레스 왕을 하나님께서 부르셨단 말씀이지요. 왜 하나님을 잘 알지도 못하는 이방인 왕 고레스를 부르신 것일까요? 답은 15절 끝에 나와 있습니다. ‘그 길이 형통하리라!’ 곧 복을 주시기 위해 이방인도 부르시는 하나님이심을 예언자 이사야가 밝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먼저 부름받은 우리들...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분명한 사실은, 먼저 부름받은 이 부르심의 은총을 저 옛 시대 이스라엘이 거절했다가 혼났던 것처럼 그런 불행을 반복하지 말고 먼저 부르심을 입은 그 은총의 상급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교훈을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의심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이유는 복을 받게 하기 위함이므로 당연하게도 우리 그리스도교는 복을 받으라는 종교라는 사실입니다. 이에 대해 말씀 한 구절 같이 봉독하심으로 분명하게 우리들의 마음에 다져넣을 수 있길 바랍니다. 51장 2절을 다함께 한 목소리로 봉독하시겠습니다.

사51:2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낳은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 아브라함이 혼자 있을 때에 내가 그를 부르고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하게 하였느니라

어떻습니까? 우리 그리스도교는 복받으라는 종교, 그래서 복을 추구하는 종교라는 사실, 맞지요. 그러므로 먼저 부름받아 현재 이 자리에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는 저와 여러분 모두 하나님께서 주시겠다는 복을 잘 감당하시는 식구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과거에 받았던 복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충실했던 예전 모습을 돌이켜 보세요. 복받은 경험이 없습니까? 처음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했을 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체험을 하였던 예전 교회 생활 때, 지금 돌아보면 그것은 분명 과거에 받았던 복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바로 그 과거에 받았던 복을 곱씹어 볼 때 지금도, 그리고 내일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는 종교가 우리 그리스도교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말씀이지요.

21절 말씀을 같이 보시겠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기록한 내용입니까? 출애굽기를 통해 나타나는 이스라엘이 받았던 복을 회상하는 내용이지요? 그들이 노예로 있었을 때 애굽을 나오게 하신 하나님의 은총이 어떻게 나타났었는지를 돌이켜 보면서 하나님은 복받으라고 하시는 분,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이심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막을 통과해 냈습니다. 단순히 지나간 것이 아닙니다. 사막에서 살면서 사막이 주는 고난을 이겨냈습니다. 그 때 그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복을 받았습니다. 어떤 복을 받았을까요? 놀랍게도, 그들은 천연 암반수를 마시면서 사막에서의 목마른 생활을 아무런 탈도 없이 잘 지냈습니다. 천연 암반수... 얼마나 시원하고 영양가 만점인 물입니다. 생명의 물... 갈증을 없애는 물, 이것은 단순히 육신을 위한 암반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목마르지 않도록 인생을 쾌활하게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생명수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예언자 이사야의 글인 본문에 만나와 메추라기에 관한 언급은 없군요. 그러므로 저도 오염치 제로인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으며 사막생활을 보냈다는 것에 대해서는 생략하고 지나가겠습니다.

이러므로 분명한 것은...지난 옛 적에 받았던 하나님의 복을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이시므로 당연하게도 우리 그리스도교는 복받는 종교라는 사실입니다. 복받은 종교인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을 통해 지난 날의 연장선상에서 계속 하나님의 복을 받으시게 되길 바랍니다.


[3]하나님의 성향을 볼 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 택하신 백성을 끝까지 인도하시려는 분이심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한 번 약속하신 약속을 끝까지 이루시기 위해 한결같이 활동하시면서 우리와의 만남을 추구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 성향을 안다면 우리 그리스도교는 복받으라는 종교, 그러므로 주시겠다는 복을 추구하는 기복종교라는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성향을 갖고 계실까요? 12절b를 볼 때 하나님은 언제나 변치 않는 한결같은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과 마지막이 여전하신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과 나중이 다르고 처음과 나중에 차이가 있는 분이 아니라 처음과 끝이 동일하고 처음과 끝이 똑같으신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분이시기 때문에 창세기에 나타나는 하나님은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한결같은 분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복주시겠다는 약속 또한 변함없이 일관되게 유지하시는 분이심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자발적으로 먼저 약속하신 ‘복주시겠다’는 말씀에 근거해 볼 때 우리는 변치 않는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하나님께서 보증해 주시는 복을 받게 되는 겁니다.

