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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어느 한인교회 예배에 대한 단상미국의 보수적인 한인 침례교회의 찬양 예배와 설교에 대하여
정강길  |  minjung21@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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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년 09월 28일 (월) 08:59:45
최종편집 : 2009년 09월 28일 (월) 12:25:56 [조회수 : 50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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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배 시작 전 모습

미국 한인교회 예배에 참석하다

이국땅에서 처음 맞이하는 일요일이 되어 미국의 한인교회를 처음으로 가 보았다. 함께 참석했던 분의 얘기에 따르면 이 한인교회는 침례교단에 속하며 대략 400명 정도 다니는 중간 규모 정도의 교회에 해당한다. 내가 현재 머물고 있는 노스캐롤라이나 주 랄리 지역은 남부 지역이라서 특히 침례교회가 매우 많은 편이다. 교회 건물은 체육관을 쓰고 있는데 평일에는 체육 시설 같은 다른 목적으로 쓰다가 일요일에는 예배 장소로 사용하는 다용도 건물에 해당된다. 시설 활용 면에서는 좋은 것 같았다.

예배 시작 30분 전에 도착하니까 그다지 사람이 별로 없었으나 예배 시간이 가까워올수록 점차로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먼저 찬양단이 나와서 예배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시작했다. 이미 한국교회에도 많이 유행하고 있는 찬양 예배 스타일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밴드의 음악 반주와 그에 맞춘 찬양대의 노래와 율동 그리고 감동을 자아내려는 찬양단 사회자의 들뜬 목소리가 소위 '은혜'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기엔 충분한 것 같았다. 예배 주보를 보니 찬양단 사회자는 '음악 목사'로 표시되어 있었다.  

   
▲ 찬양 예배 시작
 
   
▲ 성도들을 뜨거운 찬양 은혜(?)로 안내하는 음악 목사

기존 기독교의 CCM 및 찬양은 가사 때문에 새로운 기독교 입장에선 거의 반역에 가까워 

나 자신은 매우 보수적인 신앙인으로 있던 시절 열렬하게 찬양팀 활동까지도 해본터라 애초부터 이러한 찬양 예배들도 그리 낯설지 않았다. 그리고 부르는 찬양곡들도 거의 대부분이 매우 익숙하게 알고 있는 곡들이라 따라 부르는 데에도 별 어려움은 없었다. 오히려 오랜만에 불러보는 익숙한 감흥마저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솔직하게 말하자면 현재의 나는 CCM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싫어한다고 말하는 것이 보다 더 정확할 것이다. 나를 아는 주변 사람들은 내가 음악을 얼마나 매우 좋아하며 그리고 클래식에서 록메탈까지 혹은 재즈 및 테크노, 국악 등등 장르 자체를 가리지 않는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기에 내가 CCM을 싫어하는 것이 어쩌면 이례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물론 기존 기독교인들 가운데도 매우 극단적인 보수 신앙인의 경우 신성한 예배에 밴드 찬양을 도입하는 것에 대해선 매우 부정적으로 여기거나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익히 잘 알고 있다. 단지 나로서는 다른 이유는 없고 딱 한 가지 이유 때문인데 바로 CCM 찬양의 가사 때문이다. (*참고로 나 자신이 CCM에 잠시 솔깃했던 적은 조필성의 록기타 연주가 빛을 발했던 <예레미> 정도였을 뿐이다. 물론 그래도 가사는 그다지 맘에 들지 않았다).  

우리가 아는 기존의 찬송가 및 복음성가와 CCM 노래 대부분이 "전능왕 어쩌구". "왕이신 예수 어쩌구", "심판이 어쩌구" 등등 일반 신자들을 수동화시키기엔 더할 나위 없이 딱 좋다고 하겠다. 그 외에도 "내 피가 사해졌느니 어쩌니" 하는 주술적 대속론을 비롯하여 거의 대부분의 찬양곡들이 잘못된 신학적 폐단에 기초되어 있는 터라 많은 사람들을 무뇌아적인 기독교인으로 만들기에 참으로 안성맞춤이 아닐 수 없다. 

