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악회 제13회 작곡가의 초상' 이라는 연속 기획의 이번 작곡발표회에는 양악과 국악 사이에서 나름대로의 한민족의 정서를 담은 역작들이 연주 되었다.

오광호가  연주한 '클라리넷을 위한 <저녁노래 1>',  이보연과 안수현이 연주한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랩소디>'  김일륜이 연주한 25현 가야금을 위한 <잎, 물, 빛>', 합창단 "음악이 있는 마을"(지휘 홍준철)이 연주한  '세개의 합창곡 <낙화>, <입맞춤>,<새타령>  등이다.

작곡발표회를 포함해 하여튼 음악연주회에서 강연을 듣게 된 것은 무척 신선하였다.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음악을 아는 데 적지않은 도움이 되었기에 여기에 그 전문을 수록한다.

미래악회 제13회 작곡가의 초상

이건영의 음악세계 강연 2005. 6. 10

대결에서 스밈으로

저는 지금까지 항상 음악에 sollen이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음악은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또 음악가는 그냥 음악을 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목적, 그것도 고귀한 목적과 관련되어 존재하고 수행한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것은 물론 18세기 말이래 진지한 음악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생각, 즉 ‘인간 저는 지금까지 항상 음악에 sollen 이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즉 인간을 구원하는 고귀한 존재로서의 음악’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일 터 입니다.

여기까지는 어렵지 않은데 “과연 그 sollen 이 어떤 음악을 지향하는 것인갚는 문제는 쉽게 답할 수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른 바 아름다운 자연을 그리는 음악(1)인지, 인간의 모순을 들어내는 음악(2)인지, 우리의 고유한 정서를 표현하는 음악(3)인지, 인간 구원에 기여하는 공동선의 목적에 부응하는 음악(4)인지, 모든 외부적 의미를 초월한 음의 결정체로서의 음악(5)인지, 그때 그때 나의 정서에 충실한 <裸心> 같은 음악(6)인지 판단이 어려웠습니다.

대체로 저는 위에 언급한 논리들을 왔다 갔다 하면서 음악을 만들어 왔습니다. 어느 것 하나도 버릴 수 있을 만큼 경박한 논리가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어떤 하나가 강력하게 모든 것을 제압하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작품으로 예를 들자면 초기작 <청산별곡>이  첫 번째에, <E 음으로부터의 전주곡>이 두 번째에, <燭相>이 세 번째에, <분노의 시>가 네 번째에, <결>이 다섯 번째에, 가곡집 <우리가 물이 되어>가 여섯 번째에 속할 것입니다.

자연 저의 음악은 양식적 일관성이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의 작곡가로서 자신의 고유한 세계 혹은 고유한 언어를 가지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81년엔가 어떤 프로그램 노트에서 저는 “나는 아직 나의 고유한 음악 언어를 가지지 못하고 있다. 나는 나에게서 먼 것들을 덜어가고 있다. 결과적으로 어떤 것들이 남아 그것이 나의 정체성을 만들어 줄 것을 기대한다.”라고 썼던 기억이 납니다.

저의 음악방식을 일관된 논리로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은 반성과 실천이라는 생각의 방식을 가져옴으로서 입니다. 대체로 80년대 초반에 자리 잡게 된 이 생각은 저의 졸문<한국음악의 반성적 접근>과 <민족음악 양식론의 성격과 구조>에서 정리한 바 있지만 이 생각은 요컨대 나를 둘러싼, 그리고 나를 형성하고 있는 음악의 환경을 반성하고 그 반성의 결과로서 제시되는 비젼을 방향으로 삼아 그 환경과 관련된 음악의 실천을 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이 논리에 따르면 sollen의 대상은 환경이고 방향은 비젼입니다. 나의 음악은 환경(청중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음악 감수성, 때로는 계, 때로는 음악과 관련된 생각이나 주장이나 의식까지도 포함하는)과 대립하는 존재이며 더구나 도전적입니다. 도전적이어야 비젼으로 환경을 끌어갈 수 있는 동력이 나오니까요. 그리고 작곡가의 행위는 하나의 음악실천입니다.