13절을 보실까요?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사람에게 다 주셨다는 것 아닐까요?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모든 것을 사람에게 아낌없이 다 내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의 독생자마저 우리에게 주셨다는 말씀이지요. 왜요? 복주시는 분이시니까요.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성향을 갖고 계신 분이시기 때문에 사람에게 모든 것을 다 주시되 그 외아들마저 주셨던 겁니다. 이것이 바로 복주시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들의 신앙고백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복받은 경험없다면 이런 고백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은 복을 주시려는 성향을 가지신 분이시므로 그리스도교는 복받는 종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복을 기원하는 기복종교의 사람들입니다!

이 사실은 15절b를 통해서도 잘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인도하시되 형통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 나타나는 사람이 누굽니까? 이방인 고레스입니다. 이방인 고레스에게도 복을 주시는 하나님, 복주시고 싶으셔서 복받을 만한 사람들을 찾아다니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으십니까? 이토록 하나님은 복을 주시려는 성향을 가지신 분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우리의 신앙경전인 성경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에 우리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다는 사실을 17절을 통해 확인하게 됩니다. 다같이 17절의 말씀을 함께 천천히 봉독하시겠습니다.

“너희의 구속자시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이신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로라”

우리를 유익하게 하시는 하나님, 복을 받기에 합당한 길, 복받는 사람이 가야하는 마땅한 길로 인도하시는 복주시는 하나님, 이런 분이신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준비된 복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감당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이러므로 우리 그리스도교는 분명 기복(祈福)종교 맞습니다

“그리스도교는 기복(祈福)종교이다”라고 말할 때 반론하실 분 있으신가요? 문제는 미신적인 기복이 문제인 것이지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일확천금을 기대하는 무노동 졸부 심보, 아무런 투자도 없이 앉아서 다른 사람이 심어놓은 열매를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놀부 심보, 바로 이런 왜곡된 미신적 기복이 문제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교를 왜 기복(祈福)종교라고 하는 것일까요? 다른 말 없습니까? 저 개인적으로는 복을 구하는 종교라는 의미를 미신적 기복종교와 구별할 수 있는 적절한 다른 말로 바꾸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독특한 복 구하기 특성이 미신적인 기복과 혼용이 되어서 그리스도교는 기복종교라고 말할 때 그 수준이 곤두박질하는 것 같아서 기복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현재로서는 적당한 다른 말이 없습니다. 한자어의 기복에서 기(祈)를 대체할 수 있는 다른 말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를 않군요. 어쨌든 부인할 수 없게도 우리 그리스도교는 복을 기원하는 종교, 복을 (간)구하는 종교, 복을 청구, 요청하는 종교이므로 기복종교인 것 맞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통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1]첫째로,

우리 그리스도교는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주시기 위해 준비해 놓으신 예정된 복이 있음을 볼 때 사람의 입장에서 그 예정된 복을 청구할 수 있으므로 의심할 수 없게도 우리의 종교는 기복종교입니다.

18절~19절은 바로 우리 그리스도교 왜 기복종교인지를 정확히 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평강의 복을 강같이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공의의 복을 바다같이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이런 복을 준비해 놓으신 하나님은 그 자손들이 모래 같이 많아지길 바라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이 끊어지지 않기를 바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시고 싶어 하시는 복의 내용과 주시고 싶어 하시는 복을 얼마큼 주시길 원하시는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강 같다, 바다 같다’는 표현은 한 마디로 넘치도록 부어 주시겠다는 풍성함, 풍요로움을 말합니다. 그리고 ‘모래알 같다’는 표현 역시 풍성함, 풍요로움을 나타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여기서 그리스도교가 갖고 있는 복은 곧 “성공과 번영으로 이어지는 복”이라는 명제가 나타납니다!!!


