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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소개> 목회자를 위한 <설교자노트> 2010년 1·2월
정연복  |  pkom545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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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년 12월 15일 (화) 10:25:15
최종편집 : 2009년 12월 27일 (일) 15:32:55 [조회수 :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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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소개>  목회자를 위한 <설교자노트> 2010년 1·2월 
 
                                                                        정연복(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저는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으로 일하면서 1997년부터 격월로 나오는 <설교자노트>라는 책을 번역해 왔습니다.

지금까지 82권이 나온 <설교자노트>는 '교회력에 맞춘' 설교 본문에 대한 성서 주석, 그리고 그 본문에 따른 미국의 실력 있는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의 최신의 설교를 번역하고, 아울러 설교 내용에 적합한 기도문과 예화 자료를 풍부하게 제공하여 목회자들의 설교 준비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책입니다. 특히 <설교자노트>에 실린 설교들은 설교자들에게 성서에 충실하면서도 독창적인 설교 아이디어를 제공합니다.

그런데 이 <설교자노트>는 시중 서점에서는 팔지 않고 신청하시는 목회자들에게 직접 우송합니다. '영성적이며 공동체적이며 생태학적인 신앙 공동체를 위한 자료'인 <설교자노트>를 구입하기 원하는 분들은 한국기독교연구소(전화: 031-929-5731)로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설교자노트>는 격월로 나오며 두 달치 분량의 설교 자료를 담고 있는데, 2010년 1·2월호 중 1월 둘째 주 설교 자료를 참고로 첨부합니다.


설교 제목: 바다의 주님

* 성경 본문: 이사야 43:1-7
* 성경 주석

100년 이상 동안, 학자들은 이사야서가 대부분의 예언서들이 분명히 그렇듯이 예언자 신탁들과 행동들의 한 수집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어휘, 주제, 어조, 그리고 역사적 지시대상들에 있어서 뚜렷한 전환으로 특징지어지는, 둘 혹은 세 개의 더 크고 보다 두드러진 구분들로 구성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을 인식해 왔다.

오늘 본문은, 이 커다란 "덩어리들" 중의 두 번째, 즉 보통은 예루살렘 왕궁에서 일했던 기원전 8세기의 예언자(제1 이사야)의 제자인 제2 이사야로 알려진 것에 속한다. 기원전 6세기 후반(아마도 기원전 545-539년)에 일했던 이 무명의 제자는 일반적으로 "유다의 위로"(이사야 40-55장)로 알려진 작품을 썼는데, 오늘 본문은 그런 제목의 전형적인 실례이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의 고난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하나님이 궁극적으로는 그들을 그들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 되지 못하게 가로막는 모든 것에서 구출하실 것을 약속하는 신탁이다.

많은 예언자 신탁들처럼, 신탁은 "그러나 이제.... 주님께서 말씀하신다"(1절)는 상투적인 문구로 시작된다. 그러나 상투적인 문구에 뒤이어 시작되는 운율의 규칙성에서 드러나듯이, 시(poetry) 자체의 흉내를 내는 판에 박은 말의 많은 등장들(예를 들어, 이사야 28:16; 49:22; 65:13; 에스겔 7:2, 5 등)과는 달리, 이사야 43:1의 판에 박은 말은 그것의 현재적 문맥은 시의 첫 연의 맨 처음 반, 즉 반행(半行, hemistich) 역할을 한다.

신탁의 서두는 고전적인 히브리어 시의 병행구이다(A/ B/ C// A'/ B'/ C'):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1a절). [이사야서 40-55장의 저자인] 제2이사야의 언어는 오랫동안 창조의 주제들에 많이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이 신탁이 "창조하다"(create)와 "형성하다"(form)라는 두 개의 동사를 포함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두 동사 모두 창세기의 창조 설화들에서 발견된다.

"창조하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 bara는 형이상학적 무로부터 뭔가를 창조한다는 것, 즉 창조 설화에 후대에 덧붙여진 개념인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가 아니라, 인간적으로 사용 불가능하거나 쓸모 없는 것으로부터의 창조를 의미한다. 창세기의 창조 설화나 이스라엘의 기원(起源)에 관한 몇몇 설화는 둘 중 어떤 것도 무로부터 창조되었음을 암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둘 모두 이미 존재하는 실재들, 즉 창조의 경우에는 태초의 물의 혼돈, 그리고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상이한 지파들과 민족들에 작용하는 하나님의 목적 의식적인 행동에 의해 창조되었다.

