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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대로 행하는 자가 되라미리 보는 교회력 설교/오순절 후 열네번째 주일(20090906)
박성규  |  theos53@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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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년 09월 02일 (수) 23:16:10
최종편집 : 2009년 09월 04일 (금) 13:26:14 [조회수 : 3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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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 후 열네 번째 주일(20090906)
성서일과/ 시 146; 사 35:4-7a; 약 2:1-10; 막 7:24-37
본문/ 마가복음 7:24-37
설교/ 믿음대로 행하는 자가 되라.


          (막 7:24-37) 『[24]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경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하나 숨길 수 없더라 [25]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 엎드리니 [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8]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30]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예수를 주시요, 그리스도며,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믿음으로 주 앞에 나온 성도들에게 주의 크신 능력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의 성서일과는 믿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일컬어 믿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믿음이라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는 말입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셨습니다,
‘오직’입니다.

오늘 봉독한 마가복음에는 이방의 한 여자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한 마태복음에서 주님은 이 여자를 가리켜 말씀하셨습니다.
          (마 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예수님이 인정한 믿음이었습니다.
소원을 이룬 믿음이었습니다.
오늘 주신 성서일과의 말씀을 통해 이 여인의 믿음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살피는 동안, 우리 모두가 이 여인과 같은 믿음, 예수님이 인정하는 믿음으로 소원을 이루는 자들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믿음의 시작은 믿음의 대상을 바로 선택하는 지혜입니다.

이 여자는 수로보니게 족속으로 헬라인이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가나안 여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이방인이었다는 뜻입니다.

나라마다 방언이 다르고, 민족마다 섬기는 신이 다른 법입니다.
여호와께서 유일하시고, 참된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리일 따름입니다.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이방인에게 여호와는 그저 많은 신들 중의 하나일 따름입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자기 조상들의 신이 아닌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소문을 듣고 왔다고 했습니다.
소문을 듣는 사람들은 대체로 그 소문이 참일까, 거짓일까 하는 호기심을 갖게 마렵입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달랐습니다.
소문을 듣고, 믿은 것입니다.

들은 것이 참일까, 거짓일까 확인하러 오는 자는 결코 이 여자와 같을 수 없습니다.
여자는 예수의 발아래 엎드렸습니다.
살피는 자의 자세가 아닙니다.
믿고, 구하는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하지만, 듣는 것만으로 믿음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듣고, 깨닫는 자가 주님이 인정하는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몰랐던 여자,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이방의 신들을 섬길 수밖에 없던 이 여자가 소문을 듣고, 믿음으로 예수님을 찾아 올 수 있었던 것은 지혜입니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라는 고백으로 예수님을 기쁘게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감탄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마 16:17) 『...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사람들은 물론이요, 제자들조차도 예수님을 일러 많은 선지자들 중의 하나라고 여기고 있을 때였습니다. 다 같은 말을 들었고, 다 같은 능력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오직 베드로만이 예수를 주로,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배워서 안 것이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은 지혜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기초는 지혜입니다.
누가 나를 도울 분인지 아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누가 나를 구해줄 분인지 아는 것이 시급한 일입니다.

정성만 있으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열심만 있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주여, 주여 말만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 정성을 쏟을 것이며, 무엇을 향한 열심이고, 누구에 아뢸 것인가의 문제인 것입니다.

조상의 유전에 열심이 있었던 바울은 누구도 풀어줄 수 없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살았습니다.
죽을 지경이 되어 탄식했습니다.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는 고백했습니다.
          (롬 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고백이라는 말은 아는 그대로 말한다는 뜻입니다.
참되게 말한다는 뜻입니다.
밝히 말한다는 뜻입니다.
믿는 자의 고백은 다른 신이 아닌 여호와가 나의 하나님, 나의 도움, 나의 피난처가 됨을 알고, 그를 선택했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바로 안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만이 구원의 능력이 되리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바울은 그가 깨달은 것 곧 십자가의 도를 온 세상에 전하는 자가 되어 말했습니다.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맞는 말입니다.
믿음은 세상이 어리석다고 말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아는 데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잠언에서 말합니다.
          (잠 22:1-2) 『[1]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 [2] 빈부가 섞여 살거니와 무릇 그들을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

재물보다 명예보다 나은 것이 은총이라는 말이요, 그 모든 것들의 근본이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이 하나님을 택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믿음은 여기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 예배의 시작은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입니다.
우리 기도의 시작도 여호와께서 나의 도움이시라는 고백입니다.
우리의 찬양은 그 전부가 여호와께서 나의 피난처와 요새라는 고백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나안 여인은 주 앞에 엎드렸습니다.
주밖에 달리 나를 구원할 이가 없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 외에 내가 찾아갈 곳이 없다며 주저앉은 것입니다.
주마저 나를 외면하시면 내가 어디로 가겠냐며 매달렸던 것입니다.