[2]둘째로,

그러면 이 표현들을 통해 어떻게 “성공과 번영으로 이어지는 복”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준비된 복임을 알 수 있을까요?

18절의 ‘평강’은 단순한 마음의 평화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강은 ‘성공한 평화의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개입하심과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인간 세계의 혼돈과 고난과 아픔이 정리되어 평안해진 상태, 곧 혼돈이 끝나고 고난이 멈추며 아픔이 치유된 상태로서 이것은 곧 ‘성공적으로 이뤄낸 평화의 상태‘를 말합니다. 사과나무 밑에 누워서 사과 떨어지기 만을 바라며 입벌리고 누워있는 상태같은 그런 평안이 아닙니다. 고난과 아픔과 혼돈과 맞서 싸워서 취득해 낸, 그래서 성공적으로 성취한 평안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평강은 성공이라는 개념과 직결된 복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것을 자신의 돈욕심, 명예욕심, 신분상승 욕심에 연결시켜 하나님을 알라딘의 요술램프에 나오는 마술거인처럼 생각하는 방자한 태도이지요. 서로 나누고 누리는 평강이 아닌, 자신만의 배를 위한 성공을 목적하여 하나님을 개인적인 신으로 추락시키는 미신적인 신앙생활이 문제란 말씀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저와 여러분이 있으므로 인하여 혼돈된 상태가 정리되고, 아픔이 있는 곳에 치유가 있으며 고난이 있는 곳에 위로와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므로 성공적으로 성취된 하나님의 평강이 만들어진 복의 사람들, 복을 나누는 사람들이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한편, 자손이 모래 알 같이 많아진다는 말씀을 곰곰히 생각해 보세요. 이것은 자손번성을 나타내는데 솔직히... 숫자만 많으면 뭐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자손 번성은 곧 리더의 역할과 직결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변 민족보다 가장 약한 이스라엘을 택하실 때 숫자만 늘려 놓으시려고 택하신 것일까요? 아니지요?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하고 이스라엘을 통해 세상을 인류구원이라는 커다란 복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것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번성을 통해 이스라엘의 리더쉽의 복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인데 우리들 요즘 말로 말하면 ‘잘 나가는 지도자’의 복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훌륭한 리더가 그 공동체를 이끌 때 그 공동체는 번성하는 공동체가 됩니다. 리더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공동체를 이용할 때에는 곧 그 공동체는 부서져 망가지게 되지요. 그러므로 공동체가 잘 된다는 것, 공동체가 번성한다는 것, 번영하는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잘 나가는 리더의 복이 있어야 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리더가 리더 역할을 제대로 잘 하지 못한다면 그 공동체가 어떻게 번성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리더 된 여러분, 사회에서 직장에서 리더 된 여러분이 속해 있는 공동체의 번성을 위해 하나님께 구하세요. 기원하세요. 청구하세요. 요청하세요. 두드리고 찾고 간구하세요. 내가 속한 나의 공동체가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래알 같은 번성과 풍요가 깃들도록, 참으로 부러운 풍요롭고 번성하는 번영의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리더의 역할에 큰 복을 쏟아 부어 달라고 기원하세요.

저는 저에게 허락해 주신 이 목양 공동체의 번성과 풍요를 위해 목회의 성공을 기원하겠습니다. 물론, 교인들 숫자만 늘려 놓는 목회, 대형교회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따로 있다면서 교인들의 헌금으로 무언가를 이루어 보려는 목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연맺게 해주신 교우들과 하나님 나라를 위한 목회가 되길 기원하겠습니다. 목회의 리더로서 이 믿음의 공동체가 잘 되고, 이 믿음의 공동체가 영적인 복을 풍성히 받고 세상에서 감당해야 할 역할을 잘 감당하는 공동체로 번영해 나가도록 하나님의 영을 풍성하게 부어달라고 간구하겠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여러분들을 통해 여러분의 공동체, 여러분이 속해 있는 모임체가 잘 나가는 모임체가 될 수 있도록 번영의 복, 번성의 복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구하고 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그리스도교회는 그렇게 함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더욱 더 돈독하게 만들어 가는 기복종교이기 때문입니다.


