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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들의 성탄찬송. 옷을 입으라미리 보는 교회력 설교/ 성탄절. 성탄 후 첫 주(1225, 1227)
박성규  |  theos53@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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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년 12월 23일 (수) 11:52:38
최종편집 : 2009년 12월 23일 (수) 12:35:18 [조회수 : 27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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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20091225)
성서일과/ 시 97; 사 62:6-12; 딛 3:4-7; 눅 2:(1-7), 8-20
본문/ 누가복음 2:8-20
천사들의 성탄 찬송

   

(눅 2:8-20) 『[8]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15]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16]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17]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고하니 [18] 듣는 자가 다 목자의 말하는 일을 기이히 여기되 [19]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니라 [20] 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온 세상에 미치는 성탄의 큰 기쁨이 성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고요한 밤

주님이 처음 오실 때, 아무도 그가 강림하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특별한 날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 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그렇게 하루를 보냈습니다.
단지 밤하늘의 별들은 그 날의 다름을 알고, 다른 날보다 더 밝게 빛났을 수는 있었겠지요.

그런데 그 밤을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보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동방의 박사들과 들에서 양을 치던 한 무리의 목자들이었습니다.

그 밤의 하늘도 다른 밤과는 달랐습니다.
여느 때에는 보이지 않던 별 하나가 유난히 밝게 비추고 있었습니다.
그가 오실 자리를 준비하는 자도 없었고, 구주 나심을 알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지만, 별이 빛나고 있었고, 그 별을 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멀리 동방에서 별을 보던 세 사람의 박사는 그 별의 인도를 받고, 아기 예수가 있는 곳을 찾아와 경배했습니다.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바치며 그에게 절을 했습니다.
그들에게만은 그 밤이 다른 밤과는 달랐습니다.
그 밤 이후로 그들에게 닥친 날 들이 지금껏 살아왔던 나날들과 달랐을 것도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 날이 평생에 걸쳐 가장 특별한 날이 된 사람들이 또 있었습니다.
모두 잠든 그 밤에 깨어있던 자들이 있었습니다.
들에서 양을 치던 한 무리의 목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천사로부터 구주가 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다윗의 동네 곧 베들레헴 땅에 나셨는데, 지금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이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표적이라고 하였습니다.
구유에 누운 것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다윗의 후손이 오셨다는 표적이라는 말이 선뜻 이해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목자들은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말을 마친 허다한 천사들이 허다한 천군들과 함께 찬송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천사들이 사라진 후 목자들은 서둘러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과연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이신 아기를 볼 수가 있었고, 엎드려 그에게 경배하였습니다.
천사들에게 들은 말을 그곳에 있는 몇 사람들에게 전했지만 오직 한 사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만이 목자들의 말을 마음에 새길 뿐이었습니다.

우리 구주 나신 그 밤은 정작 이렇듯 조용하게 깊어만 갔습니다.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전해지던 밤 치고는 너무나 조용한 밤이었습니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기쁨이라는 천사들의 찬송소리가 무색하기만 한 밤이었습니다.
밤하늘의 별 하나가 홀로 하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었고, 목자들과 박사들 그리고 예수님의 가족들만이 땅위에 임한 기쁨을 오롯이 맛보고 있었습니다.

오늘의 세상이 만드는 분위기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탄절을 세상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로 느끼는 사람들은 그 영광을 볼 길이 없고, 그 기쁨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오직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우신 예수를 통해 하나님이 세상에 베푸신 은총을 깨닫는 자만이 그 영광을 보고 그 소리를 들으며 함께 경배하고, 찬송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던 그 밤의 정경을 우리에게 전하는 중에 하나님이 주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의 또 다른 깊은 뜻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천사들이 불렀던 그 찬송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의 뜻을 깨닫는 자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고요하기만 한 밤, 세상 많은 이들은 알지 못하는 그 밤의 영광과 기쁨을 목자들처럼, 박사들처럼 먼저 아는 자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밤하늘의 별 하나에서 하늘의 영광을 보고, 만물이 잠들어 있는 그 때에 깨어 천사의 찬송소리를 듣고, 깨닫는 자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목자들과 박사들

성경에 포함된 네 개의 복음서 가운데 예수 탄생하실 때의 모습을 전하고 있는 것은 마태와 누가 뿐입니다.
그나마 두 복음이 전하는 구주 탄생의 이야기에는 현저한 차이점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저자들은 눈앞에서 본 사건들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전해들은 이야기를 다시 자기 신앙의 눈으로 해석하여 들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차이 가운데서도 목자들과 박사들처럼 뚜렷한 대조를 보이는 것은 없습니다.
그들은 너무도 대조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박사들은 이방인이면서, 유식한 자요, 부요한 자들이었고, 집에서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들이었습니다.
반면에 목자들은 유대인이었지만, 무식한 자요, 가난한 자들이었고, 한 밤중에도 집 밖에서 양들을 돌보는 목부들이었습니다.