은총의 주이신 여호와를 택하는 지혜가 있으시기를 기원합니다.
여호와가 나의 하나님 되심을 아는 믿음, 오직 여호와만이 나의 도움이요 능력이 될 수 있음을 아는 믿음, 하나님께 피하면 안전하리라는 것을 아는 믿음으로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능력은 믿음대로 행하는 곳에서 나타납니다.

가나안 여인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라도 찾아가야 하고, 아무에게라도 도움을 구해야만 할 처지입니다.
예수가 아니면 다른 신을 찾아야 했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그 중에 예수를 택했습니다.
예수가 나의 구원, 나의 도움, 나의 피난처가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녀가 믿음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녀를 가로막는 장벽도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믿음을 가지고 주 앞에 엎드렸으나 주님께 즉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주 앞에 엎드리는 일 조차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뭇 남자들의 시선이 집중하고 있는 가운데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마태복음은 이 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 15: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소리를 질렀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부르짖던 것과 같습니다.
백부장이 예수께 와서 ‘주여 내 하인이 중풍으로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간청하던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어떤 여자도 예수님께 먼저 말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수가 성 우물가의 여자도, 혈루증 앓던 여자도 다 주님의 물음에 대답하는 자였지 먼저 말하는 자는 아니었습니다.
별 일 아닌 것 같지만 이것이 2,000년 전에 있었던 일이었음을 상기하면, 가나안 여자가 얼마나 용감한 여자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소리 질러 예수께 간청하는 일도 어렵고 힘든 일이었는데, 그녀를 더 힘들게 만든 것은 예수님이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마 15: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한 말씀 해 주실 법 한데 돌아보지도 않으셨습니다.
쓰다 달다 말씀이 없었습니다.
철저히 무시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기다리던 대답은 엉뚱한 곳에서, 바라지 않았던 소리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를 둘러싼 제자들이 말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 15:23) ...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저 여자가 도움을 청하니, 불쌍히 여겨 그 소원을 풀어 주시라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귀찮고, 시끄러우니 어떻게 해서든 보내시라는 말이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제자들은 자주 주를 찾는 자들과 주님 사이의 장벽이 되고 있습니다.
사람이 몰리는 곳에는 어디나 아이들도 있게 마련입니다.
제자들은 아이들이 주님께 방해가 된다고 생각해서 그들을 쫓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막 10:14)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바디매오가 보이지 않는 눈을 돌려가며 예수를 향해 부르짖을 때도 그랬습니다.
사람들은 바디매오를 향해 조용히 하라며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소리를 듣고, 멈추어 서서,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어보셨습니다.

예수님 가까이 있으면서, 사람들이 예수께로 향하는 길에 장애가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 자신도 주의 말씀을 맡은 목자라고 하면서, 양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주의 백성들이 믿지 않는 자들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겠습니까?
목자가 되고, 향기가 되라고 하셨는데...
그저 늑대가 되고, 악취가 되어 주의 분노를 사는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제자들은 가나안 여인과 주님 사이에 걸쳐 있는 가시철망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여자의 믿음은 그 모든 장애물을 허무는 믿음이었습니다.
바울이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다고 한 바로 그 믿음이었습니다.
그녀는 주님의 무관심과 제자들의 짜증을 뚫고, 주 앞에 엎드려 소원을 아뢰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를 더 어렵고, 힘들게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녀를 보고 말씀을 하셨는데, 그녀가 기대했던 말과는 너무나 달랐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나는 너와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네게 돌아갈 은혜는 없다는 말입니다.
다른 일도 많은데, 너까지 신경을 쓸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돌아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가나안 사람이라는 인종적 장벽, 여자라는 성적인 장벽, 예수님을 들러싼 제자들로 상징되는 사회적, 제도적 장벽 그 모든 것을 물리치고 주 앞에 엎드렸습니다.
주의 응답을 바래서, 그 모든 장벽을 다 허물고 주 앞에 엎드렸는데, 막상 들리는 주의 음성은 나는 너와 상관이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다른 길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말했습니다.
          [28] ...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상아래 개가 되어도 좋사오니...
부스러기라도 좋사오니...

