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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해득실(利害得失)을 전제로 한 효(孝)는 효(孝)가 아니다. (의성신문 제682호)
 닉네임 : 쓴소리  2020-05-28 13:22:23   조회: 262   
이해득실(利害得失)을 전제로 한 효(孝)는 효(孝)가 아니다. (의성신문 제682호)

본래 효자(孝子)라는 말의 본뜻은 제사 때 읽는 축문(祝文)에 쓰는 말이다.

즉, 제주(祭主)가 되는 맏아들이 축문에서 자신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돌아가신 어버이 앞에서 정성스럽게 제사 드리는 아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맏아들이란 뜻과 부모의 상을 당했다는 뜻이 있다.

그런데 바뀐 뜻은 “살아 계실 때나 돌아가셨을 때나 부모를 잘 섬기는 사람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말로 쓰인다.

국어사전에는 효자(孝子)는 부모를 잘 섬기는 아들”이라고 하였다.

런데 현실에서 진정한 효자가 얼마나 있겠느냐는 것이다.

옛날에는 효성이 지극한 아들들이 많아서 서양인들이 한국에는 효자가 만다고 극찬하였지만, 지금은 그와 같은 극찬을 듣기에는 거리가 너무나도 멀다는 것이 여론이다.

속언에“부모가 죽은 뒤 효자는 많아도 살아 있을 때 효자는 드물다.”라고 하였다.

돌아가신 후에 제사를 지내는 효자는 많아도 살아생전에 효성이 지극한 자녀들은 많지 않다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라고 하였다.

이는 부모를 공경하는 과정에서 이해득실을 떠나서 무조건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명령이다.


만약에 불효하면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라고 하였다.

이는 효도에는 이해득실 여지가 조금도 없다는 말이고 인간의 본분이고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으로 부모에게 효도한 인물이 있는데 그가 바로 룻 이라는 며느리다.

그는 모압 여자로서 유대인 나오미의 자부가 되었다가 일찍이 과부가 되어 시어머니가 자신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시어머니가 두 며느리에게 말하기를“희망이 없으니 돌아가라 하니

오르바라는 며느리는 돌아갔고 룻은 나를 돌아가라 하지 말라고 하며 어머니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라고 하였다.

이는 얼마나 착한 며느리인가? 이해득실(利害得失)을 따진다면 이민 생활 실패하고 빈털터리로 반겨주는 사람도 없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시어머니 따라나섰겠는가?

그리고 모국의 신앙과 생활풍습이 다른 나라로 가서 어떤 고생을 하려고 따라나섰겠는가?

그리고 종교적으로도 개종할 뜻을 보이고 시어머니와 생사고락(生死苦樂)을 같이하겠다는 단단한 각오로 나서는 모습은 자신의 고생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오로지 외로운 시어머니 한 분만을 위해서 효도하겠다는 마음뿐이었다.

그리하여 시어머니 고향에 가서 그가 하는 일은 자기의 밭도 아닌 타인의 밭에서 곡식 단 사이에 떨어진 이삭을 줍는 일이었는데 그는

이삭이라도 주어서 시어머니 한 끼의 식사라도 해드려야 한다는 일념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하늘의 복을 받아 보아스라는 베들레헴의 부자와 결혼하게 되어 결국 그의 후손에서 예수그리스도라는 구주가 탄생하여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장에 이름이 기록되어 오늘까지 그 이름이 성경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는 아무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고 시어머니에게 효도한 분명한 결과다.

어느 교수가 여자 고등학교에서 특강을 하면서 여고생들에게 묻기를“너희 중에 앞으로 시집가서 시부모(媤父母) 모시고 살 사람 손을 들어보라”라고 했는데 한 학생도 손을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여학생들이 하는 말이“지금 세상에 어느 며느리가 시부모님을 모시고 삽니까? 시(媤) 자만 들어도 소름이 돋아 시금치도 먹기 싫다.”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 교수의 말이 과장되었다고 치더라도 이는 웃고만 넘어갈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글을 쓰는 나는 “네 부모(父母)의 고통(苦痛)을 아는가?”라는 작은 책자를 저술한 적이 있다.

이 세상에 시적으로 문학적으로 부모(父母)의 은혜에 대하여 눈물이 나도록 표현은 기막히게 잘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문학적인 표현과는 거리가 먼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하게 일어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요즘 KBS, 일일 연속극 제목이 “기막힌 유산”이라는 드라마를 볼 때 이 장면이 드라마 속의 연출만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한다.

아버지의 유산을 둘러싸고 자식들 간의 기막힌 태도의 연출은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한다.

성경에 나오는 탕아와 장자(長子)의 태도는 아버지 품을 떠나 타국에 가서 아버지로부터 받은 유산을 몽땅 허비하고 허랑방탕하다가 죽음 직전에 돌아온 탕아만 탕아가 아니고 아버지 심정을 이해하지 못한 장자(長子)도 탕아와 같다.

아버지는 죄를 짓고 돌아온 자식을 위하여 죽었다가 살아 돌아온 아들같이 여기고 송아지 잡아 잔치를 베푸는 것을 그동안 아버지 모시고 효도한다고 하면서 아버지를 모시고 있던 아들이 불평하기를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날려버린 동생을 위하여 송아지 잡아 잔치를 베풀면서 아버지를 여러 해 섬기며 아버지 명을 어긴 일이 없는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즐겁게 한 일이 없다.”라고 심하게 불평하였다.

이는 둘 다 불효자식이라는 것이다.

동생은 허랑방탕한 탕아이고 형은 효도하였다고 하면서 이득을 생각한 자체도 불효자인 탕아라는 말이다.

부모를 공경함에, 있어서는 이해득실(利害得失)을 초월하여 자식 된 도리만 다하면 그것으로 끝나야 한다.

효도하였다는 이유로 아버지 재산을, 넘보는 것은 진정한 효도가 아니고 자신의 이득을 전제로 한 연극에 불과한 것이다.

이래서야 어찌 자식의 도리를 다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지금은 효도 대신에, 불효하면서도 아버지 재산을 빼앗으려고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일들을 서슴없이 하는 자식들이 있음을 방송과 신문을 통해서 볼 수 있다.

옛말에 “효자(孝子)는 호식(虎食)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효자는 하늘의 보호를 받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해득실(利害得失)을 전제로 한 연극(演劇)은 그만 연출(演出)해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천벌(天罰)이 두렵기 때문이다.
2020-05-28 13: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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