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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삽의 의문(疑問)과 깨달음
 닉네임 : 쓴소리  2020-01-06 19:20:47   조회: 147   
아삽의 의문(疑問)과 깨달음

아삽은 다윗의 세 악사 중 한 사람으로 성전에서 찬송하는 찬양(讚揚) 대의 대장이다.

이는 아삽은 불신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전에서 찬양하는 성도라는 말인데 성도(聖徒)는 구별된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무엇 때문에 하나님에 대하여 의문을 품었을까? 시편 73편을 보면

“하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고 복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알고 있고

의인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으며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은 망한다고 하신 것을 알고 믿고 있었는데 현실은 전혀 아니라고 그는 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악인(惡人)의 득세를 보고 의문(疑問)을 품고 “넘어질 뻔” 하였다고 하였다.

이는 실망을 넘어서 하나님의 공의를 의심하고 타락(墮落)과 실망(失望)할 뻔하였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 이유는 “악인(惡人)이 형통(亨通)하고 그들은 죽을 때 고통(苦痛)도 없고 살아생전에는 건강하고 고난(苦難)도 당하지 않고

성도를 포함하여 일반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災殃)도 그들에게는 없으니

그들은 교만(驕慢)이 그들의 목걸이가 되고 강포(强暴)가 그들의 옷이 되며 소득(所得)은 마음으로 원하는 것보다 많으며 그러니 그들은 안하무인(眼下無人)이 되어 거만하고,

그리고 이들은 악인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난다.”라는 것이 의문(疑問)이었다.

그래서 아삽은 푸념하기를 “내가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라고 솔직하게 하나님의 공의(公義)에 대한 의문(疑問)을 노골적으로 들어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어서 하는 말이 “나는 종일 재난(災難)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懲罰)을 받았도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문자답(自問自答)하기를 “내가 만일 그들처럼 주의 아들들이 세대에 대하여 악행(惡行)을 행하였으리다.”라고 하였다.

이는 의문(疑問)의 차원을 넘어서 항의(抗議)와 반항(反抗)의 수준에 가깝다.

그는 곰곰이 생각하기를 도대체 왜 상식적으로 말도, 안되는 이런 일이 나타나는가?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했다.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苦痛)이 되었다.”라고 솔직히 말하였다.

당시의 아삽만 그와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니고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그와 같은 의문(疑問)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독일의 히틀러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하였다.

그것도 천인공노(天人共怒)할 방법으로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도대체 선의 편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렇게 잔인한 인간들을 그대로 두시는 것인가? 의문(疑問)을 가질 수 있고,

그리고 북한이 기독교인들을 가장 잔인하게 학살하여 기독교인 씨를 말리려 하는 것을 하나님은 보고만, 계시는지 의문(疑問)을 가지지 아니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단 교주들이 모두 부자로 산다는 것은 의문(疑問)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한국뿐만 아니고 세계적으로도 이단(異端)들이 경제적으로는 하나같이 풍부하다는 것은 세계가 모두 인정하고 다 아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공의(公義)를 아는 사람이면 악인(惡人)이 잘되고 의인(義人)이 망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시편 일 편에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무릇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그 말씀의 기준대로라면 악인은 망하고 의인이 흥해야 하지 않겠는가?

공자도 “역천(逆天)자는 망(亡)하고 순천(順天) 자는 흥(興)한다”라고 하였는데

도대체 현실은 빛 보다 어둠의 세력이 더 강하고 진리보다는 비진리가 흥하며 정직하게 사는 사람보다는 사기꾼이 잘되는 것 같고 순리(順理)대로 사는 것보다

역리(逆理) 적으로 사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 같이 보이니 어찌 의문을 가지지 않겠는가? 의문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이 모순된 부분에 의문을 제기하고 아삽은 해답(解答)을 얻고 깨닫게 되었다.

그가 말하기를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라고 했는데

종말에 보니 “주께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破滅)에 던지시니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全滅)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그동안 의문에 불평과 불만을 나타낸 것이 양심(良心)에 찔렸다고 고백하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가리켜서 “우매 무지(愚昧無知)하여 주 앞에서 짐승이라”라고 하였다.

그가 깨달은 것은 “하늘에서는 주 외에는 누가 네게 있으리오 땅에서는 주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하는 말이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라고 하였다.

지혜의 왕인 솔로몬은 말하기를 “악인의 집에는 여호와의 저주가 있거니와 의인의 집에는 복이 있느니라”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복은 바울이 말한 “하늘에 속한 신령(神靈)한 복이라”라고 하였다.

그래서 가나안을 향하여 가던 모세도 많은 고생을 했고 엘리야도 죽기를 원했으며 욥도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만나 뵙고, 싶다고 하였다.

사도 요한은 유배지에서 “아멘 주 예수시여 오시옵소서”라고 하였다.

신령(神靈)한 복을 받은 거지는 하늘의 복을 받았지만, 없는 것이 없이 호의호식한 부자는 지옥(地獄)에서 고생을, 했으니 눈으로 보이는 것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의문과 불평불만(不平不滿)을 하지 말고 바울과 같이 “현재 고난(苦難)은 장차 영광(榮光)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라는 소망(所望) 속에서 즐거워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아삽은 의문을 던지며 불평을 했지만, 깨달은 후에는 하늘에서나 땅에서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가 없다고 말한 것을 기억하고

남은 생은 의심하거나 불평하거나 원망하는 일은 하지 말고 바울과 같이 삼 층 천이라도 다녀오는 체험을 하고 주를 위하여 굶고 매 맞고 자지도 못하고 고생을, 다했지만,

그와 같은 일을 고사하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한다는 그의 신앙을 본받아 세상을 이기고 자기를 이기는 생활을 하여

“악인의 형통(亨通)을, 부러워하지 말라 악인의 형통은 다 죄니라 죄 삯은 사망이라”라는 주의 말씀을 기억하고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면서 살아야 할 것이다.
2020-01-06 19: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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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삿갓 2020-02-28 19:11:07
이 세상은 공중권세잡은 사탄이 지배를 한다.
그래세 세상적이고 탐욕적이고 마귀적이다.

이 땅에서 악인의 형통은 3500년 전의 욥기에서 나타난다.
인간은 자기의 의로 구원 받을 수 없는 존재이다.
악인 뿐 아니라 착한 자도 전부 죄인이다.
아삽의 실수는 자신을 스스로 의인으로 치려는 것 아닌가?
옆에서 넘어지면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신약은 알곡과 가라지를 가리기 위해 추수의 때를 기다리는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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