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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인이 ‘양’이면 목회자는 ‘개’인가?‘목자와 양’으로 비유된 관계는 ‘목사와 교인’이 아니라 ‘예수와 그의 백성’
류상태  |  sham5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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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년 10월 05일 (월) 17:23:56
최종편집 : 2009년 10월 05일 (월) 20:08:27 [조회수 : 4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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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쯤으로 기억합니다. 서른 전후의 젊은 전도사와 짧은 대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어느 직장선교회 예배모임에서 젊은이는 찬양인도를, 저는 설교를 맡고 있었지요.  

   
모임이 시작되기 조금 전, 젊은이가 자신이 겪은 불쾌한 일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교인을 ‘양’이라 부르고 자신을 ‘목자’라고 칭하는 그는 목회자의 권위를 인정해주지 않는 교인들의 무례한 태도에 대해 성토했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무례한 양들’에 대한 서운한 감정이 그대로 묻어나오고 있었지요.  

하지만 저는 젊은이의 말을 받아들이기는커녕 모진 말로 그를 힐난하고 말았습니다. 성서 구절을 인용하며 교인을 양이라 부르는 그의 태도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였습니다. 다음 본문은 그 때 젊은이에게 인용했던 요한의 복음서 21장 15~17절입니다.  

모두들 조반을 끝내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베드로가 “예,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내 어린 양들을 잘 돌보아라.” 하고 이르셨다. 예수께서 두 번째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정말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예,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하고 이르셨다. 예수께서 세 번째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께서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는 바람에 마음이 슬퍼졌다. 그러나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일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하고 분부하셨다.   

‘양과 목자’의 비유는 히브리성서(구약성서)에도 자주 등장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는 이런 익숙한 구도를 사용하여 지도자의 책무가 중요함을 제자 베드로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성서를 읽는 독자도 예수께서 ‘양과 목자’의 구도를 사용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오래도록 가르쳐 온대로 양은 교인을, 목자는 베드로로 대표되는 오늘날의 목회자를 지칭한다고 일반적으로 믿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예수의 메시지는 명료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양을 돌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놓치기 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는 ‘네 양’이 아니라 ‘내 양’이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 너의 양을 돌보아라.”가 아니라 “나의 양을 돌보아라.”입니다.  

이 본문에서 견고하게 접목된 목자와 양의 관계는 ‘예수와 그의 백성’입니다. 베드로는 이 견고한 연대의 바깥에 있습니다. 이 드라마에서 굳이 베드로의 자리를 찾는다면, 그는 두 주인공인 ‘예수’와 ‘그의 양’ 사이에서 그들의 돈독한 관계유지를 위해 일하는 조연일 뿐입니다. 좀 더 사실적으로 묘사하면, 베드로의 역할은 이 목장의 드라마에서 목자와 양의 사이에 위치하여 양들이 잘못된 길로 들어서지 않도록 돕는 개에 비견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본문의 예수가 사용한 ‘나와 내 백성’ 구도의 원형은 히브리성서에 너무나도 익숙하게 자주 사용되는 ‘하느님과 그의 백성’의 구도입니다. 하느님과 그의 백성은 성서의 두 축이며 주인공입니다. 물론 성서에는 그들의 돈독하고 바른 관계를 위해 일하는 중계자가 있습니다. 왕과 사제, 그리고 예언자입니다.  

권력과 명예, 그리고 백성의 존경을 받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서 기자들은 그들을 ‘종’이라고 불렀습니다. 결코 주인이 될 수 없는 사람, 주인이 되어서는 안되는 사람, 주인들(하느님과 그의 백성)을 섬기고 또 섬겨야 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면 ‘종’의 자리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종의 정체성을 찾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찾기는 찾은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종’이라는 말을 곧잘 쓰니까요.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자신을 낮추고 섬기는 자리에 있음을 뜻하는 ‘종’이라는 말이 존칭어가 되어 ‘종님’이 되었습니다. ‘종님’이라는 말에서는 진정한 종의 사명, 종의 자세를 찾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요? 요즘은 ‘종님’이라는 억지스런 호칭이 점차 줄어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대신 목회자들이 스스로 부담스런 ‘종’의 자리를 떠나 ‘목자’의 자리로 이동하면서 교인들을 ‘양’으로 만들고 목자에 대한 순종을 강요하고 있는 건 아닌지요?  