두 무리 사이의 메울 수 없는 간격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 같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탄생하심을 알고, 마구간을 찾은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인종과 학식, 빈부와 직업이라는 뚜렷이 드러난 차이 이외에도 그들 사이에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목자들과 박사들의 차이점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시는 말씀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차이는 무엇이며, 무엇을 증거하고 있는 것일까요?

첫째로, 서로 다른 방식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목자들에게는 천사들이 방문하여 소식을 전했습니다.
박사들은 하늘의 별을 보고, 징조를 알았고, 별의 인도를 따라 주께로 갔습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부르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각자의 형편에 맞게,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님께로 오게 된 동기가 달랐습니다.
박사들은 이스라엘을 다스릴 새 임금을 보기 위해 먼 길을 왔습니다.
목자들은 약속된 구주의 탄생을 보기 위해 급히 베들레헴을 찾았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나아오는 길을 다양하게 열어놓고 계시는 분임을 알려 줍니다.
병자와 건강한 자 사이에 하나님을 찾는 길이 다르게 마련입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형편이 다름을 알고 계시지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당신에게로 부르시는 분입니다.

셋째는, 온 길이 서로 달랐습니다.
목자들은 베들레헴 근처의 들에서 왔으나, 박사들은 먼 길을 여행하여 왔습니다.
목자들은 잠시 달려가 주를 경배할 수 있었지만, 박사들은 오랫동안 묻고 또 물으며 더듬듯이 주를 찾아 왔습니다.

그리스도에게까지 당도하는 길의 길이는 각 사람에게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쉽게, 빠르게 주를 만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랜 시간에 걸쳐 고생 끝에 주를 만나는 자들도 있게 마련입니다.

끝으로, 목자들과 박사들이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방식이 서로 달랐습니다.
목자들은 와서, 그리스도를 보고, 천사들에게 들은 말을 전했습니다.
박사들은 무릎을 꿇고 엎드렸습니다.

목자들은 입술로 경배했습니다.
박사들은 예물을 드려 경배했습니다.
주님은 설혹 경배하는 방식이 다를지라도,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경배를 받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해 줍니다.

천사들의 성탄 찬송

아무도 알지 못했던 구주의 나심을 유일하게 목격하고, 경배한 목자들과 박사들 사이에는 이렇듯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차이를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 둘 사이의 차이를 통해 무언가 말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록한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어 주의 나심을 알리고 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 목자들과 박사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세상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하나가 되리라는 것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사들의 찬송은 바로 그것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세상은 온갖 차이들, 서로 다른 무언가로 인해 갈가리 찢겨져 있습니다.
인종과 문화 사이의 차이는 세상에 극심한 반목과 대립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종교의 다름에서 오는 증오와 갈등은 앞으로의 세상이 종교 간의 전쟁으로 인해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을 하기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생명의 주요, 평강의 왕으로 주께서 오신 지 2,00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세계 어디서에선가는 화약 냄새가 진동을 하고, 빼앗긴 생명 앞에서 우는 자들의 소리가 끊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어디 세상만 그렇겠습니까?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은 분단국가가 우리나라입니다.
남과 북으로 갈려 있을 뿐 아니라, 보수와 진보, 동과 서의 갈등은 해묵은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있는 자와 없는 자 사이의 격차는 날로 벌어져서, 가난한 자들의 한숨과 탄식이 언제 신음소리, 비명소리가 될지 모르는 형편입니다.

박사와 목자들의 차이는 바로 이 차이를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사들의 찬송소리는 이 모든 차이와 다름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라져야 하리라는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천사들의 찬송은 지금 베풀어진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노래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되어져야 할 일에 대한 예언이기도 한 것입니다.

목자들과 박사들은 결코 한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너무나 다른 그들의 신분이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 앞에서 그들은 결코 큰 차이가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주 앞에서 차이가 없는 하나가 된 것입니다.