   
▲ 가슴으로 뜨겁게 찬양하는 찬양단의 모습
 
   
▲ 찬양으로 인한 은혜(?)의 순간 ⓒ 정강길

사람이란 존재는 일반적으로 감정적이고 정서적인 존재라서 사실상 결코 이성적인 존재가 못된다. 그렇기에 음악으로 감정적 흥분과 열병 그리고 우리의 정서적 친밀성을 조금이라도 고양시킬 경우 한편으로 우리의 이성은 너무나 쉽게 마비될 수 있다. 즉, 가슴 속에 느껴지는 감정이 벅차올라서 극대화된 상태, 바로 그때 주입되는 잘못된 설교 및 신학적 언명들은 너무나 매끄럽게 주입될 수 있기에 실로 매우 치명적일 수 있다. 

대부분의 일반 신자들은 바로 그때의 그 벅찬 감정 상태와 가슴의 뜨거운 느낌 그리고 찬양단 사회자가 쏟아내는 신앙의 언변들을 마치 하나님/예수님/성령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여기거나 혹은 적어도 은혜를 자아내는 즐거운 기폭제로 여기는 것이다. 

만일 역으로 CCM 가사가 잘못된 보수신학에 기반되어 있지 않고 제대로 된 신학에 기초한 찬양이라면 그것은 오히려 금상첨화일 것이다. 대중은 음악이나 영화 및 그러한 문화적 장르에 쉽게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기존의 보수적인 CCM이나 복음성가들은 새로운 기독교 입장에서 볼 경우 거의 반역 수준이 아닐 수 없다고 해야겠다.

(* 혹시 이 글을 읽는 분들 가운데 보수교회의 찬양곡들만 아시는 분들이라면 <평화의 아침을 여는 이>라는 찬양집 같은 몇몇 진보적 찬양곡들도 함께 접해보길 권한다. 그리고 국악 찬양곡들 가운데도 좋은 게 많다) 

성경 본문의 역사적 배경을 빼먹고 제시되는 비역사적 내용의 설교 행태

이윽고 설교를 담당한 목사가 나와서 설교를 하였다. 제목은 "배우며 자란다"였고, 본문말씀은 흔히 잘 알려진 디모데후서3장 13-17절이었다. 설교의 내용은 다소 짐작하다시피 "성경은 유익하니까 성경구절 내용을 모두 믿고 살아라"는 내용이다. 특히 디모데후서 3장 17절에 나와 있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는 구절은 흔히 성서영감설이나 성서무오설을 주장할 때 곧잘 들먹이는 성경구절이기도 하다. 

그런데 내가 알기에 대부분의 목사들의 설교는 이 구절을 설명할 때 이때 말하는 성경이 66권 모두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이때 말하는 성경은 디모데후서는 물론이고 신약 성경 27권은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즉, 엄밀히 말해서 구약만을 가리킨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때 당시의 정황이나 역사적 배경에 대해선 생략하거나 왜곡시켜 버리는 것이다. 

내가 지금 여기서 좀더 강조하고 싶은 바는 단지 디모데후서의 내용을 목사가 잘못 가르친 것만을 두고 트집잡고자 함이 결코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오늘날 대부분의 목사들 설교가 그러하듯이 성서 본문(텍스트)의 본래적 정황과 역사적 배경 내용을 너무나 쉽게 빼먹고 곧바로 이천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무시간적으로 제시해버리는 그 치명적 오류를 지적하고자 함에 있다. 그래서 오로지 교회만 살찌울 뿐, 지극히 비역사적인 설교들이 양산되는 것이다. 

   
▲ 설교하는 목사

목사의 입장에선 일반 평신도가 머리가 똑똑해지고 커지면 다루기도 힘들고 피곤해질 수도 있기에 그저 단순하게 그리고 순종적으로 가르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목회 스타일에 훨씬 이롭다고 보는 것인가? 내가 볼 땐 성도들을 제대로 양육하고자 한다면 오히려 끊임없이 자기 신앙에 도전과 의문을 던져주는 것이 더욱 효과적일 수 있다고 본다. 

