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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디매오 이야기미리보는 교회력 설교/ 오순절 후 스물한 번째 주일(20091024)
박성규  |  theos53@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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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년 10월 21일 (수) 16:04:00
최종편집 : 2009년 10월 21일 (수) 16:55:23 [조회수 : 7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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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 후 스물한 번째 주일(20091025)
성서일과/ 시 126; 렘 31:7-9; 히 7:23-28; 막 10:46-52
본문/ 마가복음 10:46-52
바디매오 이야기

(막 10:46-52) 『[46]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 소경이 겉옷을 내어 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이번 주 주신 말씀들의 주제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 중에 바디매오 이야기가 있습니다.
너무 쉽고, 간단해서 또 유명한 말씀이어서 길게 설교할 필요가 없을 것 같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조금 길게 설교하려고 합니다.
아무쪼록 사모하는 마음 가운데 은혜가 있으시기를 기원합니다.

절망(絶望)

요단강 근처에 여리고라는 성이 있었습니다.
오랜 전 옛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당도한 이스라엘에 의해 무너졌던 성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온천이 있어 많은 사람이 휴양을 위해 찾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부자들이 즐겨 찾는 곳이어서 유난히 걸인이 많은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 중에 바디매오라는 소경거지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소경은 그 아버지의 죄나, 그 자신의 죄로 인해 저주를 받은 자라고 여겨졌습니다.
소경이었으므로 죄인 취급을 받고, 구걸을 하여 연명하는 신세였으니 그 기구함을 말로 형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발밑을 보지 못하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내일을 바라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일을 위한 계획이나 소망 따위를 말할 처지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기가 버거운 그런 삶이었습니다.

절망이 무엇입니까?
끊을 絶, 볼 望, 말 그대로 보이는 것이 끊어졌다는 뜻입니다.
바디매오는 그의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바디매오는 디매오의 아들이라는 뜻이므로 그에게는 정작 이름이 없는 셈이었습니다.
디매오의 아들-바디매오의 이름은 절망이었습니다.

거울 앞에 서야 진실을 볼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거울 앞에 서면 무엇이 비추일까요?
바디매오입니다.
우리가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이 바디매오라는 것을 모르는 것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자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바디매오 이야기는 디매오의 아들 이야기가 아니라 아담의 후손인 우리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사야가 말했습니다.
(사 59:10) 우리가 소경같이 담을 더듬으며 눈 없는 자 같이 두루 더듬으며 낮에도 황혼 때 같이 넘어지니 우리는 강장한 자 중에서도 죽은 자 같은지라

본다고 여기고 있으나 실상은 보지 못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꼭 보아야 할 것은 보지 않고, 보이는 것만 보는 자라는 뜻입니다.
육의 눈으로 보는 것이 다가 아니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하는데 보지 못하니 소경이라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지 못하는 자는 소망이 없습니다.
(롬 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보지 못하게 된 것은 죄 때문입니다.
(겔 39:24) 내가 그들의 더러움과 그들의 범죄한대로 행하여 그들에게 내 얼굴을 가리웠었느니라

아담 이후의 모든 사람이 아담의 아들 곧 바아담입니다.
(롬 5: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 ...

자기가 소경인 것을 깨달으면 죄를 씻고, 다시 볼 수 있겠으나 그렇지 못하면 다시 볼 기회가 없습니다.
(요 9:4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보이지 않는 것이 절망이 아닙니다.
자신이 보지 못하는 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절망입니다.
스스로 보지 못하는 자들임을 깨달아 보이지 않는 것 그러나 참되고 영원한 것을 보는 자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관심(觀心)

그런 바디매오에게 이상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난 뒤부터였습니다.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며, 바람과 파도도 그의 말에 순종하여 잠잠해진다는 소문이었습니다.
그 예수님이 지금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데 곧 여리고를 지나가실 것이라는 소문이었습니다.
보지는 못해도, 들을 수는 있다는 것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습니다.
손에 쥐어지는 동전에만 관심이 있었던 그가 구걸하는 일을 뒤로 한 채,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으면서 바디매오는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그 무엇이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꿈틀대며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무언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다는 예감이었습니다.
죽은 자도 일으키셨다는데....
남의 일 같지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바디매오는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듣기만 하던 바디매오도 어느 사이엔가 언제 예수님이 도착하실지, 어디로 지나가실지 묻고 있었습니다. 

관심(觀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관은 본다는 뜻이고, 심은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마음으로 본다는 뜻입니다.
육의 눈은 감겼어도 마음의 눈은 무엇인가를 보고 있는 법입니다.

