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 > 박성규 설교
부름 받은 자미리 보는 교회력 설교/주현절 후 네 번째 주일(20100131)
박성규  |  theos53@hotmail.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입력 : 2010년 01월 28일 (목) 10:22:35
최종편집 : 2010년 01월 28일 (목) 10:42:35 [조회수 : 3291]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주현절 후 네 번째 주일(20100131)
성서일과/ 시 71:1-6; 렘 1:4-10; 고전 13:1-13; 눅 4:21-30
본문/ 예레미야 1:4-10                                                                                                                                부름 받은 자

          (렘 1:4-10) 『[4]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5]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6]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 할지니라 [8]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9]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10]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를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


부름 받은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성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별명으로 예레미야서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다윗의 길을 따른 유다의 마지막 왕인 요시야 13년에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았습니다.
요시야는 선한 임금이었고, 31년 간 왕위에 있었으므로 예레미야는 요시야가 살아 있을 동안에는 크게 힘이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시야가 애굽과의 전쟁에서 전사하고 난 후, 유다는 애굽의 속국이 되었고,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는 등극하자마자 애굽으로 끌려갔습니다.
여호아하스가 애굽으로 끌려가자, 요시야의 다른 아들인 여호야김이 등극하였습니다.
여호야김의 뒤를 이어 여호야긴 그리고 시드기야가 등극했는데 그의 시대에 마침내 유다가 망하고 말았습니다.

요시야의 뒤를 이은 왕들은 하나같이 다윗과 요시야의 길을 따르지 않은 악한 왕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왕으로 다스리던 기간도 길지 않았고, 그 결말은 하나같이 불행했습니다.
예레미야가 외로움과 고통 가운데 눈물 흘리며 활동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그 힘든 일을 하도록 부름 받는 장면입니다.
하나님과 예레미야 사이에 오고간 이야기를 예레미야가 들려주는 형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본문의 순서대로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쪼록 주시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을 깨닫고 순종함으로 감당하는 성도들 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4]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

예레미야는 제사장의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렘 1:1] 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 중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의 말이라

만약 하나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들리지 않았다면 그는 율법이 정한 바에 따라 제사장이 되었을 것입니다.
제사장이 되는 것 그것이 그에게 주어진 운명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니 그의 운명이 변했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양치는 늙은이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니 그는 이스라엘의 해방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주님의 교회를 핍박하는 자였습니다.
그런 그에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하시는 말씀이 임하니 변하여 주를 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운동력이 있다고 합니다.
운동력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이 시간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변하는 시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맞추어 나를 바꾸어야 하겠습니다.
바꿀 수 없는 운명처럼 생각되는 나의 삶이 이전과는 달라져야 하겠습니다.
제사장으로 태어난 예레미야가 그 삶을 바꾸어 예언자가 된 오직 한 가지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새로운 사람, 주님이 원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기원합니다.

[5]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복 중에 짓기 전에 알았고, 태에서 나오기 전에 구별했다고 하십니다.
예레미야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사야가 말했습니다.
          (사 49:1) ... 여호와께서 내가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가 어미 복중에서 나옴으로부터 내 이름을 말씀하셨으며...