병행하는 동사인 "형성하다"(to form)를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 yatzar는 옹기장이들(예를 들어, 이사야 29:16; 41:25; 렘 18:4, 6)과 나무를 조각하는 사람들(이사야 44:9, 10, 12; 하박국 2:18)의 작품을 묘사하기 위해 가장 빈번히 사용된다. 그것은 하나님이 "흙(adamah)으로 사람(adam)을 지으심"을 묘사하기 위해 창세기에서도 사용된다(창 2:7, 8). 그 히브리어 동사는 의미가 확대되어 생각과 계획들을 형성한다는 의미까지도 포함한다(예를 들어, 시편 94:20). 그러나 이 용법은 덜 빈번하다. 그 단어는 내적 활동보다는 외부적인 활동을 나타내는데, 이사야서는 바로 이 점을 종종 강조한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의 존재는 그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우선적인 행동에 기초한 물질적(physical) 실재라는 것이다(이사야 27:11; 43:21; 44:2, 21, 22; 45:9 등).

기원전 10세기의 사울, 다윗, 솔로몬의 통일 군주국이 솔로몬 사후 북이스라엘 왕국과 남유다 왕국으로 쪼개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야곱"이라는 고대의 이름은 특별히 시(poetry)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동의어로 살아남았다. 그것은 빈번히 "야곱의 집"이라는 구절로, 그 밖의 어디에서보다도 이사야서에서 더 일반적으로 발견된다(예를 들어, 이사야 2:5, 6; 8:17; 10:20; 14:1; 29:22; 46:3; 48:1 등).

"구속하다"(redeem)로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는 세월이 흐르면서 엄청난 신학적 내용을 획득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의 가장 초기의 사용은 두 가지 중요한 영역에서 단순히 "친족들로서 행동하다"를 의미했다: 죽은 남자의 형이나 아우가 그 미망인과 결혼하여 자손을 낳음으로써 고인의 이름을 세인들의 망각으로부터 회복시키는 것(룻기에서 극적으로 표현된 소위 "수혼 제도"), 그리고 채무 때문에 잃은 한 가족의 조상의 재산을 회복시키는 것.

구속자가 살아 계심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기대했던 대로 욥을 도우러 오지 않음을 불평하는 욥의 한탄(욥기 19:25)에서처럼, 그가 그 책임을 이행하든 하지 않든, 원래는 "가까운 친척"을 의미했지만 구약성경에서 "구속자"(redeemer)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 고엘(goel)은 바로 그런 책임을 진 사람이었다. 그 동사의 기본적인 의미는 뭔가를 그것에 걸맞은 올바른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인데, 구약성경에서는 이런 상태가 주로 영적인 것이라는 암시가 거의 없다.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 활동은 완전히 역사적이고 물질적이다: 이집트의 속박으로부터의 구출(출 15:13; 신 7:8), 민족들 사이에 흩어짐(느헤미야 1:10), 그리고 여기에서는 많은 다른 시련들 중에서도 특히 바빌론 포로.

2절에서 언급된 물과 불은 구약성경의 다른 곳에 언급된 홍해를 건너는 것이나 다니엘의 풀무 같은 어떤 특정한 시련보다는 아마도 되돌아옴(return)과 회복의 힘든 과정에 대한 은유적인 언급일 것이다.

다른 나라들이 이스라엘의 "몸값"(ransom, 3절), 혹은 이스라엘과 "교환으로"(3-4절) 주어진다는 진술에는, 이스라엘과의 하나님의 독특한 관계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각별한 사랑이 반영되어 있다. 이사야 예언자는 다른 나라들이 이스라엘의 번영을 위해 희생되었음을 암시하기보다 오히려 신적인 은총(favor)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받을 자격이 없는 한 민족에게 보여졌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선택"(election) 신학에서 중요하면서도 종종 간과되는 구성요소였다: 이스라엘은 신적인 은총을 입을 만한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언자들이 반복해서 날카롭게 지적했듯이, 이스라엘의 죄들은 주님이 퇴짜를 놓으신 나라들의 죄들과 종종 동일했기 때문이다.  

5-6절에서 상술된 방향을 가리키는 표현들("동으로부터, 서로부터" .... "북으로, 남으로")은 현대인들에게 있어서처럼 단순한 은유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지구가 꼭대기와 바닥(북과 남), 그리고 두 개의 면(동과 서)을 가진 평평하고 대략 정사면체로 간주되던 고대 예언자의 세계의 우주론을 반영한다. 그 활동 무대 안에서, 이스라엘은 하나의 역사적 실재로 존재했고, 그리고 다양한 나라들 및 신들(the divine)과 상호 작용했다.

