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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심(良心)과 행동(行動)
 닉네임 : 쓴소리  2021-08-02 08:55:45   조회: 1651   
양심(良心)과 행동(行動)

국어사전에 양심(良心)은 “도덕적인 가치를 판단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선과 악을 깨달아 바르게 행하려는 의식”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다른 양심(兩心)이 있는데 이는 두 마음이라는 뜻이다.

양심은 같은 양심인데 비양심(非良心)도 있다는 말이다. 전자(前者)의 양심이라면 나무랄 데가 없지만, 후자(後者)와 같은, 경우에는 비양심(非良心)이 있어 결과(結果)는 행동(行動)을 보고 판단(判斷)할 수밖에 없다.

양심에 관하여 에마누엘 스베덴보리는 “양심은 인간 속에 있는 신의 출현이다.”라고 하였고 쇼지 고든 바이런은 “인간의 양심은 하나님의 스피커이다.”라고 하였으며 보브나르그는 “죽어갈 때의 양심은 일생의 거짓을 드러낸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양심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목소리이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양심은 일천 명의 증인이다.”라고 말한 이도 있다.

나무는 열매를 보아 안다는 성경 말씀과 같이 아무리 자기가 “나는 양심적이라”라고 말하지만, 객관적(客觀的)으로 볼 때 그의 행동에서 양심적인지 비양심적인지 판단, 할 수가 있다.

성경에 “좋은 나무에서 나쁜 열매가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에서 좋은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 열매가 수종(樹種)이 좋고 나쁨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아무리 인간이 나는 양심에 한 점의 부끄러움이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해도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신(神)은 속일 수가 없다.

진정으로 양심적인 사람은 토마스 풀러는, 말하기를 “맑은 양심은 어떠한 고통도 견딜 수 있다.”라고 하였고 토마스 아캠퍼스는 “양심이 깨끗한 자는 쉽게 만족을 얻고 평안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루시 무슨 아나 이우시 세네카는 “진정한 즐거움의 기초는, 양심이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예수그리스도 당시 바리새인들은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 죽이려고 했을 때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그 여자를 돌로 치리”라고 하였다.

이때 그들은 양심에 가책을 받고 돌을 땅에 던지고 모두 자기의 갈 곳으로 돌아갔다고 하였다.

양심을 속이고 행동하는 사람들은 겉으로는 태연한 척 태도를 연출하지만, 마음은 불안하고 초조하여 안절부절, 못하고 단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성경에 “악인(惡人)은 쫓아 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義人)은 사자와 같이 담대 하느니라”라고 하였다. 이는 양심적(良心的)으로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죄를 지은 사람은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지만, 경찰서 앞을 지나고 검찰청 앞을 지나며 경찰관을 만나면 속으로는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어 전전긍긍(戰戰兢兢)하게 된다.

죄를 다스리는 법관들은 양심에 가책 없이 진정으로 판결하는가? 법원 벽면을 보면 저울을 그려놓았다. 이는 저울은 공정성이 생명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법관들의 양심을 표시하는 것이며 법의 정확성을 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양심적으로 말해서 한 점의 부끄럼도 없이 저울처럼 공평한 판결을 했는가? 어느 법관이라도 나는 그렇게 공정하게 했노라고 양심에 부끄러움 없이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법관이 얼마나 될까?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한가지 예를 들면 이찬영 판사가 범죄인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독립운동 투사들이 붙들려와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 목숨을 내놓고 투쟁하는 독립운동가들에게 갖은 죄목으로 유죄판결을 내릴 때의 심정은 말로, 다하기가 어려울 만큼 괴롭고도 고통스러운 일이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판사직을 내던지고 출가하여 효봉 스님이 되어 스님으로 수도((修道) 하가다가 1,966년,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뿐 아니다.

법관의 오판으로 무죄(無罪)한 사람이 억울한 옥살이를 했는데 후에 진범(眞犯)이 잡혀 법관의 오판이 한 사람의 일생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겨준 일도 있다.