바울도 그랬습니다.
          (갈 1:15) ...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장로교에서는 이런 말씀들을 예정론의 근거로 삼습니다.
하나님의 부름 받고, 구원 얻을 자들은 하나님이 미리 정해 놓으셨다는 것이 예정론입니다.
그렇게 볼 수 있는 여지가 없지는 않지만 우리 감리교에서는 예정론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정론을 끝까지 밀고 나가면, 하나님이 다 정해 놓으셨는데 인간이 나서서 애쓸 일이 있겠느냐는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복잡한 교리논쟁을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니, 이 말씀의 분명한 뜻을 알면 되겠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이 여호와를 복중에서부터 알았고, 모태에서 구별하셨다는 말씀을 한 마디로 줄이면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지으셨다는 뜻입니다.
다윗의 고백과 같습니다.
          (시 139:13)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어미는 자식을 잉태할 때부터 어미가 됩니다.
아비는 자식이 태어나야 비로소 아비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잉태되기 전부터 이미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머니라 부르지 않고 아버지라 부르는 이유는 우리가 모태에 있기 전,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이사야가 말합니다.
          (사 64:8) ...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복중에 있기 전부터 알았다고 하시는 것은 내가 너를 지었기 때문에 너를 잘 알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너를 낳은 아비와 어미보다 너를 더 잘 안다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태에서 나오기 전에 구별하셨다는 것은 너는 내 것이니, 내가 내 뜻을 따라 쓰기로 했다는 말씀입니다.
어디에, 어떻게 쓰실지 이미 정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우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열방에 전하는 자로 쓰시겠다는 말입니다.
크게, 중하게, 귀하게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알고 계십니다.
나를 낳은 부모보다, 아니 나보다도 더 나를 잘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 분이 쓰시는 대로 쓰이는 것이 자장 좋은 일입니다.
설령 그 길이 눈물의 길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를 지으신 분이 가라고 하시는 길이라면 가는 것이 좋다는 뜻입니다.
지음 받은 자는 지으신 분의 뜻대로 쓰일 때 가장 잘 쓰이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말합니다.
          (사 45:9)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자로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를 대하여 너는 무엇을 만드느뇨 할 수 있겠으며 너의 만든 것이 너를 가리켜 그는 손이 없다 할 수 있겠느뇨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것이 가장 좋은 길입니다.
순종하는 자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6]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을 때 예레미야의 나이가 스물이었습니다.
그 크고 중한 일을 감당하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이라 말을 할 줄 모른다고 합니다.
슬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지만 내게 그만한 능력이 없어 안타깝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은 예언자의 일 곧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하여 전하는 일인데 그 일을 감당할 만한 그릇이 되지 못해 슬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모세도 그랬습니다.
내 백성을 해방하라고 바로에게 전하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모세가 말했습니다.
          (출 4:10) ....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그 때 모세의 나이가 팔십이었습니다.
결코 어리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본시부터 말하는 것에는 자신이 없다고 말합니다.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이 쓰시고자 만드신 그릇의 크기보다 자기를 작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진짜 자기의 크기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의 가치를 낮추어 보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어려서, 늙어서, 배우지 못해서, 가난해서....
우리는 부족하고, 약해서 할 수 없는 이유를 찾아내는 것에 골몰합니다.
그리고 예레미야처럼 슬퍼하고, 모세처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신 자들입니다.
만물보다 뛰어나게 하시고,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지어진 자들입니다.
          (시 8:4-7) [4]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5]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6]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 [7] 곧 모든 우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기쁨이요 즐거움입니다.
          (시 16:3)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지으신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나보다 언제나 크고, 귀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 할지니라 [8]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양하고, 주저하는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아이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명하시는 바를 따라 어디든지 가고, 무슨 말이든지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스무 살이나 먹었으니 이제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너 혼자 하는 일이 아니요, 내가 함께 하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니, 나이가 문제될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어린 네가 감당치 못할 일이 닥쳐도, 내가 너와 함께 있어 구원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비 집을 떠나 홀로 광야에서 밤을 맞은 어린 야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창 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다 늙어 죽음이 가까운 나이에 애굽으로 가는 야곱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창 46:4)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정녕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

어린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늙은 것도 걸림돌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아무리 약해도 강합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면 아무리 강해도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은혜입니다.
나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을 주의 은혜로 능히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말합니다.
          (고전 15:9-10)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 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런데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당신이 부르신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지으신 자, 곧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 43:1-3) [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3]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

조성하시고, 지명하여 부르셨으니 내 것이라고 하십니다.
내 것이기 때문에 빼앗기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지으셨기 때문에 구원하시라는 말씀입니다.
부름 받은 자의 일이 아니라 부르신 당신의 일이기 때문에 버려두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이 지키시기 위해 함께 하심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음 받은 자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감사하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지으신 자들을 그냥 버려두시지 않고 지키시는 여호와의 능력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 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9]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예레미야는 선지자 곧 예언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손을 예레미야의 입에 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예언자의 정체를 분명히 밝혀주는 말씀입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입니다.
그가 전하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 입술에 두신 말 곧 맡겨 두신 말입니다.
점치는 자가 장래의 일을 미리 말하는 그 예언(豫言)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입에 맡겨두신 말 곧 예언(預言)입니다.

선지자는 다른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사람보다 먼저 들어 아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사람이 예언자요, 선지자인 것입니다.

예언자는 다른 말을 하면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이 맡겨 주신 말만을 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맡기시지 않은 말을 하는 자들이 거짓 예언자입니다.

이사야가 부름 받을 때의 일입니다.
이사야는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기뻐하며 찬송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절망에 빠져 탄식했습니다.
          (사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그러자 하나님은 스랍을 시켜 불이 지펴있는 숯을 이사야의 입술에 대며 말했습니다.
          (사 6:7)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이사야의 부정한 입술이 사하여진 후 그는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예언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먼저 입술을 정하게 하신 까닭은 하나님이 맡기신 말씀 이외에 다른 말을 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들입니다.
이 시간은 하나님이 당신의 말씀을 우리 입술에 두시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다 선지자들입니다.
세상이 아직 알지 못하는 것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아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정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는 대로 받고, 그 말씀대로 전하는 자들 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10]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를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

예레미야의 입술에 두신 말씀의 내용입니다.
두 가지 전혀 다른 말씀을 두셨습니다.
하나는,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는 말씀들입니다.
다른 하나는, 건설하며, 심는 말씀입니다.
뽑으며, 파괴하고, 파멸하며, 넘어뜨리는 말씀은 무서운 심판과 저주의 말씀입니다.
건설하며, 심는 말씀은 아주 버리지 않으시고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리라는 말씀입니다.