그것의 시작과 마찬가지로, 신탁은 창조의 동사들로 끝난다: "내가 창조하고.... 내가 빚어 만든 사람들"(7절). 전문 용어로 "포섭/감싸기"(inclusio)라고 부르는 이 포위 구조는 신탁에 구조적인 결속력을 제공함에 있어서, 그리고 또한 이제 임박한 구원, 즉 이스라엘의 재창조에 직면하여 세계 창조와 이스라엘의 창조 사이의 연결을 강조함에 있어서, 제2이사야의 탁월한 시인으로서의 문학적 재능과 예술적 기교를 반영한다. 이 신탁은 구약의 문학적 걸작품들 중의 하나이다.  
  
* 설교 본문

하나님은 거친 물결을 통해 우리를 운반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를 호화스럽고 쾌적하고 안전한 순양함에 우리를 태우지는 않으실 것이다.

고소 공포증을 가진 사람들이 있듯이, 바다 공포증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그러므로 바다를 낭만적인 장소로만 여기지 말라. 바다는 위험과 심지어 죽음의 장소일 수도 있음을 생각할 때, 바다 공포증은 충분히 이해된다. 거센 파도가 출렁이는 바다로 나아가 보라. 그러면 당신은 파도, 바람, 조류, 바위투성이의 해안선들, 그리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기후 조건을 다루어야만 한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의 밑바닥에는 무엇이 놓여 있는지 당신은 알고 있다.

신경이 곤두서는 난파의 위험.

바다 한가운데로 위험을 무릅쓰고 나아갈 때, 당신은 가능한 한 큰 배에 둘러싸이기를 원한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Royal Caribbean 순양선이 이제 진정한 바다의 거대한 괴물을 진수시켰다. <바다의 오아시스>로 불리는 그것은 지금까지 건조된 가장 크고, 가장 높고, 가장 넓고. 가장 무겁고, 가장 값비싼 여객선이다.

그것은 얼마나 큰가? 한 잡지에 따르면, 그것은 엄청난 규모의 항공모함을 작아 보이게 하며, 20층 건물보다도 더 높고, 무려 8천 명의 사람들을 실어 나른다. 그렇다면 그것은 단순한 배가 아니라 물 위에 떠다니는 도시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바다의 오아시스>에는 수중 공원, 해변, 그리고 파도가 철썩철썩 밀려오는 두 개의 수영장을  포함한 21개의 수영장이 갖추어져 있다. 승선한 남녀 배우들은 1,400석 규모의 대형 공연장에서 브로드웨이 스타일의 공연을 하며, 동시에 수중 발레리나들은 야외 수중극장에서 다채로운 쇼를 펼친다. 배의 한복판에는 센트럴파크라고 불리는 녹색 공간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는데, 축구장 절반 크기의 이 공간에는 열대 식물과 6미터 높이의 나무들로 가득하다. 공원을 걸으면서, 승객들은 자신들이 바다 한가운데 있다는 것을 쉽게 잊을 수 있다.

이 거대한 배에 동력을 공급하기 위해, 여섯 개의 육중한 발전기는 10만 5천 가정의 불을 밝히기에 충분한 정도의 전기를 생산한다. 배의 여기저기에서 굵은 전선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을 쭉 일직선으로 펼치면 미국 전역을 횡단하고도 남을 만큼의 길이, 즉 3,300마일이나 된다. 그리고 배 전체를 칠하기 위해 15만 8천 갤론의 페인트가 필요했다. 그것은 조지 워싱턴 다리를 온통 세 번이나 칠하고도 남을 분량이다.

<바다의 오아시스>를 타고 순항하는 동안 바다 공포증이 엄습한다면, 승객들은 실내로 들어가서 식당, 술집, 극장, 혹은 카지노에서 얼마든지 즐길 수 있다. 배의 내부 공간은 "지나친 사치의 경축"(celebration of excess)이라고 로리 뉴전트는 말한다: "그 배는 라스베가스를 연상시키는 현란한 오락 시설과 매혹적인 볼거리로 가득 채워져 있다."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은 약속하신다: "네가 물 가운데로 건너갈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하고, 네가 강을 건널 때에도 물이 너를 침몰시키지 못할 것이다"(43:2a). 이것은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구절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여기에서 말씀하고 계신 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그분은 <바다의 오아시스>처럼 우리가 깊은 물을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인가? 혹은, 바다의 주님이신 그분과 관련된 뭔가 매우 다른 것이 있는가?

하나님은 거친 파도를 통해서도 8천 명 이상의 사람들을 실어 나르실 수 있는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그분은 라스베가스 스타일의 현란한 오락 시설을 갖추고 물 위에 떠다니는 호화 호텔이 아니다. 우리를 지으신 주님의 특징들을 고찰할 때,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지나친 사치의 경축"이 아니라 "창조와 구속의 경축"이다.

하나님의 배에 승선하여 한번 바라보라.

