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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도 제자가 되자목사를 위한, 목사에 의한, 목사의 교회
신성남  |  canavillage@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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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년 01월 09일 (토) 17:37:16
최종편집 : 2016년 03월 06일 (일) 16:42:52 [조회수 : 3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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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주변에서, "주객이 바뀌었다"라는 안타까운 말을 자주 듣는다. 우선 정치권을 보면 그 말이 이해가 간다. 국민이 주인이고 정치인이 하인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다음으로는 교회가 또한 그렇다는 것이다. 많은 교회에서 목사가 교회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목사를 모시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시고 교인들은 주의 자녀들인데, 스스로 '주의 종'이라는 하인 신분의 목사들이 위치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왕 같은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비판자들의 입에서 '예수교'가 아니라, '목사교'라는 조롱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목사들의 이런 무법적인 행위는 이제 극에 달해서, 교회를 사유화하고 세습화하는 악습이 아예 노골적으로 정착화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이렇게 목사가 교회의 우상이 될 정도로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오히려 많은 귀족 교회들은 비대한 몸집으로 평안과 축복만을 노래 부르고 있다. 또한 이들 귀족 교회들의 영향력 아래 있는 대부분의 기독교 언론들도 이들의 충실한 나팔수가 되어 그 빛을 잃은 지 이미 오래인 것으로 보인다.

교회의 양극화

 

   
강원 속초 오봉교회의 강단

그런데 이런 담임목사의 독주가 대형 교회에서 더 심하고, 중소형 교회에서는 덜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중소형 교회에서의 독선과 부조리가 더욱 쉽게 눈에 띠기 때문에, 그 부작용이 더 직접적으로 피부에 와 닿는 것이다. 최근 어떤 분의 지적대로, 이런 중소형 교회에 지치고 실망하여 대형 교회로 옮기시는 분들도 적지 않다는 사실이 이를 잘 증명해 주고 있다.

사실 크기에 관계없이 많은 교회들이 병들어 신음하고 있으나, 그나마 대형 교회를 가면 다양한 프로그램은 물론 풍부한 인적자원으로 인해 개인적인 부담감도 훨씬 적어진다. 또한 상대적으로 담임목사의 독선적이며 직접적인 간섭으로부터 보다 자유스러운 신앙생활이 가능해지기 때문인 것이다.

이분들의 결정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현재 한국 교인의 80%나 되는 사람들이 소수의 중대형 교회에 출석하고 있으며, 겨우 20%의 교인들만이 전체 교회의 80%나 되는 작은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는 이유가 부분적으로나마 설명이 되는 것이다. 물론 작은 교회의 영세하고 열악한 환경 때문이라는 다른 큰 이유도 있다.

특히 놀라운 사실은 한국 교인의 거의 과반수가 아주 극소수의 대형 교회에 다니고 있다는 점이다. 더구나 '한국교회살리기운동본부'에 따르면 현재 전체 교회들 가운데 60% 이상이 교인 50명 미만의 미자립 개척 교회인 것으로 파악됐다. 이런 극심한 양극화 현상은 대형 교회가 잘해서 생긴 것이라기보다는, 중소형 교회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인 약점이 더 큰 원인이라 생각된다.

더우기 담임목사의 주도로 건축 헌금이나 십일조를 강요하는 분위기도 역시 교회의 양극화를 더욱 가속시키는 데 크게 일조하고 있다. 작은 교회에서는 이를 충분히 못 낼 경우 쉽게 노출이 되고, 목사나 다른 교인들 보기에 거북스러워지기 때문이다. 특히 초신자들은 이로 인해 더욱 큰 상처를 입고 교회를 떠나기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담임목사들의 독주와 잘못된 지도력은 교회의 크기 분포에 지대한 영향을 줄 정도로 중요한 변수가 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 결과로 작은 교회는 항상 사람이 너무 부족하고, 큰 교회는 건물이 매우 모자라는 차마 웃지 못할 일들이 일어나는 데에 크게 내조하고 있는 셈이다.    

