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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아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희망과 우려과학과 종교는 친구가 되어야 한다.
류상태  |  shalom77@cho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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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5년 11월 29일 (화) 00:00:00 [조회수 : 3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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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석 교수의 연구가 실용화되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다. <수퍼맨>이라는 영화의 주인공으로 잘 알려진 크리스토퍼 리는 황교수의 연구 결실을 기다리다 결과를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경우다. <쿵따리 샤바라>를 시원스레 불러대던 클론의 강원래 역시 황교수의 연구에 큰 희망을 걸고 있다.

얼마전 중앙일보에 대대적으로 보도된 전 농구선수 박승일 역시 불치의 <루 게릭>병을 딛고 일어서기 위해서는 황교수의 연구가 결실을 보아야 한다. 이런 장애우들의 입장에서 보면, 황교수의 연구에 윤리적인 문제가 있다고 태클(?)을 거는 언론과 네티즌들이 매우 야속하게 느껴질 법하다.

그(와 그의 팀)의 연구 성과는 괄목할만한 것이며, 인류의 질병 치료 분야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할 것이라는 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다만 연구 과정상의 윤리적인 문제, 구체적으로 말해서 난자 채취 과정상의 윤리 문제로 지금 황교수팀의 발목이 잡혀있는 상태다.

목적이 숭고하다 하여 모든 수단이 합리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황교수 팀의 연구 과정에 이의를 제기할만 하다. 그러나 황우석 교수에 대한 격론이 감정적 대응으로 치닫는 모습을 보면서, 황교수가 한국인이 아니었다면, 또한 배아줄기세포 연구의 중심지가 한국이 아니었다면,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냉철하고 객관적으로 접근할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의학에 대해서는 젬병인 나로서는 이 문제에 대해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 잘 모를 때는 함부로 입을 열지 않는 것이 상책이겠기에, 이 문제, 즉 ‘난자 채취 과정의 윤리적 문제’에 대해서는 양쪽의 얘기를 좀 더 들으며 배우고 싶다. 그러나 기독교인으로서, 그리고 종교인으로서, 조금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은 점이 있다.

“생명은 하느님께 속한 영역이므로 인간이 함부로 침범해서는 안된다”며 연구 자체를 반대하는 일부 골수 신앙인들의 판에 박힌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 종교는 인간의 행복을 위해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인간만의 행복’이 아니다). 그러므로 수많은 강원래들의 희망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짓밟는 교리적 주장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싶지 않다.

<쿵따리 샤바라>를 신나게 부르며 춤을 추던 강원래가 휠체어를 박차고 일어나 무대를 마음껏 뛰어다니며 열정적으로 불러대는 모습을 다시 한번 보고 싶다. 비록 그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지는 못하지만, 모든 장애우들이 병든 육체의 제약을 벗어나 걷고 싶을때 걷고, 다니고 싶은 곳을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자유를 누렸으면 좋겠다. 어떤 숭고한 이념이나 종교도 그들의 순수한 희망과 자유를 제약할 권리는 없다.

그러나 배아줄기세포 연구문제 뿐 아니라, 의학이나 과학의 발전에 대한 나의 우려는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는 ‘악용하는 소수의 파괴력’ 때문이다.

쉽게 생각해 보자. 지금은 국가 단위의 의지가 없이는 개발하기 어렵지만 만일 핵이나 화학, 생물학 무기들이 소수의 테러집단이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보편화된다면 세상이 어떻게 될까? 조류독감 바이러스를 쉽게 채집해서 퍼뜨릴 수 있을 정도로 의학이나 과학이 발전하고 보편화, 상용화되면 세상이 어떻게 될까?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겠느냐?”는 말이 나올 법하다. 이 격언을 잘 사용하는 사람들은 ‘대책’보다는 ‘실행’에 무게를 두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아무 대책도 없이 ‘구더기’를 무시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구더기가 들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장을 담그고자 한다면 “구더기에 대한 구제 대책을 잘 세워야” 할 것이다. 구더기를 퇴치하기 어렵다고 판단될 경우에는, 장담그기를 포기하는 것도 생각해야 한다. 만약 구더기가 맹독을 품고 있다면 담갔던 장이라도 아낌없이 버려야 한다.

어떤 일을 처음 시작할 때는 시도하는 자가 선택권을 쥐게 되지만, 일단 일이 진행되고 나면 주도권을 빼앗기게 되는 경우가 많다.

어렸을 때, 리어카로 쓰레기를 청소하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 언덕 아래로 리어카를 몰고 가는 청소부가 처음에는 조심스레 리어카를 다루며 끌고 내려가지만, 어느 시점에서 리어카에 가속도가 붙으면 통제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나뒹구는 리어카에 여기저기 쏟아진 쓰레기들을 보며 황당해하던 청소부 아저씨의 표정, 그건 나에게 또렷이 기억되는 분명한 ‘현실’이었다.

어쩌면 의학이나 과학이 그런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지 않을까? 비록 과정상의 윤리적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나는 황우석 교수의 의도가 전적으로 순수하다는 점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후예들이 모두 순수할 수 있을까 하는 점에 대해서는 의혹을 품는다. 그의 후예들 중에서, 백에 하나, 아니 천이나 만에 하나가 불순한 의도를 품을 때, 그것이 국가적 재앙으로, 혹은 인류의 멸망으로 이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어쩌면 나는 지금 구더기를 무서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과학적 입장에서는 답답한 사람일게다. 나는 과학과 의학의 혜택으로 비교적 건강하게 살아왔다. 의학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다면 선천성 심장병에 걸린채 태어났던 내 딸 아이를 지금쯤은 잃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이나 의학의 발전에 박수만 치고 있을 수 없는 이유가 있다.

과학은 자체 추진력과 직선적 속성을 갖는다. 한번 내딛으면 좀처럼 중단하거나 후퇴하지 못한다. 또한 한번 추진력을 얻으면 가속도가 붙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앞서가기도 한다. 그러나 그 과학이 가져다주는 결과에 대한 예측이나 유용성에 대한 판단과 통제력은 과학의 발전만큼 빠르지 않다. 이 속도의 불균형이 불안한 것이다. ‘통제되지 않는 과학’이 인류의 희망으로 꽃필 수 있을까? 아니면 인류의 재앙으로 귀속될까?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면, 나는 늘 종교와 과학 사이에서 방황하게 된다. 어느 한 쪽을 선택할 수는 없다. 둘이 친구가 되기를 갈망할 뿐이다. 종교를 존중하고 그 경고를 귀담아 듣는 과학, 과학을 신뢰하고 격려하며 도움을 주는 종교, 둘의 만남과 대화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야 구더기를 효과적으로 퇴치하고 맛있고 영양많은 장을 담글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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