우리에게 맨 처음 눈에 띄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예언자 이사야는 선언한다: "그러나 이제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1a절).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은 1조 4천 억 달러의 <바다의 오아시스>보다도 훨씬 더 가치 있다. 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보기에 너는 한없이 소중하다. 나는 너를 존중하고 사랑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고 그분의 신실한 종들이 되도록 지음을 받았다(4, 7절). 그분을 예배함으로써, 서로 사랑함으로써, 그리고 우리의 힘과 재능을 우리 주변 세상을 섬기는 일에 알뜰히 사용함으로써, 우리들 각자는 하나님께 영광을 가져다드릴 기회를 가지고 있다. 리용의 성 이레니우스가 기원 후 2세기에 말했듯이, "하나님의 영광은 완전히 살아 있는 인간 존재이다!"

그러나 우리는 완전한 세계 속에 살고 있지는 않다. <바다의 오아시스>를 건조한 사람들이 수중극장과 센트럴파크를 가지고 바다 한가운데 천국의 모습을 창조하려고 애쓴 것만큼이나, 사실 우리는 망가진 창조 세계 속에 살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과 인간 서로에게 죄를 짓고, 우리의 이기적인 갈망들에 탐닉하고, 그리고 남들의 악의 희생물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받을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계신다. 그래서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속량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1b절). 우리를 죄의 포로 상태에서 빼내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를 파멸과 죽음으로부터 구출하기 위하여,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오신다. 하나님의 구속적인 노력은 손쉬운 것이 아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은 [혹독한] 대가를 치르신다. 주님은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신다: "내가 이집트를 속량물로 내주어 너를 구속하겠고, 나를 구속하려고, 너 대신에 에티오피아와 쓰바를 내주겠다"(3절).

그것은 엄청난 가격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훨씬 더 대가라도 기꺼이 지불하실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분은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그분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목숨마저도 십자가에 내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그런 다음 하나님에 의해 구속되었다. 이것은 성경 이야기의 아주 간결한 요약이며 핵심이다. 2009년 7월 탄생 500주기를 맞이했던 종교개혁가 존 칼빈은 구약성경을 창조의 이야기, 그리고 신약성경을 구속의 이야기로 간주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은 약속에 의해 살아가시는 한 분 유일하신 하나님에 관해 말한다: "네가 물 한가운데로 건너갈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하고, 내가 강을 건널 때에도 물이 너를 침몰시키지 못할 것이다. 네가 불 속을 걸어가도, 그을리지 않을 것이며, 불꽃이 너를 태우지 못할 것이다"(2절).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우리 하나님은 바다의 주님이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이 결코 거친 파도에 직면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지는 않으심을 주목하라.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바다의 오아시스>에 승선하여 사치스럽고 쾌적한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바다의 주님과 함께 살아감을 의미한다. 하나님과 함께 항해하는 것은 당신이 결코 뱃멀미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당신은 질병의 거대한 파도, 배신의 차가운 바람, 경제 조류의 변화, 혹은 유혹의 강한 급류 따위의 다양한 공격을 받을 수 있다. 이사야는 우리의 항해가 언제나 순탄할 것을 보증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늘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어떤 공격에도 압도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준다. 바다가 아무리 거칠게 될지라도, 주님은 우리를 완전한 파멸로부터 보호하실 것이다.

기독교 2천 년의 역사를 뒤돌아보면,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힘입어 자신들의 삶이 온갖 형태의 역경과 위기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사람들의 감동적인 고백이 적지 않다.

러시아의 위대한 소설가 톨스토이는 언젠가 말했다: "만일 당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그것을 두 가지 방식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당신이 몸담아 살고 있는 환경을 개선하든지, 아니면 당신의 내적인 정신 상태를 개선하라. 첫째는 늘 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둘째는 언제든지 가능하다." 우리가 도무지 개선할 수 없는 많은 상황과 환경에 우리는 직면한다. 직장을 잃는 것, 질병, 자동차 사고, 연인에게 버림받음.... 이 모든 것은 때때로 우리를 엄습하는 폭풍우들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들을 통제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우리의 내적인 정신 상태를 개선하는 것은? 그것은 언제든지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가능하다. 우리는 우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우리 주변 세상을 개선하기 위해 땀흘려 일할 수 있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바다의 주님께서 이 모든 노력들에서 우리를 도우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나 진실하기 때문이다: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겨 너를 사랑하였으므로, 너를 대신하여 다른 사람들을 내주고, 너의 생명을 대신하여 다른 민족들을 내주겠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4-5a절).

파도가 우리 주변에 맹렬한 기세로 닥쳐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압도되지 않을 것이다.  