수동적인 당회와 제직회

어쨋든 크기에 관계없이, 거의 모든 교회에 당회니 제직회니 하며 제법 교인들의 의사 참여가 가능한 조직들이 구성되어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그 활동 내용을 들여다 보면, 기존의 정규적인 사업이나 행사 그리고 사소한 일 처리는 잘하는지 몰라도 신규 사업, 해외 선교, 예배당 건축, 부교역자 인사, 예산 책정, 외부 강사 섭외 등 기타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능동적이며 창의적인 의사 결정 능력이 매우 취약하다는 것이다.

물론 예외도 있겠지만, 그들 대부분은 그저 담임목사가 결정하고 제시하는 정책을 수동적으로 승인하고 추종하는 거수기 역활을 성실히 하고 있다고 보면 지나친 비하일까.

가장 안타까운 일 중 하나는, 대부분의 교인들은 그저 별로 반대 의견 없이 항상 '조용한 교회'가 매우 '은혜로운 교회'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런 안일하고 무지한 인식 덕분에, 많은 교회들이 담임목사의 독주 속에서 날마다 조용히 썩어 가고 있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한국교회 내에서, 담임목사의 잘못된 정책에 반대하는 의견을 정당하게 밝히고 이를 추진하여 당회나 제직회를 설득할 수 있는 풍토가 갖추어진 교회가 몇 교회나 있을까 심히 궁금하다. "우리 교회에서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아마 일부 극소수의 교회를 제외하고는, 거의 드믈 것으로 보인다.

한국교회 안에서 이제 담임목사의 자리는 거의 성역화한 듯하다. 목사 의견에 조금이라도 반대를 표명하면 대부분의 목사들은 마치 영권에라도 도전을 받은 듯 자존심이 상해 펄펄 뛰고, 교인들 역시 감히 귀한 목사님에게 대든다고 난리가 나는 것이다. 광신도들을 거느리는 이단이나 사이비 종교 교주들만 흉을 볼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바른 길을 의연하게 걷고 계시는 존경할 만한 목사님들도 적지 않지만, 도대체 무슨 근거로 다른 많은 목사님들은 이렇게 왕이 되어 안하무인으로 군림하게 된 것일까.

그들은 정말 마음으로 예수를 믿고 거듭나서, 참된 제자가 되어 예수를 따르고 있는 것일까. 이런 깊은 회의마저 드는 것이다. 하여튼 왜 미국이나 유럽의 교회보다 더 심하게, 유독 한국교회는 이렇게 '목사의 교회'가 되어 가고 있을까.

다른 이유들도 여러 가지 있겠지만,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상당수의 목사들이 '주의 제자'를 키우는 데에 힘을 쓰기보다는, 자신들에게 순응하는 '목사의 제자'를 키우는 데 힘을 써 왔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순종과 헌신'을 잘 가르쳐 비지니스 확대에는 성공을 했으나, 그 핵심이 되는 '예수'와 '제자의 길'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인 것이다. 아니 그보다 더 정확한 표현은, 그들 자신조차 아직 제자가 되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목사와 무속인

거친 비유를 들어 매우 유감스럽지만, 오늘날의 많은 목사와 병든 교회들을 보면 자꾸 무당과 굿판이 연상되는 것이 필자의 솔직한 심정이다. 무당들은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춤추고 신명나게 한판 벌이다가, 나중에 굿이 다 끝나면 조용히 거기에 바쳐진 돈을 싹 쓸어 간다.

돈을 더 많이 바치면 큰 굿을 차려 주고, 적게 바치면 지성이 부족하다고 박대하기도 한다. 이는 병든 교회에서 담임목사가 자주 보여 주는 일인극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다.

'천신굿'은 사업의 번창에 감사하고 지속적인 발전과 평안을 위하여 푸짐한 재물과 정성을 바치고 벌이는 큰 굿을 말하고, '성주굿'은 집안의 무사태평과 대주의 안녕을 빌고 부와 번영을 위하여 행해지는 것이라 한다.

또한 '진적굿'은 무당이 자신의 신령들에게 바치는 감사제의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 이는 무당으로써의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무당 자신의 지속적인 발복을 기원하고자 하는 굿이다. 그리고 '내림굿'은 한 무당을 선생으로 모시고 무업을 배우고 익혀 다음 제자가 태어날 때 행해진다고 한다.