현대병 중에 뇌졸중(腦卒中)을 비롯한 마비증세(痲痹症勢)가 심각한 질환으로 떠돌고 있다.

심지어 어린이 중풍까지 늘어나는 추세인데 이보다 더욱더 심각한 것은 양심의 마비증세다. 프랑스의 철학자 루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양심은 신성한 본능이여, 하늘의 소리요 지성과 자유의 안내자, 선악에 대한 심판자. 인간 본능의 우수성과 도덕성의 근본. 그대가 존재하지 않으면 단지 규율 없는 모성과 원리 없는 이성의 도움을 빌려서 잘못만을 저지르는 특권을 느낄 뿐이며 그때는 누구나 짐승일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마비(痲痹) 된 양심과 화인(火印) 맞은 비양심이 있어 양심이 제 기능(技能)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바울은 종교지도자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대중들 앞에서 하는 말이 “범사에 나는 양심(良心)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라고 당당하게 말하였다.

이는 하나님의 종이라는 직책을 맡아 양심에 거리낌 없이 주의 일을 성실하게 했다는 것이다.

오늘의 종교지도자들이 정말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이 양심적으로 떳떳하게 일했다고 자부심으로 만인 앞에서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모르기는 해도 상당수가 보이지 아니한 곳으로 숨어 어둠아 나를 가리어다오 하며 숨을 자가 없을지 생각해 본다.

그리고 대통령을 비롯하여 정말 양심에 가책 없이 당당하게 일했다고 말할 수 있는 국회의원이 있을지 경찰, 검찰, 판사가 있을지 그리고 전국의 공무원들, 중에는 나는 양심적으로 부끄러운 일은 절대 하지 아니하였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만약에 양심을 영상으로 촬영할 수 있는 촬영기가 있다면 그의 활동을 찍어 TV 방송국에서 그 동영상을 방영한다면 말로는 양심적으로 했다고 큰소리치던 그들의 모습이 어떠할까? 입만 열면 국가와 국민을 위한다고 하며 정의를 부르짖던 자들의 양심과 행동을 비교분석 한다면 국민의 반응과 그들의 반응은 어떨까? 상상(想像)해 본다.

양심을 속이고 구중궁궐(九重宮闕)에서 호의호식(好衣好食)하며 떵떵거리고 비양심적(非 良心)으로 사는 것보다 차라리 초가(草家)에서 보리밥과 된장에 풋고추 찍어 먹으면서도 양심에 가책 없이 마음 편히 사는 것이, 훨씬 더 행복하다. 죄는 언제나 사람을 불안케 하고 쫓기게 하며 숨게 하는 성질이 있다.

가인이 동생을 죽이고 하는 말이 “나를 만나는 사람마다 자기를 죽일 것 같다.”라고 불안한 심정을 드러낸 적이 있다. 이는 양심에 심판을 미리 받고 있다는 증거이다.

같은 맥락에서 오늘의 권좌(權座)에 앉은 분들이나 백성을 지도하는 위치에 있는 분들은 양심대로 행동하는지 반대로 양심과는 거리가 멀리 떨어진 행동을 하는지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자신들은 누구보다도 먼저 알고 있을 것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슬리고 죄를 짓고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숨었다. 이는 양심이 있다는 증거이다.

그런데 현대 사람들은 남이 알지 못하게 은밀하게 죄를 짓고도 부끄러움은커녕 더욱더 큰소리치며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여기는 시대가 되었으니 사회는 점점 삭막해지고 살기는 더욱더 팍팍해지며 사람들은 철면피와 같이 이중인격자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사람이 마음을 놓고 살만한 좋은 세상이 될 것이니 양심(良心)과 행동(行動)이 일치하게 하여 꽃에 벌과 나비가 몰려오듯이 우리가 사는 사회에 세계인들이 몰려오는 기적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2021-08-02 08:5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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