<가능한 설교 주제들>
* "내가 이집트를 속량물로 내주고 너를 구속하겠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의 포로 상태로부터 되사기 위해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심으로써 우리를 구속하신다.
* 선한 사람들에게 나쁜 일이 생길 때, 주님은 실제로 어쩐 종류의 보호를 제공하시는가?
* 하나님은 우리를 공동체를 위해 창조하신다. 그리고 땅의 끝으로부터 우리를 한데 불러모아 그분의 뜻이 실현된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지금 이 순간도 일하고 계신다.    

* 예화

+ 내 순간, 날마다, 달마다

매 순간, 날마다, 달마다, 해마다
어떤 시간이나 자기가 더 바람직하게 여기는
삶을 살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아야 한다.
이것은 "내일은 새로운 날"이라는
옛말과 통한다.
(헬렌 리어링, 스코트 리어링, 『조화로운 삶』)

+ 나는 사랑을 받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루어야 할 이상적인 모습이 아닌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신다.
나는 지금 내가 이상적인 모습이 아니란 것을 잘 안다.
아직도 내 안에는 뽑아내야 할 죄가 많이 있다.
나에 대한 하나님의 사역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나는 사랑을 받고 있다.
애써서 얻지 않은 그 사랑을 어떻게 잃을 수 있는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면,
그분과 평화롭게 살기로 한 지금
어떻게 그분의 사랑을 잃을 수 있겠는가?
(제임스 브라이언 스미스, 『하나님이 내게 반하셨다』)

+ 새해의 약속은 이렇게

또 한 해를 맞이하는 희망으로
새해의 약속은 이렇게 시작될 것입니다

'먼저 웃고
먼저 사랑하고
먼저 감사하자'

안팎으로 힘든 일이 많아
웃기 힘든 날들이지만
내가 먼저 웃을 수 있도록
웃는 연습부터 해야겠어요

우울하고 시무룩한 표정을 한 이들에게도
환한 웃음꽃을 피울 수 있도록
아침부터 밝은 마음 지니도록 애쓰겠습니다

때때로 성격과 견해 차이로
쉽게 친해지지 않는 이들에게
사소한 오해로 사이가 서먹해진 벗에게
내가 먼저 다가가 인사하렵니다

사랑은 움직이는 것
우두커니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다가가는 노력의 열매가 사랑이니까요
상대가 나에게 해주기 바라는 것을
내가 먼저 다가가서 해주는
겸손과 용기가 사랑임을 믿으니까요
차 한잔으로, 좋은 책으로, 대화로
내가 먼저 마음 문을 연다면
나를 피했던 이들조차 벗이 될 것입니다

습관적 불평의 말이 나오려 할 땐
의식적으로 고마운 일부터 챙겨보는
성실함을 잃지 않겠습니다

평범한 삶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마음이야말로
삶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가꾸어주는
소중한 밑거름이니까요
감사는 나를 살게 하는 힘
감사를 많이 할수록
행복도 커진다는 걸 모르지 않으면서
그 동안 감사를 소홀히 했습니다

해 아래 사는 이의 기쁨으로
다시 새해를 맞으며 새롭게 다짐합니다

`먼저 웃고
먼저 사랑하고
먼저 감사하자'

그리하면 나의 삶은
평범하지만 진주처럼 영롱한
한 편의 시(詩)가 될 것입니다
(이해인·수녀)

+ 은혜로 주신 자녀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페라 가수인 할버튼이 어느 날 어린 아들과 친구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한 소년이 아들에게 자랑했다. "우리 아버지는 이 도시의 시장님과 아주 친하다." 그때 아들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이렇게 대꾸했다. "그래? 우리 아버지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친하시다."

할버튼은 아들의 말을 듣는 순간 너무 감격해서 눈물을 쏟았다. 어린 시절에 신앙을 심어 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때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다. 어린이는 하나님이 부모에게 맡겨 주신 최고의 선물이요, 영광의 면류관이다.

+ 나침반이 여기 있습니다

어느 대학교 졸업식에서 한 노교수가 사회로 진출하는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이제 위험한 바다에 배를 띄워 항해를 떠난다는 것을 자네들은 알겠나?" 학생들은 모두 숙연해졌다.

졸업식이 끝난 뒤에 한 학생이 교수님을 찾아와서 말했다. "위험한 바다를 향해 출발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교수님, 너무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성경책을 꺼내더니 말했다. "위험한 바다를 항해하는 데 필요한 나침반이 여기 있습니다."

+ 당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얼마나 크신가요?

H. N. 러셀이라는 프린스턴 대학 천문학자가 은하수에 대한 강의를 마쳤을 때, 한 여자가 다가와서 물었다. "우리가 사는 지구가 무한한 우주에 비해 그렇게 작다면, 하나님이 과연 우리에게 큰 관심을 갖고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러셀 박사는 대답했다. "그것은 말이죠, 전적으로 당신이 하나님을 얼마만큼 믿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 용기는 어디에서 오는가? 