기분이 좀 으시시해지지 않는가. 혹시 무속인들도 '제자 훈련' 비슷한 것을 하고 있는 느낌마저 든다고 생각을 하시는 분들도 더러 있으실런지 모르겠다. 그런데 사실은 그들이 제자 훈련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목사들이 이들 무속인들을 따라 늘 '복 타령'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일부 목사님들께서 요란한 박사 가운을 입고 열 내며 설교하는 모습을 보면, 마치 무당이 오색 찬란한 무복을 입고 열 올리는 모습과 어찌 그리 비슷한지. 이는 필자만의 착각일까 궁금하다.

권위주의에 회칠한 목사 가운

말이 나온 김에, 그 목사 가운 이야기를 조금 더 하고 싶다. 물론 예배 시 복장이 정갈하다고 생각해서 별 다른 생각이 없이 입고 계신 분들도 더러 계시겠지만, 가운이란 구약의 제사장들이 제사를 드릴 때 입던 복장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오늘날의 목사직은 제사직이 아니라 '가르치는 장로'로서 교사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목사는 예배 시에 제사장 역활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분들은 목사는 성직자이니 그런 성스러운 가운을 입는 것이 좋겠다고도 하시는데, 이는 목사님들이 강단에서 폼 잡고 무게를 잡으시는 데 크게 도움이 되는 말인지는 몰라도, 성경의 원리에는 맞지 않는 말이다. 넓은 의미에서는 목사만이 성직자가 아니라, 소명을 받은 모든 신자들이 다 성직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무슨 근거로 그런 요상하고 유치한 가운을 입어야 하는지 우습지 않은가. 이는 마치 어느 주일학교 반사가 아이들 앞에서 홀로 정장 가운을 입고 무게를 잡으며 가르치는 모습만큼 어색한 일이다. 결국은 인위적으로 예배 분위기를 성스럽게 보이도록 하고, 자신들의 모자라는 권위를 조금이라도 더 치장해보려는 알량한 수단이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목사 가운도 과거 한국 개혁 교회에는 거의 없었던 일이다. 미국의 어떤 폼 잡기 좋아하시는 세습 목사님이 화려한 박사 가운을 입고 설교하는 것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아 따라 하시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유감스럽게도 예술적인 안목이 전혀 없는 필자의 눈에는 그렇게 애쓰시는 모습이 그저 안스럽고 민망스럽게 보일 뿐이다.

이는 개혁 교회가 중세 가톨릭으로부터 나올 때 저런 겉치장은 좀 하지 말자고 하여 버린 관습인데, 다시 신부들이 사제복을 입듯이 되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분들은 부지런히 개혁과 갱신을 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개악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다음 주일부터라도 그 거룩한 가운을 좀 벗어 버리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린다. 성경에 시키지도 않은 엉뚱한 일을 구태여 고집스럽게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만약 그냥 버리기가 정 아까우시면, 물걸레로라도 만들어서 교회 청소를 하실때 요긴하게 사용해 주시면 더욱 좋을 것이다.

모든 신자가 다 성직자다

교회 내 여러 미신 중 하나는, 마치 무당이 굿판의 주재자인 것처럼 많은 교인들이 목사를 교회의 주재자로 오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무당의 비위를 건드리기 두려워하듯, 목사를 은근히 어려워하고 두려워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왜 그리 두려워하는지 그 근거가 불투명하다.

성경에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는 말씀이 있듯이 목사님과 장로님들을 존경하는 것은 좋지만, 두려워할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다. 목사나 장로들은 교회 안에서 더 높은 직책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다 대등한 직분의 형제이며 자매이기 때문이다. 