천사들의 성탄 찬송이 단지 그날의 영광과 기쁨을 노래하는 것만이 아니라, 성탄의 기쁜 소식을 알기 원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바로 그 점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 앞에서 하나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온 곳이 달라도, 오는 길이 달라도, 당도하는 시간이 달라도 한 가지 일에 서로는 같았습니다.
하늘에 영광을 돌리고, 함께 기뻐하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 앞에서 하나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서로 다른 것을 따지는 자들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너는 나와 다르니 함께 할 수 없다 말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오로지 천사들처럼 그렇게 찬송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주 앞에서 하나가 되어, 하늘에 영광을 돌리고, 함께 기뻐할 수 있는 거룩한 무리들 다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성탄 후 첫 번째 주일(20091227)
성서일과/ 시 148; 삼상 2:18-20, 26; 골 3:12-17; 눅 2:41-52
본문/ 골로새서 3:12-17
옷을 입으라

(골 3:12-17) 『[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13]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그리스도의 평강이 성도들의 마음을 주장하시기를 빕니다.

의관(衣冠)을 정제(整齊)하라.

의관을 정제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대로 풀이하면 옷과 모자를 가지런히 갖추어 입는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옷치레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무언가 중요하고 큰일을 앞두고, 평상시와는 다른 마음으로 의복을 갖추어 입는 것을 말합니다.
의관을 정제한다는 것은 곧 마음을 다잡아 가지런히 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엡 6:11)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오늘의 성서일과 중 사무엘서는 어린 사무엘이 성전에서 자라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사무엘은 한나가 서원한 대로 성전에 맡겨져 자라고 있습니다.
그의 자라는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삼상 2:26)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

오늘의 성서 일과 중 누가복음이 전하고 있습니다.
          (눅 2:52)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키가 자라는 것이야 세월이 하는 일이니 사람이 애쓴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나날이 은총과 사랑이 더해지며 자라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은총의 사람, 사랑의 사람으로 자라기 위한 길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과 사무엘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면 하나님을 가까이 했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성전에서 자랐으니 두 말할 나위가 없고, 예수님의 부모들은 그 먼 갈릴리에서 해마다 어린 예수를 데리고 성전을 찾았습니다.
누가복음 2 장은 예수님을 데리고 성전에 갔던 마리아와 요셉이 집으로 돌아가던 중, 예수님이 없는 것을 뒤늦게 알고 찾다가, 여전히 성전에 머물고 있던 예수님을 찾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나무라는 부모에게 예수님이 말했습니다.
          (눅 2:49)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해에는 하나님 곁에 머무는 시간이 더욱 많아지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은총과 사랑이 더욱 커지는 성도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러나 성전에 머무는 것만으로는 무언가 부족합니다.
어린 사무엘이 성전에서 자랄 때에 이스라엘의 제사장은 엘리였습니다.
엘리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제사장의 아들들이었으니 성전에서 자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 아들들은 악행을 일삼았습니다.
성전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을 범하는가 하면, 하나님께 드려진 예물을 도적질했습니다.
그들이 도적질하는 수법이 참으로 악랄했습니다.
          (삼상 2:13) ... 아무 사람이 제사를 드리고, 그 고기를 삶을 때에 제사장의 사환이 손에 세살 갈고리를 가지고 와서 [14] 그것으로 냄비에나 솥에나 큰 솥에나 가마에 찔러 넣어서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 제사장이 자기 것으로 취하되, 실로에서 무릇 그곳에 온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같이 할 뿐 아니라...

‘할 뿐 아니라....’
그 외에도 그 도적질하는 수법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악랄하고, 다양했다는 것입니다.

엘리가 소문을 듣고 아들들을 불러 나무랐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들은 엘리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악행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마침내 하나님의 저주를 받습니다.
아들들은 물론이려니와 그 아비 엘리에게 저주가 임했습니다.
무어라 하셨을까요?
          (삼상 30-31) ...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31] 보라 내가 네 팔과 네 조상의 집 팔을 끊어 네 집에 노인이 하나도 없게 하는 날이 이를지라

자라면서 더욱 은총을 받은 사무엘과 뚜렷하게 대조되는 모습입니다.
은총을 받은 사무엘과 저주를 받은 엘리의 집 사이에 다른 점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사무엘의 특징적인 모습을 한 마디로 요약하고 있는 것이 삼상 2:18입니다.
          (삼상 2:18) 사무엘이 어렸을 때에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 섬겼더라

사무엘은 제사장의 마음 곧 하나님의 종 된 자의 마음을 가지고, 섬기면서 자란 것입니다.
한나의 한을 풀어준 귀한 아들이 아니요, 엘가나의 집 후손이 아니었습니다.
반면에 엘리의 아들들은 제사장의 귀한 아들로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도적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아들을 대하는 부모의 마음 자세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사무엘이 입은 세마포 에봇은 다름 아닌 그 어머니 한나가 지어준 옷이었습니다.
          [19] 그 어미가 매년제를 드리러 그 남편과 함께 올라갈 때마다 작은 겉옷을 지어다가 그에게 주었더니