초등학교 1학년 교사가 자기 반 학생들을 동그랗게 앉혔다. 그리고는 아이들이 커서 어른이 되면 무엇이 되고 싶은지 아이들에게 질문했다. 아이들이 차례차례 일어나서 자기 꿈을 이야기한다. "나는 엄마처럼 간호사가 되고 싶어요." "나는 아빠처럼 은행원이 되고 싶어요." "나는 선생님처럼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고 싶어요." ....

마지막 차례는 반에서 수줍음을 가장 많이 타는 소년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나서 두 눈을 반짝거리며 말했다. "나는 커서 어른이 되면 서커스단에서 사자를 길들이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나는 채찍과 의자를 갖고 무시무시한 사자들에게 용감하게 직면해서 그들이 내 명령에 순종하여 불고리를 훌쩍 뛰어넘는 멋진 묘기를 부리게 할 거예요."

평소에 소심하기만 했던 소년이 그리도 용감하게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다니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급우들을 바라보며 그는 재빨리 그들을 안심시켰다. "물론 내 곁에는 항상 우리 엄마가 있을 거예요."

+ 두려움

몇 년 전, 독일의 요제프 키르슈너는 자신이 그 동안 살아오면서 품었던 두려움을 하나 둘 따져 보기로 했다. 처음에는 원고지 한 장이면 충분하리라고 생각했는데 무려 11쪽에 달하는 345가지 두려움의 목록이 작성되었다.

그는 이 목록을 만들면서 그 자신은 물론 남들의 행동에 대해서도 깊은 통찰을 얻었다. 무엇보다 일상생활의 간단하고 사소한 결정에도 두려움이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새삼스레 발견했다.

그가 작성한 목록 중에는 입 냄새에 대한 두려움, 누군가에게 부당한 일을 저지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남들에게 웃음거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자기 자녀가 밖에서 놀다 차에 치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등이 포함되었다.

그는 사람들이 특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보편적 두려움을 세 가지, 즉 획득한 것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 미지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현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분류했는데, 이 모든 두려움은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것들에 대한 쓸데없는 두려움이다.

몇 년 동안 두려움의 목록을 꼼꼼하게 작성하는 과정에서, 그가 두려워하던 것 중 많은 것이 눈 녹듯이 저절로 사라졌다. 두려움을 글로 쓰고 분석하면서, 거의 대부분의 두려움은 어리석음의 결과라는 것을 종종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 여유

독일의 한 탄광에서 붕괴 사고가 발생하여 10명의 광부가 갱 안에 갇혀 외부와 연락이 끊겼다. 광부들은 시간을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들 중 유일하게 시계를 찬 광부가 있었는데, 그는 계속 시계를 들여다보며 불안과 초조에 시달렸다. 며칠 후 구조대원들이 광부들을 구출했을 때 단 한 사람만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바로 시계를 찬 광부였다. 그는 죽음의 시간을 세고 있었다. 시간에 대해 너무 집착하거나 성격이 급한 사람은 건강을 잃기 쉽다.

일찍이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는 "내일 지구의 멸망이 오더라도 오늘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말했다.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은 80세까지 왕성한 활동을 펼쳤는데, 그는 그 비결을 이렇게 밝혔다. "나는 불필요한 일에 몸을 혹사시키지 않았다. 또 시간에 초조해하지 않았다. 쉬고 싶으면 쉬고 눕고 싶으면 누웠다."

지나치게 분주한 마음은 병을 불러온다. 여유 있는 마음은 몸과 정신을 건강하게 한다. 조용한 마음은 육체의 질병을 치유한다.

+ 고통 중에 감사

16년 동안 온몸에 통증이 있고 사지를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병에 시달리는 할머니가 있었다.

그런데 이 할머니는 누구보다도 감사하며 살았다. 할머니는 신체의 모든 부분이 마비되었어도, 오른쪽 엄지손가락만은 아직 쓸 수 있다는 엄청난 복을 하나님께서 주셨음을 기뻐했다. 다른 한쪽 손은 완전히 굳어 움직일 수 없었지만 오른쪽 엄지손가락으로는 막대기에 매어 놓은 끝이 두 갈래 난 포크를 사용해 안경을 쓰고, 음식을 스스로 먹고, 빨대를 사용해 차를 마시고, 성경 책장도 넘길 수 있었다. 실로 엄청난 노력을 들여 이 엄지손가락 하나만 사용하여 할머니는 모든 일을 했다.