다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목사직은 구약의 제사직과는 크게 다르다. 개혁 교회 안에서는 목사와 장로만이 성직자가 아니라 집사, 권사, 교사, 반사, 성가대원, 봉사 위원 그리고 모든 성도가 다 거룩한 소명을 받은 성직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 교회 안에서 목사직이 다른 직분 위에 군림하는, 특별하게 우월한 높은 자리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아울러 교역자는 물론 모든 교인이 다 대등한 동역자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따라서 목사 홀로 중앙집권적으로 독주하고 독재하는 일인 체제가 더 이상 허용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목사는 가능하면 설교 사역에 집중하고, 다른 일들은 동역자들에게 적절히 분담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특히 담임목사가 마치 재벌 기업처럼 수직적이며 계급화한 조직으로 교회를 운영하는 것은, 다시금 권력화한 중세 교회로 돌아가겠다는 탐욕스러운 몸부림으로밖에 볼 수 없다.

아울러 부교역자나 다른 제직들을 목사를 돕는 들러리나 도우미 정도로 생각하는 고질적인 악습도 오늘부터라도 당장 걷어치워야 할 시급한 과제다. 당연히 동역하는 부목사님이나 전도사님들에 대한 업무 분담이 보다 대등하게 배분되어야 하고, 처우도 담임목사에 비해 너무 차이가 나지 않게 적절히 개선되어야 한다고 본다.

다행히도 일부 교회에서는 이를 이미 잘 실천하여 다른 교회의 좋은 모범이 되기도 한다니 기쁜 일이라 할 수 있겠다.

하여튼 많은 교회들이 말로만 '평신도를 깨워, 동역자로 세우는 교회'라고 거창하게 선전하지 말고, 정말로 모든 기득권을 사심없이 버리고 제대로 다른 교역자들, 제직들, 그리고 모든 교인들과 평등하게 동역을 해 주시기를 거듭 부탁드린다. 땅 위에서 고작 백 년도 못 사는 짧은 인생들이, 홀로 욕심을 부리고 주의 영광을 가리며 살기에는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아울러 아무리 유명하고 베드로보다 설교를 더 잘하는 대형 교회 담임목사라도, 괜히 무게 잡고 거리를 두며 사치스럽고 교만을 떨고 잘난 척하는 사람은 아직 제자가 되지 못한 목사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참된 주의 제자라면, 언제나 겸손하고 온유하며 절제하며 형제들을 거리감 없이 사랑으로 대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조금만 유명해지면 자신이 무슨 대단한 인물이라도 된 듯 문턱을 바벨탑처럼 높히고 우쭐하는 목사들을 자주 보게 되는데, 한마디로 말해서 그 영혼이 정말 불쌍하고 안스럽다. 이런 행태야말로 자신들이 주의 제자가 아니라는 간접적인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목사의 시녀들

사실 담임목사가 교회 내에서 마음껏 독재할 수 있도록 허용한 일차 책임은 장로들에게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당회가 일차적으로 제구실을 못하고 목사의 시녀 노릇이나 하고 있으니, 목사가 교회를 어려워하지 않고 교주처럼 행세하는 것이다.

앞으로는 목사를 청빙할 때부터 노회법이나 교회 정관 등을 통하여 그 권한과 의무를 명확히 하고 약정서를 받아야 할 것이며, 교회 운영의 주체는 전교인이 모이는 공동의회와 여기서 권한을 위임받은 당회 및 제직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당회장도 모든 장로님들이 임기를 두고 돌아가면서 분담하면 더욱 좋을 것이다. 이렇게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목사와 장로는 대등한 직분이다. 그런데 장로들이 이를 망각하고 필요 이상으로 목사를 떠받들고 맹종하니 교회가 사기업화하는 것이 아닌가. 만일 장로직을 제대로 못하겠으면 차라리 오늘이라도 당장 물러나야 할 것이다.

