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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나무 되게 하소서미리 보는 교회력 설교/오순절 후 여덟째 주일(20090726)
박성규  |  theos53@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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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년 07월 22일 (수) 09:58:56
최종편집 : 2009년 07월 22일 (수) 16:06:27 [조회수 :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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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 후 여덟 번째 주일(20090726)
성서일과/ 시 145:10-18; 왕하 4:42-44; 엡 3:14-21; 요 6:1-21
본문/ 에베소서 3:14-21
큰 나무 되게 하소서

(엡 3:14-21) [14]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오늘 본문은 성도들을 위한 바울의 중보기도입니다.
바울의 기도가 그대로 우리에게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그가 무릎을 꿇고 비는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이름을 주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부를 때 흔히 사랑의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인자와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 이런 식으로 부르는 수가 많은데, 이름을 주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이 눈에 띕니다.
바울이 생각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이름을 주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나 당신을 소개하시는 장면입니다.
(출 3: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예수님도 이 말을 인용하셨습니다.
(마 22: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

아브라함의 아들이 이삭이고, 이삭의 아들이 야곱이니 차례대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해도 세 사람 사이에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세 사람 모두에게 이름을 주신 것입니다.
그들 이후로는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99세 되던 해에 그를 찾아 오셔서 아들을 약속하시고, 복을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창 17: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6]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

그 아내 사래도 그때 열국의 어미라는 뜻의 사라로 바꾸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장차 낳게 될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 지어주시며 그에게도 복된 약속을 주셨습니다.
(창 17:19) ..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하나님은 야곱에게도 이름을 지어 주셨습니다.
얍복강에서 밤새워 기도한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곧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뜻의 이름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각 사람에게 이름을 주셨다는 말은 약속-복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우리를 다스리시며, 복 주시는 하나님, 인생을 아름답고 귀하게 여기셔서 특별한 복을 약속하시는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빌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름을 주신 하나님 곧 복 주시는 하나님께 비는 간구가 우리 각 사람에게 그대로 이루어지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다신 한 번 간절히 기원합니다.

바울이 그 사랑하는 성도들을 위해 하나님께 비는 복은 무엇입니까?

저는 본문을 보면서 문득 ‘복 있는 사람은 ... ’ 으로 시작하는 시 1편이 머릿속에서 맴돌았습니다.
시 1편은 모든 시의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 중의 시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복 있는 사람의 모습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로 나타납니다.
(시 1:3)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예레미야도 이런 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렘 17:8)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바울의 기도 전체에 흐르는 것도 물가에 심은 나무의 이미지입니다.
물가에 심은 나무는 뿌리를 깊게 뻗습니다.
높고, 크고, 넓게 자랍니다.
열매가 충만합니다.
큰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의 사랑하는 성도들이 시냇가에 심은 큰 나무처럼 되기를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주 우리는 하나님이 이루어주신 다윗의 집을 살펴보았습니다.
큰 나무는 하나님이 이루시는 집 그리고 선한 목자의 인도를 받는 양과 더불어 성도들이 사모할만한 복의 모형입니다.
어떻게 하면 큰 나무처럼 되는 복을 누릴 수 있습니까?

무엇보다 먼저 물가에 심기워야 하겠습니다.

시편은 시냇가에 심기운 자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시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렘 17:7]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바울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16]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그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의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시인이나 예레미야나 바울이 한결같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 곁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그를 의지하고, 그를 사모하며, 그의 말씀을 즐겁게 듣는 자가 강건하게 자라서 큰 나무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는 그 이름을 지어주신 자를 떠난 것입니다.
아비의 집을 떠난 아들과 같습니다.
뿌리 뽑힌 나무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 어디입니까?
하나님은 천지에 충만하시니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다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특별한 곳을 택하셔서 당신의 이름을 두신다고 하셨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왕상 8:29)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하나님이 보시지 않는 곳이 어디에 있을 것이며, 하나님이 기도를 듣지 못하실 곳이 어디에 있겠습니까마는, 하나님은 특별히 성전을 주목하시고, 거기서 드리는 기도를 즐겨 들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이름을 거기에 두셨기 때문입니다.

또 성전은 생수의 강이 솟아나는 곳입니다.
(겔 47:1)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내리더라 ...