어느 날 자신을 위로하러 온 방문자에게 할머니는 말했다. "나는 감사할 일이 너무 많아요. 나의 모든 죄가 용서함을 받았으니 이제 나의 구주 예수님의 크신 사랑 안에 거하면서 그 사랑을 마음껏 느낄 수 있거든요." 방문자는 의아해 하면서 물었다. "때로 낙심되지 않으십니까?" 할머니는 주저하지 않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주님이 저를 이 세상에서 지켜주시는 한, 이곳에 누워 만족할 뿐입니다. 또 언제든지 주께서 부르시면 이 세상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 벼룩을 주신 것도 감사

코리는 폴란드의 한 행복한 가정에서 자라났다.

그런데 독일 나치에 의해 나라가 정복되자 유태인을 숨겨준 죄목으로 온 가족이 포로수용소에 갇히게 되었다. 코리는 언니 벳시와 함께 감금되어 온갖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그녀의 가장 큰 고통은 성경 말씀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어느 날 신체검사를 받는 도중 한 그리스도인 간호원이 코리에게 속삭였다. "가장 갖고 싶은 것을 말씀하세요." 코리는 그 간호원을 통해 작은 성경 하나를 얻게 되었다. 코리는 말할 수 없이 기뻤다.

코리는 들키지 않게 갖은 애를 써가며 성경 말씀을 삼키듯이 읽었다.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도 소중한 생명의 말씀이었다. 그러던 중에 코리는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는 말씀을 읽었다. 그 말씀은 코리의 마음속 깊이 아로새겨졌다.

그런지 얼마 안 되어 코리는 언니 벳시와 함께 감방을 옮기게 되었다. 그곳에서 코리는 도저히 감사할 수 없다는 마음이 들었다. 지금까지도 비참한 곳에 있었지만 그곳은 더욱 비참했다. 게다가 벼룩까지 들끓어 도무지 견딜 수 없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이 계속 마음에 맴돌았지만 코리는 도저히 그 말씀에 순종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언니 벳시가 눈을 감고 나지막이 기도했다. "주님, 우리에게 벼룩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할 수 없이 코리도 "아멘"으로 응답했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코리는 벼룩 때문에 감사해야 할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벼룩 때문에 그 감방 주위에는 간수와 독일 군인이 얼씬도 하지 않았고, 그래서 감방 안의 사람들은 자유롭게 교제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덕분에 코리와 벳시는 매일 성경 말씀을 가르치게 되었다. 온종일 강제 중노동에 시달리고 굶주린 여인들과 함께 모여 서로를 위로하며 아픈 곳을 만져주고 양보하며 기도하는 놀라운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나눔으로써 그곳에 작은 천국이 이루어졌다.

이 모든 것이 벼룩 때문에 가능했음을 코리는 깨닫게 되었다.
(채수덕, 『짧은 글 커다란 기쁨』)

+ 스펄전의 마지막 말
 
설교자 스펄전은 부인과 함께 여러 가지 질병으로 고생했다. 늘 병석에 누워 있는 아내를 돌보며 살아가는 스펄전을 두고 사람들은 모두 부인을 먼저 천국에 보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스펄전이 아직 오십대 초반의 나이에 먼저 세상을 뜨게 되었다.

사랑하는 아내의 손을 잡고 이 세상을 하직하며 위대한 설교자가 남긴 마지막 말은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 그의 유언은 바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자기 삶의 목적으로 받아들인 사람의 최후가 어떠한지 보여준다. 평생을 복음과 함께 살다 간 하나님의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여보, 나는 좋으신 하나님과 함께 그토록 행복한 세월을 보냈다오."

+ 가치 있는 삶

파도가 몹시 심하게 치는 날, 부두에서 놀고 있던 어린이가 물에 휩쓸려 바다에 빠졌습니다. 다행히 그것을 본 사내가 있었습니다. 사내는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어린이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그였지만 강한 바람과 높은 파도 때문에 어린이에게로 다가가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내는 포기하지 않고 헤엄을 쳐서 어린이를 구했습니다.

병원에서 겨우 눈을 뜬 어린이가 자신을 구해 준 사내에게 말했습니다. "아저씨, 저를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절대 잊지 않겠어요." 그 말을 들은 사내가 대답했습니다. "내가 목숨을 걸고 너를 구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는 것을 앞으로 살아가면서 꼭 증명해야 한다. 알겠니?"

예수님이 죽으신 대가로 새 생명을 얻은 우리는 천하를 다 주고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참으로 존귀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내가 얼마나 존귀하고 가치 있는 존재인지 늘 기억해야 한다.
(유재덕, 『청소년을 성장시키는 이야기 131가지』)

+ 더 좋은 삶을 위한 거룩한 몸짓

19세기 최고의 시인 롱펠로우는 1835년 하버드 대학 교수가 되기 전에 첫째 부인을 잃었다. 그리고 스위스에서 둘째 부인 프랑세스 애플턴을 만나 결혼했다. 그러나 둘째 부인도 1861년 불행한 사고를 당해 화상을 입고 결국 죽었다. 이처럼 롱펠로우는 인생의 쓰라린 경험을 많이 겪은 사람이었다.