사실 교회가 부패하는 책임을 목사들에게 묻고 있으나, 오히려 이를 방조한 장로들의 책임이 더 클지도 모른다. 목사가 잘못하거나 실수하면, 오랜 신앙생활을 한 장로들답게 지혜롭게 대처하여 이를 잘 시정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또한 목사의 말이라면 무조건 분별 없이 맹종하는 그 단순함은 절대 참된 신앙도 아니고 미덕도 아닐 것이다. 아니 오히려 장로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 큰 죄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장로들이 뜨뜻미지근하여 늘 우물쭈물하니 목사가 월권을 하며 흔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이유로 장로들이 성경의 가르침을 잘 이해하고 든든히 서 있는 교회야말로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대부분의 병든 교회에서는 이마저 기대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담임목사가 장로의 대다수를 스스로 장악하여 손에 쥐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참된 '주의 제자'가 아닌 '목사의 제자'가 된 지 이미 오래다. 그러니 이런 목사와 목사의 제자가 주도하는 병든 교회들은 모두 '목사의 교회'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바보 목사가 그립다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보는 대로, 요즘 많은 목사님들은 정말 박학하시고 유능하다. 머리가 나쁘다면 그렇게 교회를 쥐고 흔드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물론 대부분 젊잖은 목소리로 설교도 그럴 듯하게 잘 하시고, 처신도 품위 있고 유연하게 잘하신다. 그런데 그런 미끈한 설교만 오래 듣고 살다 보면, 영혼은 메말라 가고 뱃살만 불어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지방에서 교회를 섬기시는 한 목사님이 있었다. 이 목사님이 하루는 신문에서 '안구 기증을 바란다'는 광고를 보셨다고 한다. 처음에는 무심코 지나갔는데, 계속해서 이 광고가 마음에서 지워지지가 않았다.

그래서 그분은 이런 생각을 했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두 눈을 주셨는데, 하나를 나누어 주어 한 생명이 광명을 찾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그것은 물론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랜 생각과 기도 끝에, 결국 눈 하나를 기증하기로 굳게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내가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어느 날 아내에게 진지하게 설명하면서 동의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이 말을 들은 사모님은 그 앞에서 아무 말도 못하고 '발발' 떨고만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남편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 사모님은 그 결심이 그냥 한번 해 보는 것이 아님을 알고, 결국은 동의하게 되었다.

아내의 동의를 받고 난 이 목사는 부모님이 또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어느 날 아버님을 모시고 좋은 식당에 가서 음식을 잘 대접한 후, 집에 모시고 와서 무릎을 꿇고 자기의 결심을 차분히 말씀드렸다. 아버님도 은퇴하신 목사님이셨는데, 그 말을 들으시고 충격을 받으셨는지 아무 말씀도 안 하시다가, "네가 신앙적으로 그렇게 결심했다니, 내가 어떻게 반대하겠느냐?"고 하시며 마침내 동의를 하셨다.

이 목사님은 드디어 신문에서 오려 놓았던 연락처에 전화를 걸었다. "제 이름은 아무개입니다. 제가 오래 전에 눈이 필요하다는 광고를 보았는데, 아직도 눈이 필요하신지요? 필요하시다면, 제 눈을 하나 기증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랬더니 전화를 받은 사람이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아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저희가 원하는 것은 세상을 떠나실 때 각막(角膜)을 기증을 해 달라는 것이지, 생사람의 눈을 빼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법으로도 금지되어 있습니다." 결국 이 바보 같은 목사는 안구 기증이 불가능한 것을 알고 힘없이 전화를 끊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정말 목이 메어 한동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요즘 세상에도 저런 분이 있다니,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다. 저런 바보 같은 목사님이 진짜 목사님이 아니겠는가. 이분 외에도, 자신의 교인을 위해 신장을 떼어 기증하신 목사님도 계시다고 들었다.

어떤 분은 가난한 시골 교회 목사였던 자신의 부친을 회고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우리 아버지는 한번도 제대로 사례비를 받은 적이 없다. 백만 원? 평생 만져 보지도 못한 숫자였을 뿐이었다. 그래서 하늘만 보고 사셨다. 그래도 시골이니까 돈 쓸 일이 별로 없어서 굶지는 않았고, 또 돈 때문에 죽겠다고 악을 쓰지도 않았다. 비록 간장에 밥을 비벼 먹으면서도, 그 위에 참깨를 뿌려 먹으면 좋은 날이었고 거기에 날계란까지 있어서 비벼 먹으면 정말 행복한 날이었다."