성전에서 비롯된 이 물은 갈수록 깊어져서 마침내 온 세상을 소성케 하는 큰 강이 되고, 그 곁에 많은 나무들이 자라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5]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창일하여 ....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6] .... 나를 인도하여 강가로 돌아가게 하시기로 [7] 내가 돌아간즉 강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더라

오늘날 그 옛날의 성전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점에서 교회는 성전의 기능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아니 성전 그 이상입니다.

교회는 사람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세워진 것입니다.
그 피가 생수의 근원이 되어 흐르고 있습니다.
그의 피 공로를 믿음으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른 자들이 모인 곳입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주야로 그 자녀들을 지켜보시는 곳입니다.
그 하나님이 귀를 기울여 자녀들의 간구를 들으시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로 사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피의 은총이 생수와 같이 흘러넘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교회의 머리요 우리는 지체니, 우리가 그를 떠나서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에 머무는 자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나라는 나무를 물가에 심는 일입니다.
그리스도가 흘리신 보혈의 공로 옆에 여러분 자신을 심는 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거기서 믿음의 뿌리를 깊게 내려야 하겠습니다.
바울이 기도합니다.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겉으로 드러난 나무의 모습은 땅속에 박혀 보이지 않는 뿌리의 모습과 같습니다.
높이 솟은 나무는 뿌리가 깊고, 넓게 펼쳐진 나무는 뿌리가 넓게 퍼져 있습니다.
큰 나무가 되기를 바란다면 반드시 뿌리를 깊고, 넓게 내려야 합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넘어지지 않습니다.
가뭄이 와도 마르지 않습니다.

뿌리가 얕은 신앙은 그렇지 못합니다.
서 있기가 쉽지 않고, 조그마한 어려움이 닥쳐도 쉽게 실망하고 좌절합니다.
시성 이백은 귀양을 떠난 자신을 뿌리 뽑힌 다북쓱에 비유한 바 있습니다만 성경의 묘사는 더욱 생생하기만 합니다.
(시 1:4)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어떻게 깊은 뿌리를 내려 이리저리 날지 않고, 쉬 흔들리지도 않을 수 있겠습니까?

무엇보다 세월이 뿌리를 깊게 합니다.
아무리 좋은 씨를 심어도 세월이 흐르지 않으면 큰 나무가 될 수 없습니다.
좋지 못한 나무를 심어도, 한 곳에 머물러 오랜 세월이 흐르면 큰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연륜이 깊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자랑할 만한 무엇이 있는 법입니다.
그만큼 많은 풍랑을 헤치고 살아 왔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레 19:32)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늙었다는 사실만으로 공경 받을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오래 다녔다는 것은 자랑할 만한 것입니다.
할머니, 어머니로부터 믿음을 유전한 것은 참으로 자랑할 만한 것입니다.
그만큼 뿌리가 깊을테니까요.

정함이 없이 이리저리 교회를 옮기는 신자들을 한 번 보십시오.
믿음의 뿌리가 얕은 자들입니다.
언제 어떤 바람에 휘날리게 될지 모를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뿌리를 내리는 신앙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자가 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 다음은 좋은 환경입니다.
가능하면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심한 풍상이나 질병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찌 세상이 그렇습니까?
수욕정이풍부지(樹欲靜而風不止)라, 나무는 가만히 있으려 해도 바람이 멎질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실망할 일은 아닙니다.
풍상을 겪고 질병이 닥쳐도 두려워할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약할 때에 주님이 우리의 버팀목이 되어주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말합니다.
(고전 1:8)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이것이 주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합니다.
...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고 합니다.
나무가 클수록 가지도 많은 것은 정한 이치일 텐데, 광야 같은 인생을 살면서 풍랑이 없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러나 뿌리가 깊으면 바람을 이기는 힘도 커지기 마련입니다.
흔히 인생에 비유되는 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배라는 것은 풍랑을 만나도 쉽게 요동치지 않는 배를 말하는 것이지 풍랑을 만나지 않는 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크고 좋은 배는 먼 바다로 나가도 염려가 없습니다.
쉽게 넘어지지 않는 까닭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 곁에 머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도 진득하게 오래 붙어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환란과 시련이 없을 수 없으나,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의 사랑에 힘입어 믿음의 깊은 뿌리 내리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사랑의 가지와 잎이 넓고 무성해야 하겠습니다.