그 동안 바디매오의 마음은 무엇을 보고 있었습니까?
남들이 던져주는 동전 몇 닢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것만이 그의 살길이라고 여겨, 구걸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바디매오의 관심이 바뀌었습니다.
바디매오는 금과 은 아닌 그 무엇을 마음으로부터 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돈 많은 사람, 권세 있는 사람, 유명한 사람들에 관한 소문은 숱하게 들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여리고를 찾을 때마다 거지들 사이에서는 빠르게 소문이 퍼졌습니다.
수많은 거지들이 그런 사람들을 둘러싸고 동정을 구했습니다.
그들 모두의 관심은 한결같았습니다.
돈 있고, 권세 있는 사람들이 던져주는 동전 몇 닢, 아니면 빵 부스러기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리고를 향하여 오는 예수라는 사람은 그들과는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부자가 아니었습니다.
권세 있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라 온다고 하는 소문이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보고 그를 따르는 것일까?
이것이 바디매오의 관심이 되었습니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살던 부자 삭개오도 비슷한 종류의 관심을 가졌드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관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바디매오에게 던져지는 동전 몇 닢이 상징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바라는 것이 더 큰 집, 더 좋은 옷, 더 맛있는 음식에 있다고 해서 우리는 바디매오와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사도가 말했습니다.
(계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바디매오 보다 더 크고, 더 비싸고, 더 아름다운 것이라고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바아담일 뿐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성경이 말합니다.
(요 3:31-32) [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32]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 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관심을 바꾸어야 하겠습니다.
땅에서 옮겨 하늘을 향해야 하겠습니다.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바꾸어야 하겠습니다.
시간에서 벗어나 영원으로 향해야 하겠습니다.
은과 금에서 떠나 그리스도 예수를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관심-마음에 보이는 것이 변하는 자들 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희망(希望. 稀望)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만나야 하겠다는 결심을 굳혔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눈으로 주를 찾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지나가시리라고 짐작되는 곳으로 먼저 가서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행여 작은 소리라도 놓칠까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전에도 이런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큰 부자가 여리고를 찾으면, 소문을 들은 거지들이 그가 가는 길 앞에서 그를 기다리는 일이 흔했던 것입니다.
그때 바디매오도 그들 사이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바디매오는 혼자 기다리고 있습니다.
구걸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멀리서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바디매오의 보이지 않는 눈이 그 소리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일행이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바디매오는 자리를 차고 일어나 소리 나는 곳을 향해 소리를 질렀습니다.
나는 보지 못하니, 주께서 나를 보아달라는 외침이었습니다.

바디매오는 온 힘을 다해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의 소리를 압도하는 큰 소리였습니다.
그러나 기다리던 예수님의 음성은 들리지 않고, 시끄럽다고 나무라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러나 그 소리에 굴복하여 잠잠할 수는 없었습니다.
작정하고, 기다렸던 순간이었습니다.
한 번 불러 보는 것으로 그칠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더욱 크게, 그치지 않고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희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랄 希 자에 볼 望 자니 보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희(希) 자에는 드물다, 흔하지 않다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희박(稀薄)하다, 희소(稀少)하다, 희미(稀微)하다 할 때 쓰는 稀는 희망의 希와 같은 말입니다.
희망이라는 말은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는 뜻과 함께 그 소원을 이루기가 매우 어렵다는 뜻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希望/ 보기를 바라는 일은 稀望/ 보기가 어려운 일이기도 한 것입니다.
희망은 매우 가는 것이어서 쉽게 절망/ 끊어질 수도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바디매오에게도 그랬습니다.
희망이 생기긴 했습니다.
그러나 그 희망이 이루어 질 가능성은 희박한 것이었습니다.
무언가 마음에 보이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엇인지 희미하기만 했습니다.

예수를 만나야 했습니다.
그에게 구할 것이 무엇이 되었던지 우선은 그를 만나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그래야 희미한 그 무엇이 분명해질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 앞에 서는 일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아 더듬고, 넘어지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일은 예수를 둘러 싼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로부터 제지를 당했습니다.
더 가까이 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갈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벽이 되어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보이지 않는 자들이 보기를 원할 때, 무언가 희미한 것이 보여 분명한 것을 보고자 할 때, 어김없이 어려움이 닥치는 법입니다.
제일 먼저 닥치는 것은 지금까지 관심을 두어왔던 것을 등지는 어려움입니다.
땅에 속한 것들에서 마음의 눈을 돌리는 일입니다.
주님이 모두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던 바로 그것을 버리는 일입니다.
예수를 찾아 온 부자 청년이 버리지 못해, 근심하고 돌아섰던 바로 그 어려움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보다 심각한 어려움은 아닙니다.
바디매오가 하루 구걸하는 것을 포기하는 일과 다른 것이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죽을 일은 없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려운 일은 예수를 둘러 싼 사람들을 뚫고 예수 앞에 서는 일입니다.
두 말 할 필요도 없습니다.
교회를 찾았다가 낙심한 사람들을 한 번 관찰해 보십시오.
교회를 찾고 싶으나 다가오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십시오.
목사 때문에...
장로 때문에...
집사 때문에...
속장 때문에...
다 그렇지 않습니까?
정작 땅에 속한 것을 버리지 못해 다가서지 못하는 사람들까지 누구누구의 탓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희미한 것을 분명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어려움을 이겨야 하겠습니다.
땅에 속한 것을 버리는 아픔을 견뎌야 하겠습니다.
예수님 주변에 있는 자들의 방해를 이겨야 하겠습니다.
나아가 내가 그런 벽이 되고 있지 않은지 염려해야 하겠습니다.
예수 곁에 있으면서 정작 예수를 필요로 하는 자들의 앞을 가로막는 어리석음이 없으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소망(所望)