그래도 이분은 부친으로 인해 그렇게 고생스럽게 살았는데도, "다들 돈이 최고라고 사니까, 목사라도 돈 없이도 산다고 보여 줘야지. 다들 자기 살기 바쁘니까, 목사라도 남들 챙기기 바빠야지. 다들 땅만 보며 사니까, 목사라도 서서 하늘을 보며 바보짓을 해야지"라고 하시며, 그런 아버지를 자랑스러워 하셨다.

이분들 외에도 알려지지 않은 훌륭한 목사님들이 주변에 얼마든지 많이 계실 것이다. 꼭 사람들의 눈에 띠는 무슨 특별한 일은 하지 않더라도, 허탄한 세류에 휩쓸리지 않고 겸허한 마음으로 묵묵히 교회를 섬기시는 여러 목사님들이야말로 정말 한국교회에 보물 같은 귀한 목사님들이 아니겠는가.

다들 영악하고 이기적인 이 시대에 이런 뚝배기 같은 목사님들만 계신다면 얼마나 마음이 든든하고 좋을까. 이분들이라면 과연 '예수의 교회'가 아닌, '목사의 교회'를 만들어 자신의 사욕을 채우고 세상을 어지럽히겠는가.

처음 사랑으로 다시 시작하자

많은 분들이 교회 개혁에 공감하고 이를 위해 힘쓰고 계시지만, 기존 교회의 개혁에는 많은 한계를 느끼신다고 한다. 병든 교회 내에서 누군가 듣기 싫은 쓴소리를 조금이라도 하면, 목사는 대개 뒤로 살짝 빠지고 자신을 추종하는 다른 교인들을 동원하여 그 사람을 매도하거나 몰아세운다.

그런 일을 자주 겪다 보면, 교회 개혁은 실종되고 순진한 교인들끼리의 막장 싸움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결국은 서로에게 상처만 주고, 마음이 약한 개혁 성향의 교인이 물러설 수 밖에 없는 경우가 많게 된다.  

어느 교회 개혁 모임에서 오랫동안 몸 담고 수고하셨던 한 목사님은 "그동안 얻은 최고의 소득은 기존 병든 교회 내에서 개혁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뿐이다"라고 탄식한 바 있다. 이는 전혀 과장된 고백이 아니라 생각한다. 그만큼 기존 교회의 동맥경화가 심각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경직된 독재정권처럼 '소통'이라는 것이 잘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기존 교회 내에서의 개혁은 가능한 범위 내에서 추진함과 동시에, 이제는 별도로 새로운 대안을 추가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역사 속에서 익히 경험한 것처럼, 교회의 지나친 대형화 추구는 언제나 교회의 세속화를 이끌어 왔다.

따라서 새로운 대안은 제도적으로도 대형화를 막고, 부정과 부패를 최소화할 수 있는 모델을 가지고 시도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런 모델은 바울과 베드로 그리고 다른 제자들의 사역을 자세히 연구하고 지혜를 모으면 반드시 얻어질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다행히 일부에서 이미 공동 목회, 자비량 목회, 가정교회, 평신도 교회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이런 시도를 하고 있다. 이는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라 생각된다.

불과 100여 년 만에 한국교회는 큰 양적 성장을 이루었다. 이제라도 다음 100년을 내다보며, 내실 있는 질적 성장을 위해 새로운 시도를 못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이 땅의 참된 복음화를 위하여, 초대교회의 제자들처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보자고 말하고 싶다. 우리도 바울, 베드로, 누가, 요한, 바나바 그리고 디모데처럼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복음을 가지고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우리도 참된 제자가 되자

결론을 말하고자 한다. 목사가 제자답지 못함을 염려해야 할 정도로 매우 혼란한 세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런데 과연 목사만이 잘못하고 있을까. 오늘날 목사가 목사답지 못하고, 장로가 장로답지 못하고, 그리고 신자가 신자답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슬픈 현상이 아니겠는가.

이런 비판에서 과연 누가 자유스러울 수 있을까. 우리 모두가 허물 많은 죄인이라는 탄식이 저절로 터져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오죽해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죄인의 괴수'라고까지 말했을까. 하지만 여기서 그냥 좌절해서는 안 되니, 서로 일으켜 주고 붙잡아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단순히 일부 목사님들을 비판하자고 주제넘게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목사님도 참된 제자가 되어야 하겠지만, 우리도 제자의 길을 바르게 가야 한다는 깊은 자성을 하자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잘못된 교회를 바라보며 개혁을 논하기에 앞서, 그 전에 먼저 자신을 고치고 개혁하자는 뜻이다.