이것이 실천이므로 음악을 만들어 내는 실천만큼이나 음악에 관한 생각의 피력, 음악계 내에서의 활동 등의 실천도 버금가게 중요해 집니다. 즉 음악을 통한 음악을 위한 실천은 그 지평이 매우 넓어지게 됩니다. 예를 들면 제가 반성하는 음악의 환경이 맹목적인 서양음악의 추종이라고 한다면 그 실천은 우리 음악의 정체성을 찾는 방향으로 나타날 것이고 그것이 상업적 대중음악 이라고 한다면 그 실천은 작품성을 갖는 대중예술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月印天江이라는 말로 이 관계를 정리해 보기도 했습니다. 즉 하나의 진리가 구현되는 방법은 수없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의 한국음악론이나 민족음악 관계의 실천은 하나의 강일 뿐입니다. 반성해야 할 환경의 가장 우선적인 대상이 자아가 없는, 따라서 sollen은 없고 이미 서양음악에 동화된 채 sein 밖에 모르는 음악감수성과 음악의식이었으므로 가장 먼저 한국음악과 민족음악을 얘기했던 것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종종 동료나 후배들에게 이러한 위험을 설총의 선문답을 빌어 얘기하곤 했습니다. 저의 실천방법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예이니 그 선문답을 여기서 소개하겠습니다.

한번은 설총이 큰 깨달음을 얻은 듯 원효를 찾아와 말했습니다. 아버님, 사람이 무릇 선을 행해야지요. 원효가 대답했습니다. 애야, 선을 행해서 무엇에 쓴단 말이냐? 의아해진 설총이 다시 묻습니다. 그렇다면 아버님은 우리가 악을 행해야 한단 말씀입니까? 이에 원효가 대답합니다. 애야, 선도 행하지 말진대 하물며 악이란 말이냐?

그런 의미에서 저를 민족음악이나 포스트모더니즘과 관련되어 설명하는 것은 저로서는 충분하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민족음악은 단계적인 목표에 속하고 포스트모던하게 보이는 것은 여러 가지 실천으로 말미암은 현상의 일부입니다. 오히려 반성과 실천, 주위를 둘러싼 환경과의 대결, 비젼으로 향하는 실천적 의지 등은 매우 특징적으로 모던한 정신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저의 이러한 태도에 변화가 생긴 것은 지구의 유한함을 생각하면서부터입니다. 사실 지구의 규모는 사람들의 생각에 별로 조건으로 작용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지구의 문제는 공해, 대기오염, 자원고갈, 인구팽창 등의 부정적 개념과 관련지어 애기하지 자유, 역사, 의지, 발전 등 오늘날 인류가 자랑하는 가장 위대한 유산의 정신을 그루터기와 관련지어서 애기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생각해 보니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지구가 참으로 작고 연약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로만 클럽의 경고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 저의 20대 초반이었고 보면 지구의 작고 연약함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들어왔지만 그것이 저에게 영향을 준 것은 저의 소비 생활이나 환경관련 실천에 머물렀지 그것이 저의 사고방식과 가치지향 자체를 바꾸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았습니다. 즉 인간의 사이즈가 문제가 되는 것은 물질적인 차원이라고 생각했지 정신적인 차원까지 포함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은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위대하더라고 지구보다 위대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환경과 대립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자유도, 지금의 상태를 바꾸어 좀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발전도, 주어진 조건을 타개하기도 하고 순응하기도 하는 과정인 역사도, 그 역사를 역동적인 것으로 만드는 인간 특유의 힘의 원천인 의지도 모두 지구의 유한함과 관계없이 무한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보니 일찍이 동양의 지혜들이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 자유를 언급하고 있었습니다. 아직 지구가 그렇게 작고 연약해 보이지 않을 때 그들은 인간의 사이즈를 작게 두는 것의 가치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태도의 변화는 곧 저의 음악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저의 음악논리의 근간은 환경과의 대결하는 음악의지, 끊임없는 반성, 비젼을 향한 실천, 그로부터 노정되는 역사와 발전의 개념 등 마치 지구의 무한을 전제한 것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은 지구의 유무한도 둘째 문제였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렇게 생각이 바뀌자 그 동안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보였던 것들이 더 이상 그러하게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한 때 저의 심장을 뛰게 했던 ‘위대한 음악’이라는 말은 이제는 저를 별로 움직이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음악의 sollen은 무엇입니까? 작고 연약한 지구를 그리는 것인가요? 그러한 멧세지를 담은 위대한 곡을 쓰는 것입니까? 아마 그것이 효과가 크기는 할 것입니다. 그 위대한 곡을 통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의 욕망을 줄이게 될지 모르니까요. 그러나 그것은 별로 새로운 일도 아니고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지금까지 해온 방식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위대한 곡이 작음의 정신을 담는다는 모순이 문제입니다. 폭력을 없애기 위해서 폭력이 필요하다는 것과 같은 모순이지요. 따라서 작음의 정신을 담을 수 있는 작은 음악의 모습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생각하고 있는 그 음악의 모습을 여기서 대강 그려보려 합니다.