성서가 ‘목자와 양’의 구도를 ‘하느님과 그의 백성’에만 한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그 구도를 ‘지도자와 백성’에게 부여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구도는 주로 지도자에게 책임을 물을 때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목자’에서 찾으려면 그 호칭을 권위를 내세우는데 사용하지 말고 책임을 지는데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는 위의 본문에서 베드로에게 그런 책임에 대해 묻고 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예수의 물음이 우리말 성서에는 똑같은 단어로 나오지만, 원문에는 “네가 나를 아가페하느냐?” 라고 두 번이나 반복해서 묻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 물음에 대해 베드로는 “제가 주님을 필레아합니다.”라고 반복해서 대답합니다. 이에 대해 예수는 세 번째 물음을 “네가 나를 필레아하느냐?”로 바꾸었고, 베드로는 “제가 주님을 필레아하는 건 아시지 않습니까?”하고 대답합니다.  

‘아가페’는 신이 그의 백성에게, 또는 부모가 자식에게 베푸는 ‘무조건적 사랑’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필레아’는 친구나 학문, 예술 등을 사랑한다고 할 때 사용하는 ‘조건적 사랑’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무조건적 사랑을 요구하는 예수의 질문에 베드로는 “아가페적 사랑은 자신이 없지만, 조건적이고 제한적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라고 답을 한 셈입니다.  

스승을 세 번이나 배반했기에 신중해진 것일까요?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는 정직한 베드로의 대답에 예수는 자신의 원래 요구를 철회하고 “네가 할 수 있는 조건적 사랑이라도 열심히 실천하여 내 양을 돌보아라”라고 말씀해 준 셈입니다.  

본문에는 ‘목회관’에 대한 주님과 베드로의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지는 듯합니다. 예수는 베드로에게 자기 백성에 대한 돌봄을 그토록 강조하면서도 제자의 한계를 인정해주고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 당신의 백성을 돌볼 것을 당부합니다. 그러나 돌봄의 대상이 ‘너의 양’이 아니라 ‘나의 양’이라는 점은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인들을 양으로 비유하는 것이 허용되려면 목자는 예수라는 점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교인을 양으로, 목회자를 목자로 설정하고 나면 예수의 자리가 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며 구세주로 고백됩니다. 그런 예수의 자리를 찬탈하는 것이 그리스도교 정통신앙에서 얼마나 큰 죄로 간주되는지는 누구보다도 ‘보수정통’ 목회자들이 잘 알 것입니다.  

성서는 이삼천년 전의 시대상황에서 쓰여진 책이기에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와 한계가 고스란히 담겨있지만, 우리나라 교회 강단에서는 여전히 성서의 권위와 절대성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보수 목회자들이 ‘예수와 그의 백성’의 구도로 설정된 ‘양과 목자’의 비유를 자신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종속적 구도로 왜곡하는 것은 자신들이 신봉하는 성서의 권위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교인들을 ‘양’이라고 부르고 싶은 목회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스스로를 목자라 부르지 말고 ‘개’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의 자리를 찬탈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 이 칼럼은 격월간지 <공동선> 2009년 9+10월호에 실린 글을 일부 수정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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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자요. (124.60.171.48)
2009-10-07 21:55:31
맞는 말 입니다
양 치는 시스템은 이렇습니다. 목자가 있으면 양이 있고,양을 지키는 개가 있지요.
예수님이 목자이면 당연히 목사는 개입니다. 개가 맞아요. 그런데 이 진리를 목사들은 가르치려 하지 않지요. ㅎㅎㅎ 결국 에수님 양ㅇ르 빼앗는 양도둑이 되고 말앗습니다. 나중에 지옥갈 이들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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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211.200.66.4)
2009-10-07 14:58:12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아가는 목사에게 권위는 더욱 필요하다.
하나님은 혼돈과 무질서를 선하다고 보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목사에게 강력한 권위를 주신다. 오늘날과 같은 포스트모던시대의 탈권위적인 상황에서 목사의 권위는 더욱필요하다. 소견에 옳은대로 살아가는 성도들을 권위없이 어찌 바른길로 인도할 수 있단 말인가? 목사의 말이 무시당하면 하나님의 말씀도 무시당하는 것이다. 단, 목사는 성도들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실된 존경심을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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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산 (112.144.36.17)
2009-10-07 10:30:45
그래도 하나님 뜻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목사들도 있습니다.
이 땅에 무허가 신학교들이 판을 치고 있고, 인가를 받은 신학이라도 군소신학들은 학생이 없어 아무나 받아들여, 자질없는 목회자들이 너무 많이 배출되고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종교성같은 거라도 좀 만들어져서 국가에서 관리를 해주었으면 하고 소망합니다. 공인자격시험같은 것도 도입하구요, 그렇다면 이런 논란도 많이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밑에 쓰신 분 만인사제설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군요. 루터도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약간의 참고로... 중세에 사죄권을 가진 사람이 사제라고 해서 결국 각 사람의 약점을 죄다 알고 있어 사람들이 사실상 꼼짝할 수 없었지요. 루터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사제들이라는 것을 말했지만 어느 누구도 그가 적절하게 부름을 받지 않았다면 안수 받은 목사가 없을 때의 긴급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목회 기능을 수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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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둥이을 든 예수 (121.129.19.207)
2009-10-06 23:45:06
가식과 위선자들 이땅에 자칭 목회자들이여
0 0 님 의글을 읽고 아멘......또 아멘 입니다....꼴갑을Ej는 먹사나 막사가 이글을 보면 좀 깨닫을라나......그래도 말장난하고싶은 분들이 꽤 되네요
차라리 양때를 모는 개가 더진실하지 않을까요