"배우며 자란다"는 것은 그저 성경말씀 암송하고 "믿쑵니다 아멘"이라고 뇌까리기만 한다고 해서 저절로 자라나는 게 아니다. 우리의 총체적인 삶 가운데서 솔직하게 일어나는 모든 의문들에 대해 회피하지 않고 정직하게 반응하는 것이며, 또한 그럼으로써 자기 오류에 대해 겸허한 반성을 가질 때 진정한 신앙의 도약과 성장이 일어난다고 여겨진다
(* "지금 내가 믿고 있는 것은 과연 진리인가?" http://freeview.org/bbs/tb.php/b001/108 참조).

나는 오늘날 기독교에서 행해지고 있는 설교 자체가 잘못 유입된 이방 문화라고 보고 있지만(이 얘긴 언젠가 따로 폭로될 것이다), 적어도 설교를 행한다고 한다면 본문의 시대적 맥락부터 살피면서 전할 수 있도록 제대로 해야되지 않겠는가. 오늘날 기존 기독교의 설교들의 가장 큰 맹점은 보수 근본주의 신앙의 5대 교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데에 있다(*심지어 온건한 복음주의 진영의 교회들조차도 그러하다. 이들은 여기에다 사회적 실천이라는 양념만 살짝 가미하고 있을 따름이다).

또한 설교를 비롯한 기존 기독교회의 예배의 가장 큰 문제점은 1인 목사가 주도하는 수직적 관계라는 점이며, 그럼으로써 일반 신자들은 심각할 정도로 수동화되고 길들여지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 다수의 신자들은 그저 일방 관계에 의해 움직여지는 수동적 객체일 따름이다. 교회 민주화를 주장하는 자들도 이것이 예배 포맷이 갖는 신학적 문제라는 점을 잘 들여다보지 못한다. 교회의 수직적 권력 구조는 그럼으로써 일반 신자들에게는 몸으로서 체화된다.

예배 후의 친교 및 미주 한인교회의 독특성

예배가 끝나고 함께 점심을 먹는다. 이른바 친교의 시간인 것이다.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시간이 아닐 수 없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즐거운 대화를 나누며 밥을 먹는 것은 축복의 시간인 것이다. 이날 한인교회에서 함께 식사를 하며 나눈 대화 주제들은 어쩌면 매우 시시콜콜한 생활 얘기들로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척박한 미국땅을 살아감에 있어 나누는 삶의 애환이 묻어 있는 소중한 잡담 시간이기도 하다. 

바로 이점에 나는 한인교회의 독특성이 있다고 본다. 즉, 낯선 땅에 정착하려는 이민자들로서는 이들의 정서와 애환을 나눌 수 있고 풀 수 있는 교류의 장을 마련해주는 교회가 당연히 매우 반갑지 않을 수 없다. '한국에서 건너 온 이민생활'이라는 삶의 정황 자체는 보수교회든 진보교회든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맞닥뜨리고 있는 공감적 배경인 것이다.  

   
▲ 예배가 끝난 뒤 모습

한인교회를 나와서 같은 이민생활을 하는 다른 사람들을 통해 서로 정을 나누며 또한 이민정착에 대한 유용한 정보도 얻고 또한 사회적 지위를 확보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기에도 한인교회는 더 없이 좋은 교두보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점에서 힘든 이민생활을 위로하기에도 절대자 전능자를 강조하는 기존의 보수 신앙이 오히려 더 잘 먹혀들어가는 면도 있으리라 본다. 하지만 그러한 가운데 자기도 모르게 교회의 1인 체제에 의해 길들여지고 수동화되는 것이다. 

나는 어려운 이민자들을 돕는 한인교회는 매우 유용한 곳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여전히 기존 기독교의 목회 스타일로 일반 신자들을 매우 우매하게 만들고 있다는 점에선 한국의 교회나 이곳 미국의 한인교회나 그다지 크게 달라보이진 않는다. 이민적 상황을 제외한다면 한국교회 현장과 거의 별다르지 않다고 해야할 것이다.

한국에서도 그러하듯 미국땅 역시 좀더 깨어 있는 진보적인 교회를 찾기란 매우 드물다고 한다. 특히 새로운 기독교 운동을 하는 교회란 한국이나 미국이나 아직은 거의 없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미국에 있는 동안에도 여러 다양한 분들과 모임들을 접하면서 기독교의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새롭고 건강한 기독교 운동의 시각들을 계속적으로 전하고자 한다. 

   
정강길 / 세기연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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