롱펠로우가 임종이 가까웠을 때 한 기자가 물었다. "선생님은 부인 두 명과 사별한 아픔뿐만 아니라 많은 고통을 겪으며 살아오신 것으로 아는데, 그런 환경 속에서도 어떻게 그토록 아름다운 시들을 쓸 수 있었습니까?" 그러자 롱펠로우는 마당에 보이는 사과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나무가 내 스승이었습니다. 저 사과나무는 몹시 늙었습니다. 그러나 해마다 꽃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옛 가지에서 새 가지가 나오기도 합니다. 나는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날마다 새 생명을 공급받으며 인생의 새로운 꽃을 피우고 열매 맺으며 살아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새 생명은 롱펠로우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도 공급되고 있다.
(서임중, 『뒷맛 좋은 삶』)

+ 신은 내 안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하나님이 ‘저 위 어딘가에’ 아니면 ‘바깥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 전지전능하신 분과 교감하려고 몹시 애썼다. 그러면서 좌절과 분노를 느낀 적도 많았다. 불가능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나는 하나님과의 연결 고리를 전혀 찾지 못했다. 물론 나는 자라면서 하나님이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존재한다는 것, 혹은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는 우리 마음속에 있다고 말씀하셨다는 것도 배웠다. 그러나 머리로만 이해했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하나님에 관한 실험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을 깨달았을 때는 나의 첫 번째 결혼 생활이 파경을 맞은 직후로, 그때 나는 산다는 것이 끔찍이 싫었고 잠 못 이루는 밤의 연속이었다.

고통과 외로움으로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나는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진정으로 그분을 믿고 있지는 않았다. 하나님을 향한 기도는 오히려 나를 짓눌렀고 내게 어떤 해답이나 마음의 안정도 가져오지 않았다.

그렇게 밑바닥에 떨어진 후에야 비로소 나는 하나님이 내 안에 존재하심을 깨달았다. 그제야 하나님에게 다가서기 위해 구름과 산 위로 손을 뻗을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미 내 안에 들어와 계셨고, 그분은 내가 인생을 한 조각 한 조각 맞춰 나갈 수 있도록 돕고 계셨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존재하시므로 우리는 그저 그분의 사랑을 온몸으로 느끼기만 하면 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믿는 것뿐이다. 오직 그것뿐이다. 그러니 하나님을 믿고 또 믿어라.
(아서 칼리안드로·배리 렌슨, 『행복한 삶을 사는 10가지 작은 원칙』)

* 예배 자료

+ 예배에의 부름

결코 잠들지 않는 눈이 있네
불어오는 밤바람 아래에서도
결코 닫히지 않는 귀가 있네
햇살이 어둠 속으로 가라앉을 때도
결코 지치지 않는 팔이 있네
인간의 힘이 무너질 그 때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사랑이 있네
이 땅 위의 사랑이 모두 쇠할 때에도
(조지 매터슨, '주님의 사랑')

+ 새해의 기도

새해엔 서두르지 않게 하소서
가장 맑은 눈동자로
당신 가슴에서 물을 긷게 하소서.

기도하는 나무가 되어
새로운 몸짓의 새가 되어
높이 비상하며
영원을 노래하는 악기가 되게 하소서.

새해엔 , 아아
가장 고독한 길을 가게 하소서.
당신이 별 사이로 흐르는
혜성으로 찬란히 뜨는 시간

나는 그 하늘 아래
아름다운 글을 쓰며
당신에게 바치는 시집을 준비하는
나날이게 하소서....
(이성선·시인)

+ 작은 기도

보이지 않는
생의 중심에

깊은 뿌리
하나 있어

굳은 심지
하나 품어

지금은 한겨울
아무런 볼품없어도

안달하지 않고
평화롭고 잔잔한 모습의

나목(裸木)의
그 너른 마음

올 한 해
나의 마음 되게 하소서
(정연복)

+ 헌신에 대한 묵상기도
 
영하의 대지를 견디고 있는 나목처럼
그렇게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꽃 한 송이 피우기 위해 제 생애 바친
깜깜한 땅 속의 말없는 뿌리처럼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누리지 못해도
온몸으로 한 사람을 껴안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아무도 원망하지 않는
잔잔하고 따뜻하며 비어 있는 그 마음이
앉거나 걷거나 서 있을 때도
피처럼 온몸에 퍼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김재진·시인, '사랑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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