[3]셋째로,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복은 명예의 복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름이 망령되이 불린다는 것은 그 존재의 정체성에 대한 태도와 직결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스스로 존귀히 여기시는 하나님은 우리들의 존재와 정체성을 소중히 여기셔서 그 이름이 존귀히 여김받게 하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사막을 지나 가나안 땅에 들어서기 전에 정탐꾼들이 미리 가나안 땅에 잠입해 들어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그들을 숨겨주었던 라합은 이스라엘의 이름이 주는 무게로 인해 자기들의 종족들이 두려워하고 있음을 알려 주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이스라엘이라는 노예들의 이름... 그 이름이 두려움을 주는 이름이었던 겁니다. 그러므로 이름이 주는 가치, 이름이 갖는 존귀성, 이름이 나타내는 정체성이 얼마나 소중한 복이겠습니까?


• 이름이 주는 유명세

둘째 녀석 반에 요즘 한참 많이 나오는 연예인 동급생이 있다고 합니다. 녀석 졸업식 때 같은 반인 그 아이는 여자애들에게 사인해 주느라고 정신이 없었다고 하더군요. 그 녀석의 이름 석자는 학교를 유명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 아이의 이름으로 인해 학교가 유명해지고 그 아이와 같은 반이라는 것 한마디만 던져도 ‘정말야? 얘기 좀 하자...’ 뭐...이렇게 됩니다. 이것이 이름이 주는 유명세, 가치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복, 그 복중에 이름의 가치를 드높이는 복이 있군요. 감격스럽지 않습니까? 아무개... 그 이름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아무개... 그 이름으로 받은 복의 진가가 드러나게 된다면 그 이름이 갖는 의미, 그 이름이 갖는 무게, 그 이름이 갖는 중요성... 이 얼마나 큰 복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구하십시요. 요청하십시요. 내 이름 석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시고 내 이름 석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나고 내 이름 석자를 통해서 받은 복이 증거되도록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복을 간구하십시요. 왜냐하면, 우리 그리스도교는 그렇게 하는 기복(祈福)종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무리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 이름 석자 세상에 알리려고 명예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정상적이고 통상적이며 상식적인 신앙의 방법을 통해 하나님의 선물을 받는 길을 가므로 형통의 복을 성공적으로 이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함께 나눈 말씀을 정리해 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복을 받으라는 수복종교(受福宗敎)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복의 수여자이시고 그 복을 받는 우리는 수복자(受福者)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복받게 하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이시므로 그리스도교 안에 있는 사람들은 복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하나님이 주시겠다는 복(授福)을 감사함으로 받는 수복(受福)종교라는 사실은 예전에 복받았던 경험을 통해 확인됩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교는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싶어하시는 성향을 가지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통해 우리 그리스도교는 복받는 종교임을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또, 우리 그리스도교는 복을 구하는 종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복종교(祈福宗敎)입니다. 기복이라는 말이 주는 부정적인 의미를 벗어나기 위해 다른 말로 바꿀 수 있길 바라지만 현재로는 분명히 기복종교 맞습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복을 요청하는 종교이기 때문에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 준비된 복은 풍요와 번성의 복이며 명예의 복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안에는 성공의 개념도 들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풍요를 성공적으로 이룰 수 있어야 하고 번성도 성공적으로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복과 우리의 관계성을 볼 때 그리스도교는 틀림없이 기복종교 입니다.

올 한 해 하나님이 준비해 놓고 받으라는 복 받으시며 우리의 구하는 바 하나님의 예비된 복을 기쁨 가운데서 성공적으로 누리시는 복된 믿음의 여정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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