이제 작곡은 비젼을 향하여 환경과 조건을 끌고 가는 실천이 아닙니다. 곡을 만드는 일이란 나의 존재를 확인하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매개해 주는 일입니다. 곡에서 다뤄지는 것은 나의 생각, 나의 정서, 나의 속도나 나의 감수성 등이든지 나와 음악을 공유하는 사람과 같할 수 있는 공동의 무엇입니다. 최근에는 음악이 목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결과가 되는 예를 들어 삶의 수행의 한 부수물 혹은 매개물로의 음악의 개념에 깊이 공감을 합니다. 우리들의 선조는 이러한 개념에 매우 익숙했었지요, 저는 첼로를 위한 <저녁노래 2번>, 비올라와 가야금을 위한 <저녁노래 5번>등에서 이러한 개념을 음악으로 만들어 보려고 시도하였습니다.

작곡행위가 이러한 것이라면 그 결과인 음악이 굳이 환경 혹은 청중과 대결해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대결이 아니라 친화해야 할 것입니다,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스며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스며들어가야 하는 것이라면 그 자체가 견고하게 완결된 것이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섭취하기에 좋은 정도로 묽은 것이 좋습니다. 음악의 자체완결성은 그렇게 사활적으로 중요한 사항이 아닙니다. 또 스며들어갈 음악이라면 그것이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가져야 하지도 않습니다. 즉 다른 어떤 것이 가지지 못한 모티브와 질서와 언어를 가져할 이유가 없습니다. <울산, 내사랑>의 몇 몇 합창곡이나 <혼자 사랑>같은 노래들은 이러한 개념으로 잘 설명됩니다.

이렇게 되면 제 얘기의 출발점이었던 음악의 sollen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작곡행위가 다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작업이고 작품이란 삶의 수행의 한 부수물 같은 것이라면, 그래서 작품의 고유한 정체성이 더 이상 큰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면 sollen은 이제 무효인가? 제 경우에 아직도 그렇지는 않습니다.

저는 그것을 시심이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시심이라는 말은 이 경우에 욕망 혹은 관심이라는 말의 대척점에 놓입니다. 욕망이 우리의 중요한 본성 중의 하나이기는 하지만 이에 의하여 인간의 사이즈가 엄청나게 커 버린 것도 사실입니다. 저는 욕망과 관심에 못지않게 시심도 인간성을 이루는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욕망과 관심처럼 직접적이고 강하지 않아서 때로 부수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설명하기 어려운 많은 디테일을 만들어 주면서 인간만이 가지는 독특한 깊이와 폭을 부여해줍니다. 시심의 작용은 대체로 욕망 및 관심에 반대됩니다. 시심은 자신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줄입니다. 가지는 것이 아니라 버립니다. 이러한 시심을 연습하고 확인하는 장으로서의 음악을 만드는일, 이것이 다는 아닐지라도 아직은 저의 음악에 방향을 만들어 주는 sollen으로서 작용합니다.

얘기는 일단 이렇게 꺼내 놓으면 하나의 선을 따라 치달아 갑니다. 그러나 나의 손과 마음은 그렇지 못합니다. 손은 때로 나의 생각과는 달리 이미 자신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달려갑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작품은 일관되지 못한 생각의 켜를 그대로 노출해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 발표에 이어서 들려 드리는 음악은 비교적 최근작들로서 앞에서 언급한 생각들에 영향을 받으면서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그런 점들이 확인될 수 있다면 다행이겠습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