가지가 무성하게 넓으면 넓은 그늘이 생깁니다.
밤이면 새들이 깃을 드리우고, 낮이면 고단한 인생들이 쉼을 얻을 수 있는 곳이 됩니다.
가지가 많으면 열매도 많습니다.
열매를 위해서는 해마다 새로운 가지가 형성되어야 합니다.
묵은 가지에 열매가 달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로 교회의 으뜸가는 사명인 새로운 생명을 구원하는 전도와 선교의 역사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역사는 그의 사랑의 역사입니다.
요한이 말했습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랑을 아는 자가 사랑을 전하는 법입니다.
선교의 역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사랑에 힘입어 그리스도의 종이 된 바울은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말했습니다.
(딤전 1:14-15) [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오늘도 간구하고 있습니다.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어떻게 하면 충만하게 되겠습니까?
이미 있는 줄기들이 튼실해야 합니다.
연약한 줄기에는 새 가지가 나지 않고 설사 나더라도 쉽게 마르고 마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이미 주신 사랑의 크기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처음부터 굵은 줄기가 아니었습니다.
순으로부터 시작해서 가지가 되고, 줄기라 불리는 것이 되기까지 내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측량할 길이 없는 사랑에 힘입은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의 사랑에 힘입은 것입니다.
그 사랑을 아는 자가 남을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랑해야 할 때입니다.
나로부터 새 가지가 생기게 해야 합니다.
내 가정에서부터 시작해서 내 이웃에 이르기 까지 가지가 되고 줄기가 될 수 있는 순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 순들이 잎이 되고, 마침내 가지와 줄기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전도하는 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일이 곧 전도하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사랑의 빚진 자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보금자리를 잃은 새와 같은 이웃의 둥지가 되어주시기를 바랍니다.
햇빛을 가릴 길 없어 땀 흘리는 나그네의 그늘이 되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름다운 열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나무의 열매들은 두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새들과 짐승과 사람의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새로운 나무를 생기게 하는 씨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 나무들이 그 열매를 새나 짐승의 열매로 제공하는 것은 자기 종족을 번식하려는 방법입니다.
따라서 두 가지 기능은 기실 하나와 같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나무의 열매들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마찬가지로 한결같이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합니다.
누군가 먹어 주기를 바래서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씨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성도가 세상의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그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면, 그 결과는 새롭게 구원받은 생명의 증가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착한 행실은 나무의 아름다운 열매와 같은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 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바울이 기도합니다.
[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우리의 복은 하나님께 영광이 될 때에만 참된 것입니다.
아무리 많아도, 아무리 잘 되도, 아무리 강해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으면 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착하고 아름다운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는 성도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습니까?
참된 아름다움은 색깔이나 모양에 있지 않습니다.
흰색이 검은 색보다 아름답다는 것은 관점의 차이일 뿐입니다.
긴 것과 짧은 것도 그렇습니다.
조화와 부조화, 균형과 불균형도 그렇습니다.
아름다움에는 절대적 기준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언제나 아름다운 것,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것이 무엇입니까?
아마 ‘다움’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아름다움이라는 말에 붙어있는 그 ‘다움’입니다.

여자는 여자다울 때 아름답습니다.
남자는 남자다울 때 아름답습니다.
학생은 학생다울 때 아름답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는 성도다울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성도가 가장 성도다울 때는 어느 때입니까?
세상과 구별될 때입니다.
성도는 세상과 구별될 때 가장 성도답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함께 좋아하고 세상이 바라는 것을 함께 바래서는 안 됩니다.
바울이 말했습니다.
(고전 15: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세상이 보는 것 너머를 보고, 세상이 아는 것 이상을 알고, 세상이 바라는 것 그 위를 바라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무리 곧 성도인 것입니다.

성도가 성도다우면 어떻습니까?
(시 1:3)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 살되 세상에 속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을 살되 세상을 사랑하지 마시기를 기원합니다.
세상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세상이 바라지 못하는 것을 소망하며, 세상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우리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이상으로 넘치게 주실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새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복을 약속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가시나무와 같이 세상의 헛된 영광을 쫓아 사는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님의 몸 된 교회에 머무는 자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어떠한 풍랑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믿음의 뿌리가 깊어 흔들리지 않는 큰 나무가 같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새들이 깃들일 만큼 사랑의 품이 넓은 나무, 가뭄이 와도 그 잎이 마르지 않는 나무와 같으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름다운 행실의 열매를 맺어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큰 나무와 같은 성도들 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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