심판과 저주의 말씀이 네 가지인데, 구원의 말씀은 두 가지입니다.
다시 심고, 건설하시는 일은 하나님에게는 쉬운 일입니다.
없는 데서도 있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파괴하고, 무너뜨리는 일은 하나님에게도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아픔이 따르는 일입니다.

피조물의 탄식과 신음은 그를 지으신 하나님의 아픔이요, 슬픔입니다.
예레미야가 눈물로 전할 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예레미야의 눈물은 이스라엘의 눈물이요, 하나님의 눈물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면서 그 일을 해야 하는 것은 다시 심고, 건설하기 위함입니다.
무서운 심판과 저주가 임한 후에라야 다시 건설하고, 심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심판과 저주의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를 미워했습니다.
다시 심고, 건설하는 구원의 말은 들리지도 않았습니다.
곧 닥치리라는 저주의 소리, 심판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잇따르는 불길한 말들에 진저리를 치며 어떻게 하면 저 입을 막을까 궁리했습니다.
심판과 저주의 말을 먼저 전할 수밖에 없는 슬픔에 동족으로부터 오해를 받고, 핍박을 당하는 슬픔이 더해졌습니다.

다르게 말하는 예언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짓 예언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맡겨 두신 말씀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듣기 좋은 말을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예레미야가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렘 9:8) 그들의 혀는 죽이는 살이라. 거짓을 말하며 입으로는 그 이웃에게 평화를 말하나 중심에는 해를 도모하는도다

거짓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은 어떠하든지 사람에게 좋은 말만 하는 자들입니다.
사람에게 좋다 하지만 실상은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결국은 심고, 건설하는 말씀, 구원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철저한 심판 다음에 임하는 은혜입니다.

거짓 예언자들의 말은 심판의 말을 생략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들의 말은 예레미야가 심고, 건설하는 말과 같았습니다.
얼핏 듣기에는 그 말이 그 말인 것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거짓 예언자의 말은 머리는 잘리고, 꼬리만 남은 말입니다.
곧 무너질 듯 기울어 있는 건물에 한 층을 더 올리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예레미야가 눈물을 흘린 진짜 이유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이스라엘의 어리석음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기울어 넘어지기 직전의 위험을 알지 못하고, 여전히 평안하다는 말을 믿는 그들의 미련함이 그를 슬프게 했고, 마침내 넘어지는 모습을 보아야 하는 것이 아픔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길은 결코 순탄한 길이 아닙니다.
어렵고 힘든 길, 좁은 길입니다.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장 좋은 길, 편한 길로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름 받은 사람들은 당장이야 어떻든 하나님이 가라시는 길로 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 7:13-14)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예례미야가 간 길이고, 우리 주님이 가신 길이기도 합니다.
또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길이 어렵다고 포기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외로운 길이어서 갈 수 없노라고 말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아직은 힘이 모자라니 조금 더 있다가 가겠다고 해서도 안 되겠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8]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부르신 자들과 함께 좁은 길, 협착한 길을 가시는 분입니다.
가는 길은 험해도 안전한 길입니다.
물이 삼킬 수 없고, 불이 사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자들은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어서 하나님이 지켜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레미야를 부르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예레미야에게 주신 사명을 우리에게도 주셨습니다.
시대가 다르고, 사람이 달라도 주신 사명이 어렵고 힘든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부르심에 순종하는 자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마침내 은혜의 찬송, 구원의 찬송을 부르리라는 믿음으로 사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관련기사]

박성규의 다른기사 보기  
기사를 추천하시면 "금주의 좋은 기사" 랭킹에 반영됩니다   추천수 : 3055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의견나누기(0개)
 * 11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22400byte)
 * [운영원칙] 욕설, 반말, 인신공격, 저주 등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은 글과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올린 글은 통보 없이 삭제합니다.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20-012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2가 35 기사연빌딩 401호 ☎ 02-393-4002(팩스 겸용)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심자득
제호 : 당당뉴스  |  등록번호 : 서울아00390  |  등록연월일 : 2007.7.2  |  발행인 겸 편집인 심자득(010-5246-1339)
Copyright © 2005 당당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dangdang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