바디매오가 예수를 부르는 소리, 사람들이 바디매오를 나무라는 소리가 뒤엉켰습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는 것 같았습니다.
무언가 말을 주고받는 듯하더니 누군가가 바디매오를 불렀습니다.
조금 전에 자기를 향하여 조용하라고 외치던 그 음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리가 전과 같이 거칠지 않았습니다.
안심하라는 소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너를 부르신다는 말이었습니다.

우물쭈물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바디매오는 걸리적거리는 외투를 벗어 제치고 소리 나는 쪽을 향해 내달렸습니다.
한 걸음 떼기가 그렇게 조심스러웠었는데....
지금은 넘어질 일을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계실 것 같은 방향으로 무작정 뛰어 간 것입니다.

그리 오래지 않아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무엇을 원하느냐는 말씀이었습니다.
네가 누구냐고 묻지도 않으셨습니다.
어쩌다가 보지 못하는 자가 되었느냐고 묻지도 않으셨습니다.
마치 오랫동안 기다리게 했다가 만나 주시는 것처럼 그렇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를 위해 무엇을 해줄까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바디매오의 예감이 맞았습니다.
예수님은 동전 몇 잎이 아닌 다른 것을 주실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에는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라도 해 줄 수가 있다는 뜻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무엇을 구하는 것이 좋을까 생각할 여지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끝나기 무섭게 대답을 했습니다.
‘내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주님도 지체없이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바디매오는 희망을 이루었습니다.
주님 앞에 서는 순간, 주님의 음성을 듣는 그 순간 바디매오의 실낱 같이 가늘던 희망은 분명한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되리라고 믿고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 가면 은과 금 아닌 다른 무언가를 얻으리라는 막연한 희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희미했던 희망이 예수님 말씀을 듣는 순간 분명해 진 것이었습니다.
‘내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바디매오의 모든 문제는 보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를 만나 그 문제를 풀었습니다.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이제 그저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라고 말씀하셨지만 그 은혜를 입고 어디로 갈 수가 있었겠습니까?
바디매오는 자기도 모르게 주를 따르는 자들 틈에 끼어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소망(所望)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문자대로 보면 보이는 곳, 보이는 장소라는 뜻입니다.

바디매오에게 소망/ 바라 볼 곳이 생겼습니다.
내일이라는 날에 소망을 둘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주목해야 할 것은 바디매오가 가는 곳입니다.
주님은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그런데 바디매오는 가지 않았습니다.
그가 눈으로 보는 자가 되자 바로 예수님의 뒤를 따라 나선 것입니다.
...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가라는 말과 따라 오라는 말은 너무나 다른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마치 두 말이 같은 말인 양 그렇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가라고 하셨는데 쫓아갔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가 가시는 곳이 그가 보는 곳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의 소망/ 바라보는 곳이 예수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늘로서 온 예수를 보는 자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자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보지 못하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를 알아도 보지 못하는 자가 되면 헛일입니다.
욥이 말한 것과 같습니다.
(욥 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를 본 자는 그를 쫓게 되어 있습니다.
주를 본 자의 눈, 믿음으로 보게 된 눈은 하늘에 소망을 두게 마련입니다.
하늘로 불려 올라가신 그가 그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소망/ 그가 바라보는 곳은 하늘입니다.
소망을 하늘에 두고 사는, 영원을 보는 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앙망(仰望)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 속해, 세상을 따라 사는 것은 절망입니다.
여리고에 사는 소경거지 바디매오와 같습니다.

마음의 눈/ 관심을 바꿔야 하겠습니다.
세상에서 필요한 것에 마음을 두지 말고, 주님의 일에 눈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지금은 비록 희미하지만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다른 이들이 좇는 것을 좇지 않으니 어려움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어떤 것도 나와 주 사이를 가로 막을 수 없다는 각오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마침내 눈으로 주를 뵙고, 주 계신 곳에 소망을 두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소망을 하늘에 두고,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다시 사신 예수는 하늘에서 다시 오셔서 마침내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로부터 은혜가 임하리라는 믿음과 소망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미가 선지가 말합니다.
(미 7:7)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하나님이 나를 들으시리로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믿음입니다.
이렇게 사는 자가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자들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게 되었으니,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여 사는 자들 다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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