한나는 하나님께 서원한 그대로 아들이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되기를 원해서 제사장들이 입는 세마포 에봇을 지어 입혔던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는 달랐습니다.
아들들의 비행을 듣고 나무라기만 했지 더 이상 어떻게 하려고 하지를 않았습니다.
하나님보다 자식을 더 귀중히 여긴 것입니다.
사무엘은 섬기는 자였지만, 엘리의 아들들은 그 아비에게 섬김을 받는 자와 같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엘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삼상 2:29)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나의 처소에서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의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스스로 살지게 하느냐

세마포 에봇을 입는다고 제사장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무엘이 입은 옷은 하나님께 대한 사무엘의 마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제사장의 자세로,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여호와를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성장하였고, 엘리의 두 아들들은 한 날 한 시에 비참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그 아비도 두 아들이 죽고, 법궤도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비둔한 몸이 의자에서 고꾸라지면서 죽고 말았습니다.
엘리의 집에 노인이 없게 하시리라던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진 것입니다.
사무엘과 엘리의 두 아들의 운명이 이렇게 달라진 것은 오직 한 가지, 엘리와 한나의 마음가짐 때문인 것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바울도 말하고 있습니다.
옷을 입고, 띠를 매라고....
어떤 옷감으로 만들고, 어떻게 입어야 하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 할 마음 자세를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오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입어야 할 마음의 에봇이 무엇인지를 알고, 입는 자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서 은총과 사랑이 날로 더해지는 성도들 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무엇을 입을까?

첫째는, 선한 마음의 옷을 입으라고 하셨습니다.
          [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13]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긍휼과 자비, 겸손과 온유, 인내와 용서의 옷을 입으라고 합니다.
성경의 말씀은 오묘합니다.
긍휼과 자비, 겸손과 온유, 인내와 용서라는 말은 각기 다른 말 같아도, 둘씩 짝을 이루어 한 뜻을 드러내고, 모두가 합하여 한 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선한 마음입니다.

선한 마음의 출발은 긍휼과 자비입니다.
긍휼과 자비는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측은히 여기는 마음(惻隱之心)입니다.
동양에서는 이런 사람을 일러 어진 사람, 인자(仁者)라고 합니다.
학문을 하고 수양을 하는 것이 다 이런 사람이 되기 위한 것입니다.

남을 불쌍히 여기지 못하는 자는 겸손할 수도, 온유할 수도 없습니다.
죄인의 특징이 교만한 마음과 강퍅한 마음인 것입니다.

인내와 용서도 그렇습니다.
지혜자가 말합니다.
          (잠 19:11)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

참음과 용서가 한 반열에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가인이 에서를 죽인 것은 참지 못했기 때문이요, 용납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으나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받고, 아니 받고는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달린 것인데, 가인은 분했습니다.
결국 아벨을 화풀이의 제물로 삼아 죽이고 말았습니다.

아벨은 아우이니 측은히 여겨야만 했습니다.
제사를 받지 않으신 하나님의 뜻 앞에 겸손해야만 했습니다.
왜 내 제사를 받지 않느냐며 분노할 것이 아니라 받아들여지지 않은 사실을 용납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결국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인생이 본시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다 가인의 후손인 것입니다.
죄 가운데 나서, 죄 가운데 살며, 죄 값으로 죽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내 안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은 죄 사함의 은총을 받기 전에는 하나님의 영을 따라 살지를 못합니다.
선한 양심이 조금이라도 남은 사람은 자기 안에서 두 마음이 싸우는 것을 느끼며, 죽도록 괴로워 할 따름입니다.
그나마 사라진 사람은 아무런 가책도 없이 죄의 영을 따라 미워하며, 정죄하며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길은 하나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죄의 은총을 받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자비를 베푸셔서 그 아들을 죄의 값으로 내어 주셨습니다.
땅에 오신 그리스도는 겸손함과 온유함으로 제자들의 발을 닦는 섬김의 삶을 사셨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시고, 끝까지 죄인들을 용서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이 은총을 받은 자들을 그리스도의 사람,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그들의 삶은 더 이상 죄인으로서의 삶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은 말합니다.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어디 용서에 국한되는 일이겠습니까?
긍휼과 자비, 겸손과 온유, 인내와 용서 모두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총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은 선한 마음의 옷을 입을 수 있는 것은 그의 은총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은총을 알고, 기억하는 자가 되어서, 주와 같은 선한 마음으로 옷 입고 사는 한 해가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둘째로, 사랑의 띠를 매라고 합니다.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옷을 입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옷을 입은 다음에는 띠를 매어야 옷이 풀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사함의 은총을 받은 자도 땅에 머무는 동안에는 은총이 없는 자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받은 은총을 기억하여, 은총대로 살려고 하나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갈대와 같아서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나무는 고요히 있으려 하나 바람이 멎지를 않습니다.
옷을 추수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선한 마음의 옷을 입고, 사랑의 띠를 매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띠를 매지 않고서는 겨우 지니게 된 선한 마음을 다잡을 수가 없을테니까요...