주님이 달리 할 말이 어디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처음부터 거절할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그녀의 믿음을 시험한 것뿐이었는데, 그녀의 믿음은 주님의 기대를 뛰어 넘었습니다.
요한사도는 말했습니다.
          (요일 5: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그녀의 믿음이 바로 그 믿음이었습니다.
인종의 벽을 허무는 믿음이었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담을 뛰어넘는 믿음이었습니다.
제도와 조직의 방해를 극복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유대와 헬라, 종교의 골짜기를 메우고 나가는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조차 꺾을 수 없는 믿음이었습니다.
요한사도는 다시 말합니다.
          (계 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가나안 여인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15:28) ...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는 자의 앞을 가로막는 담은 주께로 가는 길을 막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자의 발밑에 있는 구럭도 믿는 자를 삼키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 믿음을 시험하고, 연단하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믿음이 그 어떤 시련과 환란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일 것을 요구하십니다.
다른 길이 없어서 주께로 왔다면, 이제 오직 주님만 바라 보아야야 하리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의 성서일과 중 야고보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약 2:16-17)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 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이웃에게 선을 행하라는 말씀의 끝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 하셨으니, 행함이라는 것은 단순히 선을 행하라는 말씀이라고만 알게 됩니다.
그런데 야고보 사도가 다시 말합니다.
          (약 2: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이라는 말의 참뜻이 무엇인지 알려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말합니다.
          (약 2:21-22)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것이 선한 일이라는 뜻입니까?
선한 일과는 상관이 없는 일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야고보 사도가 아브라함을 예로 든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습니다.
100세에 얻은 아들, 아브라함이 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셔서 주신 아들을 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쓰시겠다고 하신 것도 아닙니다.
내게 제사할 번제물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말씀에 순종하여 이삭의 몸에 칼을 겨누었을 때, 주님은 비로소 말씀하셨습니다.
          (창 22:12)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이제야 알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알지 못하는 길을 간 아브라함입니다.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기의 뜻을 꺾은 아브라함입니다.
큰 아들 이스마엘을 하나님 말씀하시는 대로 광야로 내어 쫓은 아브라함입니다.

그 동안 아브라함에게 믿음이 있는 줄 몰라서 이제야 알았노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선을 행했기 때문에 이제야 알았노라는 말씀은 더더욱 아닙니다.
이제야 알았노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아브라함의 믿음이 능치 못함이 없는 믿음인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기는 믿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도 달리 시험할 길이 없는 믿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믿음대로 행하고, 중단하지 않는 것이 행함이 있는 믿음인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것도,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라고 믿기에 그리 하는 것입니다.
믿음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아브라함을 빌어 말하고자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가나안 여인의 믿음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안 된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께 가면 소원을 이루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주께로 가 그 앞에 엎드렸습니다.
믿음대로 행한 것입니다.

허다한 장벽이 그녀를 막아서고, 주님마저 그녀를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주를 믿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중단치 않고 믿음대로 행한 것입니다.

이제는 주께서 달리 어찌할 길이 없는 곳까지 이르렀고, 마침내 소원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살아있는 믿음, 능력 있는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거기까지 믿어야 하겠습니다.
거기까지 견뎌야 하겠습니다.
거기까지 행해야 하겠습니다.
이제야 네가 나를 참으로 믿는 줄 알았노라고 하실 때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대로, 끝까지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밖에 달리 없음을 알고, 주를 찾는 자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야 내가 네 믿음을 보았노라고 하시는 말씀을 듣는 자는 많지 않습니다.
세상에 굴복하기 때문입니다.
내 사정과 세상 형편을 먼저 살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믿습니다. 그러나 이런 저런 사정이 있어 주를 찾지 못하고, 주 앞에 엎드리지 못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입니다.

바로 그 사정, 그 형편을 이겨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믿음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행하는 믿음이래야 이기는 믿음, 능력있는 믿음, 주님이 인정하는 믿음에 이르는 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살아있는 믿음을 가지시기를 기원합니다.
능력 있는 믿음을 가지시기를 기원합니다.
마침내 ‘네 소원대로 되리라’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 다 듣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됩니다.
          [30]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주님의 복된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눈으로 보는 은총이 있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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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난돌 (180.64.176.223)
2009-09-04 12:28:47
정정합니다
성서일과 중 시편은 시 146편입니다. 야고보서는 11-13절이 괄호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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