왜냐하면 교인들의 참된 변화가 없는 교회 개혁이란 언제나 실패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며, 나 자신이야말로 언제나 가장 골치 아픈 개혁의 장애물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목사를 위한, 목사에 의한, 목사의 교회'는 단연코 잘못된 교회이다. 따라서 이는 반드시 개혁되어야 한다. 그리고 개혁이란 언제라도 성경으로 돌아가는 일이요, 주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작업이다.

성경이 가르치라 하시니 가르칠 것이고, 성령이 흩어지라면 흩어져야 할 것이다. 또한 성경이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하셨으니 이 세대의 허상을 거부할 것이요, 성령이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하시니 부족하지만 이에 순종할 뿐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개혁이란 자신의 잘못을 알았을 때 언제라도 바로 돌이키는 사역이라 생각된다. 이것이 참된 용기이며, 참된 순종이며, 참된 경건이고, 그리고 참된 제자의 길이 아니겠는가. 

샬롬!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사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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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 강 (121.1.78.150)
2012-05-25 20:38:42
신학교는?
목회자를 배출하는 신학교는 예수의 제자를 길러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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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인 (112.151.4.66)
2010-01-11 00:0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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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교회목사님은.기도나 심방은 관심없고 매일 매일 온갖 소송질에 동네사람은 물론이고 시청구청 심지어 감리교단까지 소송으로 도배한다고 얼마나 바쁘신지 모릅니다.자기맘에 드는 사람이면 처음와도 직분 바로주고 맘에 안들면 겨우 20여명 있는 교인중에 일년내내 헌금위원한번 안시키고 얼굴도 안쳐다 봅니다. 온교인들이 반대해도 자기 욕심에 빠져서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당회는 5분만에 끝내고 예배시간은 오늘도 30분이나 늦게 시작합니다.설교시간에는 교회에충성하지 말라며 따라 하라고 합니다. 주님은 죽도록 충성하라고 했는데..모든일이 성경과는 어긋나는데 어찌해야합니까?. 왜 감리교회에는 일개 교사에게도 있는 목사 평가제가 없는 겁니까?이런 목사가 거룩한 강단에서 자기 자랑하고 혈기 부리는 소리 언제까지 들으며 영적으로 매말라 가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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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12
게스트 (124.122.147.244)
2010-01-10 00:12:47
이사화 된 장로나 기득권 교인들도 문제다.
한국교회는 이미 천박한 자본주의에서 더 이상 거룩한 교회로서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어째든 독선적인 목사를 욕하는 것도 좋다.
그런 목사는 더 이상 목사직을 감당하지 말기를 소원한다.

그런데 이제는 이런 더러운 인격을 가진 목사들 때문에, 이에 항거(?)를 하는지 장로(때론 기득권 교인)들도 더러운 인격을 가진 자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회는 세상에서 이익을 내는 회사로 전락되었다.
장로들은 교회적인 영성보다는 세상에서의 회사적 영성이 더 밝다.
어떻게 하면 이익이 더 많을지, 어떻게 하면 물질적 성공을 이룰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장로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꼭 같이 행동을 한다.
그래서 거룩한 교회의 모습으로 손해를 조금 봐도 용납이 되지 않는다.
물질적인 영성이 가득한 장로들이 교회를 충분히 회사로 여길 수 있다.
교회를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교회의 모습을 회사로 바꿔는 것이다.

더욱이 목사는 '사장'으로 장로들은 '이사'로...
이사들은 목사를 청한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목사와 분란을 일으키며 쫓아내버리기도 한다.

'이사화된 장로' 이를 어찌 하면 좋을지 모르것다.

진정 하나님께 엎드리는 목사와 장로가 가득하기를 소원한다.

2009년 새해에는 악질스러운 목사나 장로(혹은 기득권교인)는 제발 하나님께서 벌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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