사랑이 빠지면 아무리 잘 갖추었다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 유명한 고린도 전서 13장, 사랑 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고전 13:1-3)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씻은 여인의 경우를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그 여인이 모든 사람이 황당해하는 그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주를 사랑하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로 씻고 수건으로 닦으면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향유로 씻고, 머리털로 닦았습니다.
큰돈을 그야말로 물과 같이 쏟아 부었는데 아까운 마음이 없었고, 가리고 다녀야 하는 머리털을 드러내어, 남자의 발을 닦았으나 부끄러운 마음이 없었습니다.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으로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죽으신 후 고향으로 돌아가 고기를 잡다가 거기까지 찾아오신 예수를 만난 베드로를 살펴 본 적도 있습니다.
낙심한 베드로를 찾으신 주님은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거듭 같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용기도 있는 사람이었고, 주를 향한 열심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치 않았던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사랑을 요구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믿느냐? 묻지 않으시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신 것입니다.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신 주님은 비로소 베드로에게 일을 맡기셨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고....
그리고 또 말씀하셨습니다.
          (요 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다른 말이 아닙니다.
원치 않는 일, 할 수 없는 일도 사랑한다면 능히 할 수 있게 되리라는 뜻입니다.

다윗의 마음을 살펴본 적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의 마음 가운데 가장 먼저 주목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다윗의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모욕하는 말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장대한 골리앗 앞에 두려움 없이 설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이 말합니다.
          (고전 13: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이 하는 일입니다.
사랑이 모든 것을 온전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띠를 띠는 자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부끄러워하지 않고, 낙심하지 아니하고, 두려움 없이 주를 섬기는 길은 그를 사랑함으로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아무쪼록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말한 다윗의 뒤를 따르는 자들 다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끝으로, 찬송의 관을 써야 하겠습니다.
선한 마음이 옷이요, 사랑이 띠라면, 찬송은 머리에 쓰는 관(冠)입니다.
머리에 관을 씀으로써 의관을 정제하는 일이 끝나는 것입니다.
이제는 무슨 일을 하더라도 바른 마음자세로 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써야 할 관은 찬송입니다.
찬송은 은혜 받은 자의 증거입니다.
악한 죄를 묻지 않으신 선하신 은혜, 그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리신 사랑의 은혜는 찬송으로 증거되기 마련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선한 마음이 잎이요, 주 예수를 사랑함이 꽃이라면, 찬송은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히 13:15)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찬송은 또 은혜를 구하는 자의 기도입니다.
한숨을 지으면 탄식이 되고, 탄식이 자라면 신음이 됩니다.
불평하면 원망이 되고 원망이 자라면 반역하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구하고, 받은 것으로 여겨 감사하면 찬송이 됩니다.
그리고 찬송하는 대로 얻게 되는 것입니다.
          (잠 18:20)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하여 배가 부르게 되나니 곧 그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하여 만족케 되느니라

그래서 믿음과 찬송과 감사는 다른 말 같아도 같은 말입니다.
믿는 자는 찬송하는 자가 되고, 찬송하는 자는 감사하게 되며, 감사하는 자가 다시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이 말합니다.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한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문턱에 섰습니다.
지나간 것은 흘러가버린 물과 같습니다.
옛 사람들도 말했습니다.
장강의 물을 뉘라서 되돌릴 수 있겠는가?

지난 한 해의 삶이 어떠했든지 이제 마음을 가지런히 모아 새롭게 시작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선한 마음의 옷을 입고, 사랑의 띠를 동여매어서, 평강을 주시려고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헛되이 하지 않는 자들 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사야도 말합니다.
          (사 57:19) 입술의 열매를 짓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먼 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 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 하셨느니라

넘치는 평강과 기쁨 가운데 감사와 찬송의 열매가 풍성한 한 해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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