목양실 목장장.구역질이 나네요......막사나 먹사는 만인 사제설을 인정하라...........
그리하면 그대들이 참 목사가 될가능성 50% 다 먹사 막사님 네들 정신차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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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산 (112.144.36.17)
2009-10-06 19:19:47
필레오니 아가페니 구분 해서 해석하는 것...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김세윤 교수도 그분의 책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당시 서로 교호적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그렇게 그렇게 주장하는 분들이=>여전히 성서의 권위와 절대성을 주장하는 고루한 사람이라고 몰아가시는군요, 성서의 권위와 절대성을 인정하는 분들은 절대 내 양이라고 하지를 않고 하나님의 양이라고 생각하는 분이겠지요, 구분을 정확히 해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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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담 (121.130.231.67)
2009-10-06 14:19:03
양을 치는 것이
목자(들)이든 멍멍이든, 그외 잘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돕는 이든,
주어진 일을 묵묵히 참 목자를 섬기는 마음으로 하면
그게 양치는 소임을 다한는 것이지요. 설마 멍멍이와 같이 놓였다고 기분나빠 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양같은(양을 자기 몸같이 여기는) 목자도 있고, 늑대같은(양을 은연중 종처럼 여기는) 목자도 있고, 위 글은 후자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는 것이겠죠.

부디, 달을 가리키면 달을 보려고 합시다. 달은 가리킨 울퉁불퉁한 손을 보지 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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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염소 (119.193.123.20)
2009-10-06 13:18:04
양을 치는 것이 목자라구요?
양을 치는 것은 목자(주인)이지만 양을 실제적으로 치는 것은 목동(혼자가 아닌 여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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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김주환 (121.148.171.175)
2009-10-06 06:15:03
양을 치는 것은 개가 아니라 목자입니다.
류선생님의 글을 읽었습니다. 왜 이렇까 생각을 해봅니다.
기존 교회가 잘못한 것이 많이 있지요. 아마도 몇몇 목사님들이 성도들을 자신의 마음에 맞게 이리 저리 움직이는 것을 보고 이건 아니다고 말씀한 것같습니다.
그렇다고 엉터리를 주장하는 것을 보면 우습기도 합니다.
목자는 예수님이고 양은 그의백성이다. 맞는 말씀입니다.
양도 예수님의 양이 맞습니다. 그렇다고 양을 치는 것이 개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개는 양을 치는 것이 아니라 원치 않는 길로 가는 것을 막고 있을 뿐입니다.
개가 양에게 풀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개에게는 인격이 없습니다.
류선생님의 말씀따라 목자가 아닌 개가 목자역할을 하는 이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양은 목자가 인도해야 합니다.
양을 치는 것은 목자가 합니다. 주인이 양을 칠 경우도 있지만 삯을 주며 양을 치게 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또 삯군목자라고 말을 듣겠지요.
예수님은 목자장으로 당신의 사역을 목자를 통해 하게 하였습니다.
목자는 주인이든 주인이 아니든 양을 치는 자는 다 목자입니다.
성도는 나의 양이 아닙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님에게 양을 치고 먹이라는
임무를 받고 사역을 감당하는 목사입니다. 이것이 바른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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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1
박창진 (124.80.238.11)
2009-10-05 20:22:24
말씀하시려는 바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렇지만 성경에는 이런 구절도 있습니다.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벧전 5:3-4).

장로로서 교회의 다른 장로들에게 적은 글의 한부분입니다.
이 구절이 장로를 목자로서 보고 있다는 사실은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목자들의 장으로 말씀하고 있고요.
양의 주인은 아니라는 관점은 아니고요.
자신의 양의 성숙을 위하여 세운 장로들을 목자로 보고서 그 목자들의 장이라는 관점이지요.
그러므로 목회자가 스스로를 목자라고 본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의 자리를 찬탈하는 것은 아니고요.

목사가 스스로를 목자라고 보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런 의식을 바탕으로 주장하려는 자세를 가지고 사는 것이 문제이지요.

균형감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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